"나쁜 날이면 사람을 죽여도 돼?" 아이가 물었다
캐나다에서 '애틀란타 총격 사건'을 지켜보며... 팬데믹 이후 점점 늘어가는 증오범죄
▲ 2021년 3월17일, 4명이 총에 맞아 숨진 마사지숍밖에서 꽃과 "Stop Asian Hate(아시아인 혐오를 멈추라)"라는 팻말이 놓여져있다. 로버트 아론롱(21세)는 지난 화요일 아틀란타지역 스파3곳에서 8명을 사망하게 한 혐의(아시아 여성6명)를 받고 있다.(Elijah Nouvelage) ⓒ 연합뉴스/AFP
"나쁜 날이면 사람을 죽여도 돼?"
15살 딸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지난 16일 미국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총격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들은 뒤였다. 사건 발생 후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열린 브리핑에서 체로키 카운티 보안관실의 제이 베이커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용의자는 책임을 느끼고 있다, 인종주의 때문에 저지른 사건은 아니며 자신에게 성중독이 있다라고 말했다, (사건을 일으킨) 그곳들을 자신을 유혹하는 장소로 여긴다, 그는 유혹을 없애고 싶어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사건 브리핑 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아니 화가 치미는 내용이었다. 그는 보안관실 대변인이 아닌 용의자 로버트 아론 롱의 대변인을 자처한 듯 보였다. 자신과 같은 백인이자 너무도 젊은 21살의 청년에게 연민이라도 느꼈던 걸까.
성중독(이 역시 용의자의 주장일 뿐이다)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궁지에 몰려 결국 참극을 벌이고 만 가련한 젊은이로 여긴 건 아닐까. 이 대변인의 연민은 먼저 희생자와 유족들을 향했어야 했다.
비극을 만들어낸 '증오'라는 바이러스
그의 발언은 곧바로 거센 비난 여론에 맞닥뜨렸다. 8명을 살해한 용의자를 옹호하고 반아시아인 정서에 기반한 사건을 경시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이는 언론에 나오는 전문가 멘트에서도 알 수 있다.
은퇴한 FBI 특별수사관 짐 클레멘트는 "총격 사건에서 드러난 계획의 정도를 보았을 때, 범행 동기는 단지 '나쁜 날' 이상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행동은 그가 특정한 날에 특정한 부류의 사람을 타깃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고 말해 이번 사건이 증오범죄임을 시사했다.
인디애나 대학의 엘렌 우 교수는 "이런 식으로 동기에 초점 두는 것에 진력이 난다. 나는 벌어진 일의 영향력, 결과, 여덟 명이 사망한 사건의 귀추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고 비판했다.
보안관실은 공식 사과한 뒤 로버트 대변인을 이 사건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지방검찰청은 아직까지 용의자에 대한 증오범죄 혐의 적용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의 범죄가 증오에서 비롯되었음을 뒷받침할 만한 온라인 게시글이나 문자 메시지 등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청의 태도와는 달리, 이 사건을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로 바라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총 8명의 희생자 중 6명이 아시아계 여성(그중 4명은 한국인)인데다 사건이 벌어진 세 곳 모두 아시아인들이 운영하는 업체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사건이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증오범죄가 폭증한 가운데 발생했기 때문이다. 작년 미국에서는 수천 건의 증오범죄가 보고되었고 이는 최근 10년 새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미국 경찰 데이터 분석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6개 대도시에서 반아시아인 증오범죄가 150퍼센트가량 증가했다. 신고하지 않는 경우까지 감안하면 실제 수치는 그보다 훨씬 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으로 미국에 사는 아시아계인들의 공포가 증폭되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어쩌면 그 자체보다 더 무섭고 오래도록 만연할 '증오 바이러스'를 기존의 인종차별 정서에 더한 셈이다.
"우리에게도 나쁜 날이 있다, 하지만..."
▲ 17일(현지시간) 미국 애틀랜타 총격 참사 현장인 골드스파 정문 앞에서 한 흑인이 1인 연대 시위를 하고 있다. 2021.3.18 ⓒ 연합뉴스
미국 내 아시아인 차별과 증오는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이번 총격사건은 많은 이들이 연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전역에서 아시아계 혐오 반대 시위가 확산하고 정치인들의 지지도 이어지고 있다.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지난 토요일 애틀랜타 집회에는 '나쁜 날' 발언을 비난한 두 명의 조지아주 상원의원 존 오소프와 라파엘 워녹이 참석했다. 카밀라 해리스 부통령, 애틀랜타 시장 케이샤 랜스 보텀스 등도 지지의사를 밝혔고, 조 바이든 대통령은 행동할 것을 촉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증오와 폭력은 종종 잘 보이는 곳에 숨어 있으며 침묵에 직면하곤 합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이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침묵은 곧 공모이기 때문입니다."
CNN은 "증오에 맞서 싸우는 유색인종 커뮤니티를 지지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의견을 제시해주시면 방송에 포함시키겠습니다"라고 트위터를 통해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이 같은 지지를 기반으로, 이번 사건이 아시아계를 향한 증오범죄 처벌에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란 일각의 전망이 곧 현실이 되길 바란다. 시위에 참가한 누군가의 손에는 이렇게 적힌 푯말이 들려 있었다.
"우리에게도 나쁜 날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인을 죽이진 않는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아라,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다,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해선 안 된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루는 근간이 되는 가르침,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들이지만, 세상은 그 가르침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라는 책 제목이 내내 잊히지 않는 이유다.
캐나다에도 팬데믹 이후 증오범죄 급증
특히 다인종이 모여 사는 이곳 캐나다 아이들은 '피부색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괴롭혀선 안 된다'는 것을 중요하게 배운다.
한번은 아들의 친구를 '까만 아이'라 지칭했다가 세 아이들이 동시에 내게 놀란 토끼눈을 한 적이 있다. 잘 모르는 아이를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 눈에 띄는 특징을 말한 거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색깔로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그대로 어른이 된다면 좋으련만, 캐나다에도 팬데믹 이후 대도시를 중심으로 증오범죄 수치가 급증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 동화책 <꼬마 구름 파랑이> 중. 서로 다른 색의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모습 ⓒ 김수진
사건 관련 뉴스를 보다가 문득 아이들이 어릴 적 읽은 <꼬마 구름 파랑이>라는 동화가 떠올랐다. 모든 것을 파란색으로 물들이는 신기한 구름 파랑이. 파랑이 속으로 날아 들어간 새들과 비행기는 파란색이 되어 나온다. 어느날 파랑이는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도시가 서로를 죽이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얀 사람들은 검은 사람들을 때려 눕혔고, / 검은 사람들은 노란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어요. / 빨간 사람들은 하얀 사람들을 뒤쫓았고, / 노란 사람들은 빨간 사람들을 뒤쫓아갔어요."
깜짝 놀란 파랑이는 비를 내리기로 결심한다. 파랑이의 비를 맞자 모든 것이 파랗게 변한다.
"마침내 도시에 타오르던 불이 꺼졌어요. /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파랗게 변했어요! / 이제 모든 사람들의 색깔이 같아진 거죠. / 사람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 서로서로 사이좋게 살게 됐어요. / 사람들은 큰 잔치를 열었어요."
▲ 동화책 <꼬마 구름 파랑이>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고 세상이 전부 파랗게 된 모습. ⓒ 김수진
해피엔딩인가 싶은 이 이야기에는 섬뜩한 반전이 있다. 유일하게 파란색으로 변하지 않은 초록색 사람이 도끼를 손에 쥔 채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우산을 쓰고 있어 파랑이의 비를 맞지 않았고 그래서 파란색으로 변하지 않은 그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또다시 불길에 휩싸이게 될까.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때 큰 딸아이가 말했다.
"그런데 난 이런 생각이 들어. 사람들이 꼭 다 똑같아야만 평화로울 수 있는 건가?"
내 말이! 바로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전부 파란색이 되어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괴기스럽게 보였다. 그렇다면 결코 모두가 같을 수 없는 현실에서 미움과 다툼 없는 평화란 백일몽일 뿐인지.
그렇게 믿고 싶진 않다. 이번 애틀랜타 총격사건이 촉발제가 되어 인종이, 문화가, 성별이, 나이가 다르더라도 증오범죄 없이 어울려 사는 세상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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