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몇 분이나 알고 계시나요?
[이 와중에 통일교육] 통일교육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시작돼야 하는 이유
박용만과 박은식, 손병희, 오기호, 그리고 양세봉. 역사 교사로서, 내가 손꼽은 3월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들이다. 교과서에 실려 있긴 하지만, 업적에 견줘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을 추려냈다. 매시간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이름과 생애를 소개한 뒤 수업을 시작한다.
굳이 지난겨울 부교재 삼아 역사 달력을 만든 이유다. (관련 기사 : 2021년 신입생에게 선물할 '역사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http://omn.kr/1qz9h) 얼마 전 포털 기사를 통해 외부로 알려지면서 난데없는 홍역을 치러야 했던 그 달력 말이다. 올해 입학한 고1 아이들 모두에게 나눠주었고, 이젠 수업 시작 전 교과서와 함께 반드시 챙겨야 할 준비물이 됐다.
그런데, 달력을 이용해 수업을 시작하려는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 아이들의 역사 지식이 예상보다 심각해서다. 2~3분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던 '오프닝'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져 막상 수업 진도를 나가는 데 방해가 될 정도였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라고나 할까.
아이들은 다섯 분 중에 손병희를 제외하곤 잘 모르는 인물들이라고 대답했다. 당대 내로라하는 역사학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박은식조차 낯설어했다. 나머지 세 분의 이름은 난생처음 들어봤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독립운동가 1만 7000명... 그 중에 10명
박용만이 누군가. 임시정부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며 초대 외무총장으로 추대된 지식인이자, 하와이에서 항일 무장조직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한 독립운동가다. 그가 조국의 독립에 뜻을 같이한 청년들을 규합해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한 날이 1914년 3월 23일이다.
오기호는 평생 동지 나철과 함께 대종교를 창립하고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다. 백주에 을사오적의 암살을 기도하는 등 한국인의 기백을 보여준 항일 투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그가 동지들과 함께 박제순, 권중현 등의 매국노를 저격한 날이 1907년 3월 25일이다.
양세봉은 어떤가. 1930년대 일제의 만주 침략에 맞서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을 이끌었던 조선혁명군의 사령관이다. 특히 영릉가와 흥경성 전투에서의 빛나는 전과는 팔 할이 그의 몫이다. 1932년 3월 11일은 조선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손잡고 본격적인 항일전쟁에 나선 날이다.
"선생님, 저희 부모님도 아는 사람이라곤 손병희뿐이라고 하시던데요."
내 한숨 소리를 들었던 걸까, 한 아이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나마 손병희에 대한 지식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게 전부였다. 그가 동학의 3대 교주이며, 동학을 모태로 천도교를 창립했다는 것도, 하물며 그가 평생 교육사업에 헌신한 교육자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아이들에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아는 대로 말해보라고 했다. 예상대로 입이라도 맞춘 듯 똑같은 이름들이 술술 튀어나왔다. 안중근, 유관순, 김구, 윤봉길, 안창호, 이승만, 김좌진, 신채호,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그리고 홍범도와 김원봉.
엄격하게 말하자면, 안중근은 국권 피탈 직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으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나마 홍범도와 김원봉은 그들의 생애를 재조명한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아이들에게 알려졌다. 그들을 빼면 고작 10명에 불과하다.
더 없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더는 없었다. 일반화하긴 조심스럽지만, 우리나라 고1 아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가 이 정도라는 이야기다.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분들이 1만 7000명가량이라는데 고작 10명 남짓이라니, 교사로서 참으로 민망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무지를 탓할 순 없다. 그저 17년 동안 학교에서 그 10명의 이름만 숱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시험에도 그들의 이름과 업적만 출제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반복 학습이 이루어졌던 셈이다. 본의 아니게, 그들은 후세에 의해 1만 7000명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선택적 기억' 뒤에 서린 이승만의 짙은 그림자
물론, 이해 못 할 건 없다. 역사를 기록하자면 중요한 사건과 인물 위주로 서술할 수밖에 없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역사가들의 가치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한 것이 지금 우리가 배우는 역사다. 말하자면, 역사에선 독립운동가들의 '서열'이 매겨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이들의 '선택적 기억'엔 찜찜한 구석이 적지 않다. 예컨대, 박용만과 박은식의 업적이 과소 평가되는 이면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해방 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두 사람의 업적에 주목할수록 이승만의 '치부'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관계다. 알다시피, 이승만은 독립운동 방식을 두고 박용만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승만은 그와 법정 분쟁까지 벌여 하와이 한인 사회의 재정 등 실권을 빼앗았고, 급기야 그를 하와이에서 내쫓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이라고나 할까. 외교적 수완이 탁월한 야심가였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이는 다름 아닌 박용만이었다. 그를 동지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박용만의 패착이었다. 이후 이승만은 자신의 명성을 돈과 권력을 장악하는 데 활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버드와 프린스턴의 석박사 학위를 배경 삼아,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이승만은 이미 정치적 거물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되어 권력을 거머쥐었으나, 숱한 분란을 일으키며 끝내 탄핵이 되고 만다. 그 '뒤치다꺼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진 이가 바로 박은식이다.
그땐 이미 임시정부가 사분오열된 만신창이 상태였다. 제2대 대통령이라는 지위는 이어받았으나 박은식이 도모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써서 민족의 피맺힌 독립투쟁사를 설파한 그의 결기로도 난망한 일이었다. 그는 이듬해 독립을 위해 단결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 채 위대한 삶을 마쳤다.
박용만과 박은식이 몸소 실천한 멸사봉공의 삶은 이후 '승자'가 된 이승만에겐 부담이 됐을 것이다. 거친 비유일지언정, 역사의 평가를 두고 멀게는 견훤이 왕건에게, 최영이 이성계에게, 가깝게는 장준하가 박정희에게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한 '정치적 부침'이 교과서 서술에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면 억측일까.
오기호에 대한 무지 또한 이승만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국권 피탈 직전 그가 나철과 함께 창립한 대종교를 아이들은 한낱 민간 신앙으로 여겼다. '미신'이라 단정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는 단군이 어떻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며 우상 숭배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대종교가 일제강점기 당시 천도교와 함께 교세가 가장 컸던 종교였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당최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교과서의 서술이 매우 빈약한 탓이다. 독립운동을 이끈 사상적 기반으로서, 특히 항일무장투쟁의 경우 대종교를 빼놓고선 설명이 안 된다는 사실을 교과서만 읽어서는 알 수 없다.
항일무장투쟁의 청사에 빛난다고 평가받는 청산리 대첩은 대종교의 군사 조직인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꾸려진 독립군 연합부대의 성과다.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과 이범석은 독실한 대종교 신자였다. 앞서 다룬 박용만과 박은식은 물론, 이회영, 이동녕, 김동삼, 신채호 등 당대 내로라는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에 심취했다는 건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보복으로 10만 명에 이르는 대종교 신자들이 학살당했으며, 일제강점기 내내 수난과 박해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놀라워했다. 금시초문이라는 거다. 몇몇 명민한 아이들은 대종교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고 평가가 박한 이유가 역사의 '패자'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단박에 짚어냈다.
해방 이후에도 독립운동의 업적을 인정받기는커녕 기독교와 불교 등에 밀려 군소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 최초의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꾼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대종교는 '미신'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종교의 몰락은 이내 가속화됐다.
더욱이 여기에는 남북 분단의 문제까지 포개졌다. 사회주의를 내세운 북한 정권은 기독교나 불교 등 다른 종교와는 달리 대종교에 대해서만큼은 호의적이었다.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의 혁혁한 공을 인정하는 뜻이기도 했지만, 정통성 확립에 대종교를 활용한 측면도 있다.
결국, 그러잖아도 교세가 꺾인 대종교에 이념의 딱지가 붙었다. 요즘 말로 치면, '종북 종교'로 낙인찍히게 된 셈이다. 6.25 전쟁을 겪으며 분단은 고착화했고, 친일파보다 빨갱이가 더 나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 대종교의 위대한 업적은 분단의 모순 속에 그렇게 잊히고 지워졌다.
독립운동가 소개하니 남북 분단까지 연결된다
양세봉을 낯설어하는 것도 이와 연관 지으면 쉽게 이해된다. 그 역시 대종교 신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흠결'은 그가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였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리 명토 박아두지만, 그는 1962년 대한민국의 건국 훈장을 받은 열혈 민족주의자다.
그는 드물게 남과 북에서 모두 추앙받는 독립운동가로, 그의 묘도 서울의 국립 현충원과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각각 있다. 그가 일제 밀정에 의해 암살된 요령성 환인현에도 묘비가 세워져 있으니, 무덤이 세 곳인 유일한 독립운동가가 아닐까 싶다. 실제 그의 유해는 1960년에 북한으로 모셔왔다고 하니,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또, 그가 죽은 후 세력이 약화된 조선혁명군의 상당수가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여 무장투쟁을 이어갔다는 사실도 그에 대한 오해를 부추겼다. 동북항일연군은 김일성이 활동했던 사회주의 성향의 무장 부대다. 비록 죽은 후였지만, 사령관이었던 그가 '무사'할 수 없었던 이유다.
더욱이 무학(無學)인 데다 지금도 중국에서 군신(軍神)으로 기리는 인물이라는 점도 그를 폄훼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한 중국인 학자는 "일제강점기 총칼 한 번 잡아보지 않은 정치인들에게는 일등 훈장(대한민국장)을 주면서, 평생 총칼 들고 만주에서 싸운 양세봉 장군에게는 고작 3등 훈장(독립장)을 수여한 건 이해할 수 없다"면서 우리 정부를 질타했다.
양세봉이 주도한 항일무장투쟁이 간과되다 보니, 아이들의 머릿속에선 독립운동이 청산리 대첩에서 곧장 원폭 투하와 해방으로 연결된다. 1930년대 중국 본토와 만주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던 독립운동의 역사가 통째로 비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가 '반쪽짜리'라고 조롱받는 이유다.
아이들에게 내가 손꼽은 3월의 독립운동가 다섯 분의 면면을 소개하려니, 돌고 돌아 남북 분단의 모순에 가닿게 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손을 맞잡기도 했지만, 해방 후 분단 정부가 수립되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으면서, 이념적 성향에 따라 독립운동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곧, '반쪽짜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정립하려면, 남북 교류가 활발해져야 하고, 종국에는 분단이 해소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잊히고 지워진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될 테고, 친일 잔재 청산의 필요성도 다시금 일깨울 것이다. 이는 파란만장했던 우리 현대사의 지평을 한층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박용만과 박은식, 오기호, 양세봉의 업적을 기억하자는 말이 아이들에겐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나 보다. 한 아이는 남북 분단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역사에 먹칠을 하는 꼴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는 내게 통일 교육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걸 깨우쳐 주었다.
굳이 지난겨울 부교재 삼아 역사 달력을 만든 이유다. (관련 기사 : 2021년 신입생에게 선물할 '역사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http://omn.kr/1qz9h) 얼마 전 포털 기사를 통해 외부로 알려지면서 난데없는 홍역을 치러야 했던 그 달력 말이다. 올해 입학한 고1 아이들 모두에게 나눠주었고, 이젠 수업 시작 전 교과서와 함께 반드시 챙겨야 할 준비물이 됐다.
▲ 3월 달력. 내가 기사를 쓴 이유. ⓒ 서부원
그런데, 달력을 이용해 수업을 시작하려는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 아이들의 역사 지식이 예상보다 심각해서다. 2~3분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던 '오프닝'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져 막상 수업 진도를 나가는 데 방해가 될 정도였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라고나 할까.
독립운동가 1만 7000명... 그 중에 10명
박용만이 누군가. 임시정부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며 초대 외무총장으로 추대된 지식인이자, 하와이에서 항일 무장조직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한 독립운동가다. 그가 조국의 독립에 뜻을 같이한 청년들을 규합해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한 날이 1914년 3월 23일이다.
오기호는 평생 동지 나철과 함께 대종교를 창립하고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다. 백주에 을사오적의 암살을 기도하는 등 한국인의 기백을 보여준 항일 투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그가 동지들과 함께 박제순, 권중현 등의 매국노를 저격한 날이 1907년 3월 25일이다.
양세봉은 어떤가. 1930년대 일제의 만주 침략에 맞서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을 이끌었던 조선혁명군의 사령관이다. 특히 영릉가와 흥경성 전투에서의 빛나는 전과는 팔 할이 그의 몫이다. 1932년 3월 11일은 조선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손잡고 본격적인 항일전쟁에 나선 날이다.
"선생님, 저희 부모님도 아는 사람이라곤 손병희뿐이라고 하시던데요."
내 한숨 소리를 들었던 걸까, 한 아이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나마 손병희에 대한 지식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게 전부였다. 그가 동학의 3대 교주이며, 동학을 모태로 천도교를 창립했다는 것도, 하물며 그가 평생 교육사업에 헌신한 교육자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아이들에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아는 대로 말해보라고 했다. 예상대로 입이라도 맞춘 듯 똑같은 이름들이 술술 튀어나왔다. 안중근, 유관순, 김구, 윤봉길, 안창호, 이승만, 김좌진, 신채호,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그리고 홍범도와 김원봉.
엄격하게 말하자면, 안중근은 국권 피탈 직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으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나마 홍범도와 김원봉은 그들의 생애를 재조명한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아이들에게 알려졌다. 그들을 빼면 고작 10명에 불과하다.
더 없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더는 없었다. 일반화하긴 조심스럽지만, 우리나라 고1 아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가 이 정도라는 이야기다.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분들이 1만 7000명가량이라는데 고작 10명 남짓이라니, 교사로서 참으로 민망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무지를 탓할 순 없다. 그저 17년 동안 학교에서 그 10명의 이름만 숱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시험에도 그들의 이름과 업적만 출제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반복 학습이 이루어졌던 셈이다. 본의 아니게, 그들은 후세에 의해 1만 7000명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선택적 기억' 뒤에 서린 이승만의 짙은 그림자
물론, 이해 못 할 건 없다. 역사를 기록하자면 중요한 사건과 인물 위주로 서술할 수밖에 없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역사가들의 가치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한 것이 지금 우리가 배우는 역사다. 말하자면, 역사에선 독립운동가들의 '서열'이 매겨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이들의 '선택적 기억'엔 찜찜한 구석이 적지 않다. 예컨대, 박용만과 박은식의 업적이 과소 평가되는 이면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해방 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두 사람의 업적에 주목할수록 이승만의 '치부'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관계다. 알다시피, 이승만은 독립운동 방식을 두고 박용만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승만은 그와 법정 분쟁까지 벌여 하와이 한인 사회의 재정 등 실권을 빼앗았고, 급기야 그를 하와이에서 내쫓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이라고나 할까. 외교적 수완이 탁월한 야심가였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이는 다름 아닌 박용만이었다. 그를 동지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박용만의 패착이었다. 이후 이승만은 자신의 명성을 돈과 권력을 장악하는 데 활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버드와 프린스턴의 석박사 학위를 배경 삼아,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이승만은 이미 정치적 거물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되어 권력을 거머쥐었으나, 숱한 분란을 일으키며 끝내 탄핵이 되고 만다. 그 '뒤치다꺼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진 이가 바로 박은식이다.
그땐 이미 임시정부가 사분오열된 만신창이 상태였다. 제2대 대통령이라는 지위는 이어받았으나 박은식이 도모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써서 민족의 피맺힌 독립투쟁사를 설파한 그의 결기로도 난망한 일이었다. 그는 이듬해 독립을 위해 단결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 채 위대한 삶을 마쳤다.
박용만과 박은식이 몸소 실천한 멸사봉공의 삶은 이후 '승자'가 된 이승만에겐 부담이 됐을 것이다. 거친 비유일지언정, 역사의 평가를 두고 멀게는 견훤이 왕건에게, 최영이 이성계에게, 가깝게는 장준하가 박정희에게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한 '정치적 부침'이 교과서 서술에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면 억측일까.
오기호에 대한 무지 또한 이승만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국권 피탈 직전 그가 나철과 함께 창립한 대종교를 아이들은 한낱 민간 신앙으로 여겼다. '미신'이라 단정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는 단군이 어떻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며 우상 숭배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대종교가 일제강점기 당시 천도교와 함께 교세가 가장 컸던 종교였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당최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교과서의 서술이 매우 빈약한 탓이다. 독립운동을 이끈 사상적 기반으로서, 특히 항일무장투쟁의 경우 대종교를 빼놓고선 설명이 안 된다는 사실을 교과서만 읽어서는 알 수 없다.
항일무장투쟁의 청사에 빛난다고 평가받는 청산리 대첩은 대종교의 군사 조직인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꾸려진 독립군 연합부대의 성과다.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과 이범석은 독실한 대종교 신자였다. 앞서 다룬 박용만과 박은식은 물론, 이회영, 이동녕, 김동삼, 신채호 등 당대 내로라는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에 심취했다는 건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보복으로 10만 명에 이르는 대종교 신자들이 학살당했으며, 일제강점기 내내 수난과 박해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놀라워했다. 금시초문이라는 거다. 몇몇 명민한 아이들은 대종교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고 평가가 박한 이유가 역사의 '패자'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단박에 짚어냈다.
해방 이후에도 독립운동의 업적을 인정받기는커녕 기독교와 불교 등에 밀려 군소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 최초의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꾼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대종교는 '미신'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종교의 몰락은 이내 가속화됐다.
더욱이 여기에는 남북 분단의 문제까지 포개졌다. 사회주의를 내세운 북한 정권은 기독교나 불교 등 다른 종교와는 달리 대종교에 대해서만큼은 호의적이었다.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의 혁혁한 공을 인정하는 뜻이기도 했지만, 정통성 확립에 대종교를 활용한 측면도 있다.
결국, 그러잖아도 교세가 꺾인 대종교에 이념의 딱지가 붙었다. 요즘 말로 치면, '종북 종교'로 낙인찍히게 된 셈이다. 6.25 전쟁을 겪으며 분단은 고착화했고, 친일파보다 빨갱이가 더 나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 대종교의 위대한 업적은 분단의 모순 속에 그렇게 잊히고 지워졌다.
독립운동가 소개하니 남북 분단까지 연결된다
양세봉을 낯설어하는 것도 이와 연관 지으면 쉽게 이해된다. 그 역시 대종교 신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흠결'은 그가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였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리 명토 박아두지만, 그는 1962년 대한민국의 건국 훈장을 받은 열혈 민족주의자다.
그는 드물게 남과 북에서 모두 추앙받는 독립운동가로, 그의 묘도 서울의 국립 현충원과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각각 있다. 그가 일제 밀정에 의해 암살된 요령성 환인현에도 묘비가 세워져 있으니, 무덤이 세 곳인 유일한 독립운동가가 아닐까 싶다. 실제 그의 유해는 1960년에 북한으로 모셔왔다고 하니,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또, 그가 죽은 후 세력이 약화된 조선혁명군의 상당수가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여 무장투쟁을 이어갔다는 사실도 그에 대한 오해를 부추겼다. 동북항일연군은 김일성이 활동했던 사회주의 성향의 무장 부대다. 비록 죽은 후였지만, 사령관이었던 그가 '무사'할 수 없었던 이유다.
더욱이 무학(無學)인 데다 지금도 중국에서 군신(軍神)으로 기리는 인물이라는 점도 그를 폄훼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한 중국인 학자는 "일제강점기 총칼 한 번 잡아보지 않은 정치인들에게는 일등 훈장(대한민국장)을 주면서, 평생 총칼 들고 만주에서 싸운 양세봉 장군에게는 고작 3등 훈장(독립장)을 수여한 건 이해할 수 없다"면서 우리 정부를 질타했다.
양세봉이 주도한 항일무장투쟁이 간과되다 보니, 아이들의 머릿속에선 독립운동이 청산리 대첩에서 곧장 원폭 투하와 해방으로 연결된다. 1930년대 중국 본토와 만주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던 독립운동의 역사가 통째로 비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가 '반쪽짜리'라고 조롱받는 이유다.
아이들에게 내가 손꼽은 3월의 독립운동가 다섯 분의 면면을 소개하려니, 돌고 돌아 남북 분단의 모순에 가닿게 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손을 맞잡기도 했지만, 해방 후 분단 정부가 수립되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으면서, 이념적 성향에 따라 독립운동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곧, '반쪽짜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정립하려면, 남북 교류가 활발해져야 하고, 종국에는 분단이 해소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잊히고 지워진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될 테고, 친일 잔재 청산의 필요성도 다시금 일깨울 것이다. 이는 파란만장했던 우리 현대사의 지평을 한층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박용만과 박은식, 오기호, 양세봉의 업적을 기억하자는 말이 아이들에겐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나 보다. 한 아이는 남북 분단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역사에 먹칠을 하는 꼴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는 내게 통일 교육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걸 깨우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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