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은 우리 몸에 좋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일까. 딱히 해 먹고 싶은 것이 없어도 한 줌도 뜯지 못하고 보내는 봄은 늘 아쉽곤 했다. 사실 쑥을 맘껏 채취할 수 있는 호사는 아무나 누릴 수 없다. 서울을 막 벗어난 지역이라 논밭이나 야산이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서 30년쯤 살고 있는 나도 지금처럼 쑥을 채취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지난해 초여름, 쑥을 좀 더 편하게 뜯어먹고 싶어 딱히 심을 것이 없어 몇 년째 풀만 자라도록 버려뒀던 텃밭 귀퉁이에 쑥 뿌리 몇 개를 묻었다. 이처럼 작은 수고에도 쑥은 풍족하게 자랐다. 덕분에 올 봄 쑥밥과 쑥전을 여러 번 해 먹었다. 여동생과 언니에게도 그리 섭섭하지 않게 나눠줬다. 쑥차도 만들어 잘 마시고 있고, 언젠가 시간 날 때 개떡도 쪄볼까. 데쳐 냉동시켜 두기도 했다.
사실 쑥국을 좋아하진 않지만, 우리 몸에 좋은 만큼 어떻게 하면 많이 먹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쑥 음식에 대한 기억을 남겨줄 수 있을까? 고민하곤 했었다. 그래서 개떡이나 쑥버무리처럼 막상 하자면 좀 번거로운 음식도 귀찮다는 생각 없이 해주곤 했지만 '그다지'였다.
그런데 올해는 심어 가꾼 덕분에 손쉽게 채취하며 쑥밥을 시도했는데 가족 모두 즐기는 밥이 되었다. 쑥을 많이 먹이고 싶은 그동안의 막연한 고민이 해결된 것이다. 그래서 참 별거 아니다 싶기도 하지만, 쑥을 심어 가꿀 생각을 한 나 자신에게 일종의 뿌듯함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다.
"쑥도 밭에 심어 가꿔보니 좋네. 어차피 놀리는 곳이라 한두 번 뜯어먹을 요량으로 심었던 건데 계속 연한 쑥을 뜯을 수 있으니 말이야. 이즈음엔 쑥들이 크게 자라 억세졌잖아. 그런데 가꿔보니 또 다르네. 초봄 때처럼 계속 싹이 돋아(작고 연한 것이 많아) 쑥밥 몇 번 더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동생에게 이처럼 우쭐해 자랑까지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어젯밤으로 이런 우쭐함과 좀 더 풍족하게 먹어보겠다는 욕심을 접고 말았다.
어젯밤에도 쑥밥을 했다. 이제 들판의 쑥들은 많이 자라 쓰고 억세져 쑥밥이나 쑥국, 쑥전 등을 해 먹기는 힘들다. 그런데 며칠 전 텃밭에서 초봄에 뜯었던 것처럼 작고 부드러운 쑥을 채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쑥밥 해먹을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쑥을 씻는데 손에 닿는 느낌이 예전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쑥밥을 할 때면 뜸이 마무리될 즈음에 넣어 잠깐 익혔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래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아 뜸 들이기 처음부터 넣어 푹 익혔다. 게다가 통째로 넣던 것과 달리 잘게 썰어 넣었다. 그랬음에도 쑥밥은 불과 며칠 전에 먹던 것과 많이 달랐다. 쓰고 질겼다.
새로 돋은 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 '아직 작으니 부드러울 것이다' 지레짐작 단정 짓고 말았는데 쑥 스스로는 어김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억세지고 쓴맛이 강해진 것이리라. 쓰고 질긴 쑥 때문에 먹기 좀 불편한 쑥밥을 겨우겨우 먹으며 후회했다.
텃밭 귀퉁이에 끌어들인 쑥이 다른 작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텃밭에 끌어들이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후회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자연만 알 뿐이다. 여하튼 풍족하게 주시는 데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웃자란 욕심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텃밭을 일군 지 8년째, 햇수를 더할수록 화분을 이용해서라도 무엇이든 가꿔볼 것을, 특히 자기가 먹을 것 일부만이라도 가꿔볼 것을, 기회 되면 주말농장을 일궈볼 것을 권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무엇을, 얼마나 수확하든을 떠나 자연과 생명의 순리와 경이로움을 느끼거나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믿음 때문이다.
지난겨울, 밥에도 몇 알씩 넣어 먹고 갈아서 죽도 끓여 먹자 싶어 산마씨(영여자)를 구입했다. 어느 날 보니 불과 며칠 전까지 멀쩡했던 씨앗들이 모두 싹이 돋아 있었다. 산마씨 스스로 이젠 흙에 뿌리내려야 하는 때를 알아 싹을 틔운 것이다. 아쉽긴 했지만 콩알만 한 작은 산마씨 하나가 보여주는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했다.
도라지밭 가에 조금만 심어보자 밭으로 갔다. 고구마나 감자처럼 땅속에 맺히는 것이니 깊게 파 고른 후 심어주자 싶어 열심히 호미질을 했다. 그렇게 몇 분. 새소리가 가까이 들려 보니 작은 새 한 마리가 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손이 닿을 거리로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눈앞에 있던 애벌레를 채듯이 물고 숲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새는 잠시 후 다시 오더니 호미질에 흙 밖으로 나온 벌레를 또 물고 갔다. 마씨를 다 심을 때까지 몇 번 더 되풀이되었다. 새가 농부가 땅을 파면 겨우내 땅속에 있던 벌레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가까이 와 채갔던 것이다. 다른 때는 마주치는 순간 포르르 날아가 버리곤 했던 새였는데 말이다. 지난해 봄 도라지를 심으며 이미 경험했음에도 이런 일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텃밭을 일구거나 무엇이든 심어 가꿔보면 요즘 며칠 내가 텃밭을 일구며 느낀 이와 같은 것들을, 자연 혹은 작은 생명 하나가 주는 경이로움, 그 감동을 때때로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를 통해 볼 수 있던 것들을 목격하거나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고 말이다. 그래서 가급이면 텃밭을 일궈보길 권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과 감동은 삶에 스며들어 어떤 도움이 되곤 한다. 어떤 가르침이 되기도 한다. 올봄 쑥 덕분에 '필요 이상의 욕심'과 '생명 저마다 주어진 마땅한 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올봄으로 그치랴. 올해는 또 어떤 것들로 심어 가꾸는 재미와, 얻어먹는 감사를 누릴까. 그리고 생명과 자연을 느낄까. 설렌다.
▲ 몇년 째 아무 것도 심지 않고 놀리던 텃밭 귀퉁이에 지난해 쑥뿌리 몇개 묻었더니 올봄 풍족하게 주신다. 덕분에 올봄 우리 가족 모두 쑥을 많이 먹었다. ⓒ 김현자
지난해 초여름, 쑥을 좀 더 편하게 뜯어먹고 싶어 딱히 심을 것이 없어 몇 년째 풀만 자라도록 버려뒀던 텃밭 귀퉁이에 쑥 뿌리 몇 개를 묻었다. 이처럼 작은 수고에도 쑥은 풍족하게 자랐다. 덕분에 올 봄 쑥밥과 쑥전을 여러 번 해 먹었다. 여동생과 언니에게도 그리 섭섭하지 않게 나눠줬다. 쑥차도 만들어 잘 마시고 있고, 언젠가 시간 날 때 개떡도 쪄볼까. 데쳐 냉동시켜 두기도 했다.
사실 쑥국을 좋아하진 않지만, 우리 몸에 좋은 만큼 어떻게 하면 많이 먹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쑥 음식에 대한 기억을 남겨줄 수 있을까? 고민하곤 했었다. 그래서 개떡이나 쑥버무리처럼 막상 하자면 좀 번거로운 음식도 귀찮다는 생각 없이 해주곤 했지만 '그다지'였다.
"쑥도 밭에 심어 가꿔보니 좋네. 어차피 놀리는 곳이라 한두 번 뜯어먹을 요량으로 심었던 건데 계속 연한 쑥을 뜯을 수 있으니 말이야. 이즈음엔 쑥들이 크게 자라 억세졌잖아. 그런데 가꿔보니 또 다르네. 초봄 때처럼 계속 싹이 돋아(작고 연한 것이 많아) 쑥밥 몇 번 더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동생에게 이처럼 우쭐해 자랑까지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어젯밤으로 이런 우쭐함과 좀 더 풍족하게 먹어보겠다는 욕심을 접고 말았다.
▲ 돋은지 며칠 되지 않은 것이라 아직 작다. 작으니 연하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런데 날짜상으로 쑥이 억세지는 시기이기 때문인지 쑥밥을 해먹어보니 쓰고 질기다. ⓒ 김현자
어젯밤에도 쑥밥을 했다. 이제 들판의 쑥들은 많이 자라 쓰고 억세져 쑥밥이나 쑥국, 쑥전 등을 해 먹기는 힘들다. 그런데 며칠 전 텃밭에서 초봄에 뜯었던 것처럼 작고 부드러운 쑥을 채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쑥밥 해먹을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쑥을 씻는데 손에 닿는 느낌이 예전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쑥밥을 할 때면 뜸이 마무리될 즈음에 넣어 잠깐 익혔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래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아 뜸 들이기 처음부터 넣어 푹 익혔다. 게다가 통째로 넣던 것과 달리 잘게 썰어 넣었다. 그랬음에도 쑥밥은 불과 며칠 전에 먹던 것과 많이 달랐다. 쓰고 질겼다.
새로 돋은 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 '아직 작으니 부드러울 것이다' 지레짐작 단정 짓고 말았는데 쑥 스스로는 어김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억세지고 쓴맛이 강해진 것이리라. 쓰고 질긴 쑥 때문에 먹기 좀 불편한 쑥밥을 겨우겨우 먹으며 후회했다.
텃밭 귀퉁이에 끌어들인 쑥이 다른 작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텃밭에 끌어들이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후회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자연만 알 뿐이다. 여하튼 풍족하게 주시는 데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웃자란 욕심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텃밭을 일군 지 8년째, 햇수를 더할수록 화분을 이용해서라도 무엇이든 가꿔볼 것을, 특히 자기가 먹을 것 일부만이라도 가꿔볼 것을, 기회 되면 주말농장을 일궈볼 것을 권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무엇을, 얼마나 수확하든을 떠나 자연과 생명의 순리와 경이로움을 느끼거나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믿음 때문이다.
▲ 쑥을 좀 더 편하게 먹고 싶은 마음에 텃밭에 심어봤다. 첫수확한 올봄, 풍족하게 주시는 것에 만족못하고 웃자란 욕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쑥이 다른 작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길가에 그냥 두게했을 때보다 못한 결과를 만날지도 모르겠다. ⓒ 김현자
지난겨울, 밥에도 몇 알씩 넣어 먹고 갈아서 죽도 끓여 먹자 싶어 산마씨(영여자)를 구입했다. 어느 날 보니 불과 며칠 전까지 멀쩡했던 씨앗들이 모두 싹이 돋아 있었다. 산마씨 스스로 이젠 흙에 뿌리내려야 하는 때를 알아 싹을 틔운 것이다. 아쉽긴 했지만 콩알만 한 작은 산마씨 하나가 보여주는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했다.
도라지밭 가에 조금만 심어보자 밭으로 갔다. 고구마나 감자처럼 땅속에 맺히는 것이니 깊게 파 고른 후 심어주자 싶어 열심히 호미질을 했다. 그렇게 몇 분. 새소리가 가까이 들려 보니 작은 새 한 마리가 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손이 닿을 거리로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눈앞에 있던 애벌레를 채듯이 물고 숲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새는 잠시 후 다시 오더니 호미질에 흙 밖으로 나온 벌레를 또 물고 갔다. 마씨를 다 심을 때까지 몇 번 더 되풀이되었다. 새가 농부가 땅을 파면 겨우내 땅속에 있던 벌레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가까이 와 채갔던 것이다. 다른 때는 마주치는 순간 포르르 날아가 버리곤 했던 새였는데 말이다. 지난해 봄 도라지를 심으며 이미 경험했음에도 이런 일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텃밭을 일구거나 무엇이든 심어 가꿔보면 요즘 며칠 내가 텃밭을 일구며 느낀 이와 같은 것들을, 자연 혹은 작은 생명 하나가 주는 경이로움, 그 감동을 때때로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를 통해 볼 수 있던 것들을 목격하거나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고 말이다. 그래서 가급이면 텃밭을 일궈보길 권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과 감동은 삶에 스며들어 어떤 도움이 되곤 한다. 어떤 가르침이 되기도 한다. 올봄 쑥 덕분에 '필요 이상의 욕심'과 '생명 저마다 주어진 마땅한 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올봄으로 그치랴. 올해는 또 어떤 것들로 심어 가꾸는 재미와, 얻어먹는 감사를 누릴까. 그리고 생명과 자연을 느낄까.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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