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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 중단에서 시작된 변화... "다 그분 덕분이에요"

[지리산활동백과] 경남 하동 진교를 누비는 '작은변화 활동가' 이정희씨를 만나다

등록|2021.04.24 19:15 수정|2021.04.24 19:15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리산권 지역에 필요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 지원단체로,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리산권 지역에서 직접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 모임, 공간,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글을 싣습니다.[기자말]

▲ 하동군 진교면에서 활동하는 이정희씨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시골살이를 꿈꾼다고 누구나 쉽사리 도시를 떠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제껏 힘들게 버텨낸 직장이며 점점 커가는 아이들 교육이며, 깊은 관계는 아닐지라도 사는 데는 꽤 유용한 인맥까지, 놓아버리기엔 아까운 것들이 많다. 이렇게 조건을 따지고 셈하기 시작하면 시골에서의 삶은 점점 더 멀어지고, 그건 그냥 '영원한 로망'으로 남겨두는 편이 여러모로 속 편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2009년 늦가을에 울산을 떠나 하동 진교로 들어온 이정희(45)씨는 예외적인 경우다. 그이로 말하면 시골에 대한 동경과 환상이 없는 대신 '탈도시'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담감도 없었다. 여자들은 십중팔구 피하고 본다는 남편 고향으로, 심지어 홀로 된 아픈 시어머니를 모시러 들어가는 길인데도 진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던 건 그래서였다.

울산 떠나 진교로, 뭘 몰라서 한 '잘한' 결정                

"시부모님이 여기서 할아버님과 함께 살고 계셨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그 무렵 어머니한테 경증 치매가 왔어요. 그 와중에 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요. 아픈 어머니가 홀로 남게 되자 남편이랑 저는 당연히 우리가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던 일 그만두고 촌에 가서 시어머니랑 산다는 거에 대해 딱히 부담은 없었어요. 그땐 뭘 몰랐으니까(웃음). 몰라서 왔지만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주변의 만류와 반대를 무릅쓰고 진교에 들어온 부부는 각자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갔다. 결혼 전 일찍이 헤어 디자이너 자격증을 따 놓은 남편은 진주 미용실에 취직해 출퇴근 생활을 이어갔고, 아내는 '바깥일'을 하지 않는 대신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와 두 아이 밥상 챙기는 것에 충실했다.

대학 졸업 후 줄곧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다가 진교에 오기 전 7년을 꼬박 울산여성의전화 상근자로 활동해온 정희씨는 "시골에서 하고픈 유일한 일이 노는 거"였다고 한다. 놀다 지치면 슬렁슬렁 자원봉사나 할 생각이었다고. 그런데 두 달이 흐르자 무력감이 찾아왔다.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쓸모가 다해 버려지는 듯한" 그 느낌이 두려워, 그는 다시 이력서를 들고 구직활동에 나섰다.

경력을 살려 요양원에 사회복지사로 취직하고 나서는 성실한 직장인으로 몇 년 살았다. 틈틈이 여기저기 다니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알아가는 재미가 있던 시기다. 그렇게 지역에 뿌리내리면서 적응해가던 중, 일종의 전환점이라 할 만한 사건이 생긴다. 2015년 당시 경남도지사였던 홍준표의 무상급식 중단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밥에서 시작된 '아이(i)날다', 노는 판 벌이며 성장 
 

▲ 진교면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희씨. 음료를 마시고 있어서 잠깐 마스크를 벗었다.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무상급식 중단은 전통적인 보수 텃밭으로 알려진 경남도에 이례적인 바람을 몰고 왔고, 각 시·군 주민들이 아이들 '밥'만은 지켜야 한다며 동시다발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면 단위로는 드물게 초·중·고가 하나씩 있는 데다 진주와 광양 등 인근 도시로 출퇴근하는 젊은 세대가 많은 진교에서도, 학부모를 중심으로 연일 피켓 시위가 열리고 선전물이 돌았다. 그때의 기억을 여전히 뜨겁게 간직하고 있는 정희씨는 말한다.

"그전까지는 다들 누구 엄마, 누구 아내로만 알고 지내다가 무상급식 싸움을 계기로 서로 얼굴 맞대고 같이 뭔가를 하게 된 거예요. 그러던 중 남자 양육자들이 '밥이 빛나는 밤에' 행사를 진행했는데, 아이들과 보호자들이 함께 어울리는 그 시간이 참 좋았어요. 그런 경험들이 '아이날다'를 만들고 지금까지 유지해온 원동력이죠. 농담 삼아 우리끼리 그래요. 다 그분 덕분이라고(웃음)."

무상급식 싸움 현장에서 만난 학부모들 가운데 다섯 가족이 뜻을 모아 만든 '아이(i)날다'는 2016년부터 해마다 민다리체육공원에서 어린이날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어린이날이 되어도 인근 도시에 나가 즐길 수 없는 동네 아이들과 '같이 놀자'는 취지로 시작한 이 행사는, 해를 거듭하면서 진교면을 대표하는 잔치로 성장해 이제는 후원과 참여가 줄을 잇는다. 아이날다가 벌인 '노는 판'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여들어 크게 어울리는 모양새라 할까.

아이날다의 또 다른 주요 행사인 '가슴 따뜻해지는 산타 이야기'도 면사무소, 농협,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등 진교 내 단체들과의 협력 관계 안에서 치러진다. 코로나19에 손발이 묶여 있던 지난해 크리스마스에는 대면 프로그램이 무산된 대신 다른 해보다 더 풍성한 선물 꾸러미를 마련해 '드라이브 스루'로 전달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건 역시나 지역과 맺어온 그 탄탄한 '관계' 덕분이었다.

"무상급식 싸움할 때 '그런다고 되겠냐'는 말을 종종 들었어요. 아이날다를 보는 시선도 처음엔 비슷했던 거 같아요. 너희가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냐는 거죠. 안 하던 걸 하니까 반감도 있었을 테고요.

그런데 지금은 칭찬들을 많이 하세요. 쟤네가 아이들을 위해서 뭔가 한다더라, 가보니 잘하더라, 이런 말들이 입소문으로 돌면서 생긴 변화예요. 이제는 아이날다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우리도 끼워줘' 하고 손 내미는 곳이 많아요. 여전히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긴 하죠. 너무 자기들끼리 뭉친다고도 하고. 이건 우리가 계속 고민하며 풀어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해요."  


더 좋은 삶을 위해 교집합을 늘려가는 사람들                      

아이들 밥에서 촉발된 이정희씨의 활동은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해내는 자연 친화적 농사 모임을 결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시작은 유정란이었다. 산에서 닭 키우는 분을 알게 된 정희씨 부부가 몇몇 가족을 모아 건강한 달걀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작은 공동체를 꾸린 것.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류독감이 발생해 닭을 폐사하게 되면서 농사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 한 회원이 안 쓰는 비닐하우스를 내주어 일이 수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누리농장' 300평(초기엔 150평으로 시작) 땅에서 회원들은 무농약, 무비료, 무경운의 원칙을 고수하며 '자연 그대로의' 농사를 지었다. 다들 농사에 문외한이어서 어설픈 점도 많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까지 데려와 왁자하게 떠들며 흙 만지고 땀 흘리는 시간은 마냥 즐거웠다.

게다가 땅이 베푸는 은혜는 어찌나 한량없던지! 회원들이 충분히 나눠 먹고도 늘 수확량이 남아돌아, 연회비 2만 원에 모집한 후원회원들에게는 물론 길에서 만난 이웃에게까지 수시로 채소꾸러미를 안겨줄 정도였다고.

"처음엔 회원들 각자가 자기 몫의 땅에서 농사짓는 식으로 운영하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땅을 나누지 않고 공동으로 관리하는 체제로 바꿨어요.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일을 더 하는 사람과 덜 하는 사람이 드러나지만 그걸 문제 삼진 않아요. 같이 가는 게 더 중요하니까 서로 배려하고 봐주죠.

다만 올해부터는 노지 400평이 늘어나 그만큼 일이 많아졌고 후원회원 연회비도 6만 원으로 올려서 부담이 좀 있어요. 그래서 지난 총회 때 책임감을 더 갖자는 뜻에서 회원 전부가 하나씩 직함을 달았어요. 땅을 기증해준 부부는 대부 대모, 농기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기술이사, 나머지는 조직부장, 감사 이런 식으로."

 
현재 아이날다를 구성하는 여덟 가족 중 반 이상이 누리농장에 함께하고 있으며, 또 아이날다와 누리농장의 회원 일부는 정희씨가 가장 최근에 꾸린 여성주의 글쓰기 모임 '연연하다'의 '글 도반'이기도 하다.

고백하자면 그이는 오래전부터 '여자들만'의 모임을 갈망해왔다. 가부장제의 영향력이 강한 시골일수록 여자들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표현하고 발산할 수 있는 자리가 더욱더 절실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마침내 일을 벌인 건 지난해 '작은변화 지역 활동가'로 선정되고 나서다. 지원받은 활동비로 '여성 글쓰기 강좌'를 열어 동네 여자들을 하나하나 불러모은 게 그 첫걸음이었다.

4회의 강좌와 그 이후 정기적으로 지속된 모임은 한마디로 '눈물의 향연'이었다고 할 만하다. 일곱 명의 여자들은 그동안 묵혀두고 감춰둔 이야기를 말과 글로 토해냈고, 그때마다 아낌없이 눈물을 쏟았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나'보다도 엄마와 아내와 며느리라는 '역할'이 더 중요해질 수 있음을 모르지 않으나, 그들은 적어도 글을 쓰고 나누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로 존재하며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고자 했다.

"여성주의라는 단어를 내걸고 시작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여성으로서 겪은 아픈 이야기들이 나오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러가더라고요. 강좌 첫 시간부터 다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우리 왜 이렇게 울지? 하면서 또 울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관계가 전보다 더 끈끈해졌죠. 글쓰기의 힘이 이런 게 아닌가 싶네요."

관계를 열어놓을수록 '작은변화'의 자리도 넓어질 것             
 

▲ 진교면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희씨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코로나로 인해 계획했던 많은 일이 정지되고 미뤄지고 엎어지는 속에서도 작년 한 해 속도와 리듬을 잘 조절하며 움직여온 이정희씨는, 올해 활동에도 이미 시동을 건 상태다. 규모가 커진 누리농장은 씨감자 심는 것을 시작으로 벌써 농번기에 접어들었고, 아이날다는 '토요마을학교'를 열어 주말마다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글 쓰는 여자들도 곧 다시 모인다니, 하반기에는 그들의 눈물과 웃음으로 반짝이는 문집을 기대해볼 수 있겠다.

보통의 귀촌·귀농인들은 잘 모르거나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영역에도 그는 곧잘 뛰어들어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를테면 기관장과 단체장들이 모이는 '지루한' 자리에도 누가 부르면 가고, 뭘 하는 곳인지 '애매한' 무슨 협의회에서 대화를 요청하면 일단 만나고 본다. 지루하고 애매한 것에도 관계를 열어놔야 내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활동이 그만큼 더 풍성해지고 넓어짐을 아는 까닭이다.

"십 년쯤 되니까 불러주는 데가 많이 생기더라고요. 지역 내 크고 작은 행사나 모임 준비를 위한 회의에는 거의 참여하고, 최근에는 진교중심지활성화사업 추진위원으로도 일하고 있어요. 심지어 운동도 잘 못 하는 내게 체육회 이사를 하라지 않나(웃음).

이거는 아이날다와 누리농장이 지역에 알려졌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제가 몇 년 전부터 노인복지센터 운영을 맡아 하다 보니 대접해주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이유야 뭐든 내 목소리를 내고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많아지면 좋은 거 아닌가요? 아무 데서나 내 색깔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해야 할 말은 다 하는 편이죠. 그러면 또 다들 이해하고 수긍하시더라고요." 


이정희씨를 만나러 진교로 향하던 날, 최악이라는 황사와 미세먼지에도 절정의 환희를 숨기지 못하는 꽃들의 아우성은 대단했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경계가 모두 잿빛으로 뭉개진다 해도, 코로나라는 어둡고 긴긴 터널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해도, 봄은 그렇게 '제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위에도 봄을 닮은 사람들이 적잖음을 알겠다. 조건과 상황이 어떠하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제 일로 삼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 진교에도 그런 사람 이정희가 있으니 다만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봐 주면 되지 않을까?

그의 발길이 머물고 목소리가 들리는 자리에서 이전과는 또 다른 '작은변화'의 바람이 일렁이는 것을. 그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새로운 상상과 시도들이 지역 어딘가, 누군가의 가슴에 씨앗으로 살포시 내려앉는 것을.

글 | 자야
사진 | 임현택
기획/진행 | 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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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자야
새벽 요가, 산책길의 노래, 지치지 않을 정도의 텃밭일,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 용기 있고 다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 을 좋아하는 함양 주민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인터뷰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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