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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이어도 인생을 모른다"는 윤여정, 위로 받았습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보렵니다

등록|2021.04.24 19:16 수정|2021.09.02 20:28
스물일곱 살까지 엄마 밥을 먹고 다녔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막내였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엄마를 거들 정도가 되었을 때 오빠와 결혼한 새 식구가 들어왔다. 비좁은 부엌은 엄마와 올케, 나까지 들어갈 자리가 없었을 뿐더러 내 차례가 오지도 않았다. 일을 찾자고 하면 못 찾을 것도 없었겠지만 막내의 특권은 유효했고 세상 밖에 즐거운 일이 많았다. 집에 들어오면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게 얼마나 큰 노고였는지 당시는 생각하지 못했다. 부모의 등 뒤에서 나의 삶은 완벽하게 안정되었다. 필요한 것은 참지 않고 말했다. 집안에 닥쳐오는 파도에도 막내라는 가면은 세상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완벽한 방패였다. 번거로운 모든 일은 외면해도 되었다. 어느덧 시간은 빠르게 흘러 나도 누군가의 방패가 되었다.

한 번도 일을 놓지 않은 시간들
 

▲ 내 자식들?어디 가서?아쉬운 소리 하지 않도록, 남들과 비교되거나 기죽지 않도록, 남들 만큼 공부시키기 위해 한 번도 일을 놓지 않았다.? ⓒ elements.envato


앞장서 파도를 막아야 하는 자리에 있지만 여전히 철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철이 없고 싶다. 엄마처럼 다정하지 못하고 살뜰하지도 못하다. 그저 지켜봐 주는 것으로, 밥 때를 겨우 챙기는 것으로, 자립할 때까지 말없이 응원해 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감정 표현이 서툴고, 파도는 온전히 내가 맞으면 된다는 희생의 마음까지는 어림도 없다. 그저 할 수 있을 때까지 견디는 것이 내가 하는 전부다.

견딤에도 자존심은 내려놓아야 했다. 내 자식들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하지 않도록, 남들과 비교되거나 기죽지 않도록, 남들 만큼 공부시키기 위해 한 번도 일을 놓지 않았다. 초등학생들 과외지도로 시작해서 학습지 교사를 거쳐 동네 작은 보습학원에서 아이들을 만났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학교를 그만둔 지금도 일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철들지 않은 어른이고 싶다. 아픈 사연이 없지 않았지만,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지는 않는다. 아픔을 털어 버리는 쪽을 선택한다. 조금은 다른 느낌이지만, 여인의 한으로 대표되는 '삭임'의 표현이 썩 좋다. 상처를 삭여 더는 아프게 남아 있지 않도록 하는 애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삶이 영화고 드라마라면 나의 드라마는 감정을 진하게 자극하지 않는 잔잔하고 덤덤한 이야기다. 다소 밋밋할 수도 있는. 재미없고 지루하고 드라마틱하지 않은 이야기. 그럼에도 삶이 이래도 될까 싶은 위기의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던 것 같다.

"육십이 돼도 인생을 몰라요.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내가 알았으면 이렇게 안 하지. 처음 살아보는 거기 때문에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고. 계획을 할 수가 없어. 그냥 사는 거야. 그나마 하는 거는 하나씩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 나이 들면서 붙잡지 않는 것."

tvN 예능 <꽃보다 누나>의 인터뷰에서 윤여정 배우의 말이다. 성공한 대배우, 화려한 삶을 사는 사람이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이 말이 나를 위로했다. 덤덤함을 넘어 때론 무심하게 느껴지는 나의 행동들이 왜 이모양인가, 이게 한계인가, 근근이 붙들고 있다고 생각되던 때가 많았는데, 그녀의 인터뷰를 보고는 이래도 된다고 단번에 인정하게 됐다.

방송을 보며,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라도, 내일이나 10년 후 기가 막히게 멋진 계획이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는 날들을 주어진 대로 그냥 살아내도, 이렇게 사는 것이 보통의 살아가는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허술하겠지만... 괜찮다
 

▲ 윤여정이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을 말하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 갈무리. ⓒ BAFTA

나도 쉰일곱은 처음이라서 어제도 오늘도 허술하다. 지나고 나면 물론 아쉬움이 남는다. 살아낸 하루와 그런 하루에 대한 실망은 한계를 만들지만, 이제는 쿨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기대치를 조정한다. 완벽한 엄마도, 아내도, 인생도 내려놓는다. 내 기준에 딱 기본, 그것이 안 되더라도 만족하는 법을 날마다 조정하며 터득해 가고 있다.

또 하나, 마음 속에 부글부글 끓지 않도록 마음을 툭 뱉어 낸다. 죽는 날까지 지켜야 하는 은밀한 속말, 하고 싶지만 참아야 하는 말은 되도록 남기지 않는다. 혼자서 깊이 곱씹는 것도, 여러 의미를 두루 생각하는 것도 사양한다. 그러다 보니 참다 불쑥 터트리는 울화는 없다. 남들이 당황할 정도로 솔직하게 나를 드러낸다.

다시 배우 윤여정 이야기를 하면 최근 "모든 상이 의미 있지만 이번엔 특히 '고상한 척한다'고 알려진 영국인들에게 좋은 배우로 인정받아서 정말 기쁘고 영광입니다"라는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그녀의 돌직구 스타일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속을 긁어주는 재치 있는 말로 크게 이슈가 되었고 앞으로도 오래 회자될 것 같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경험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이야기라서 더 큰 호응을 얻어냈던 것 같다. 그녀의 돌직구는 이전에도 다른 상황에서 여러 번 접했던 것 같다. 인터뷰는 꾸밈없고 자연스러워 보였고 그녀는 무대 위에서 춤추는 주인공 같았다. 배우는 아니지만, 내 삶의 방식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다정하지 못함도 그녀의 말을 빌리면 해명이 가능할 것 같다. 대세 배우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 나를 변호할 수 있는 말이 되어 주는 것 같다. 영화 <미나리>의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전통적 할머니 상을 벗어난 할머니로 열광하게 하는 것처럼, 나도 지고지순한 아내, 애잔한 어머니 역할은 할 수도 없고 억지로 입고 싶지도 않다.

지금까지 내 길을 열심히 찾아온 것 같다. 뭐 하나 성공이라고 이름 붙일 것은 없었지만. 지금도 내 길을 찾는 데 느긋하게 여유 부리지 않는다. 내 삶을 향해 가는 여정을 딸은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며 칭찬해 준다. 아이들에게 칭찬을 잘하는 엄마였는지 모르겠지만 뭐든 도전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엄마였던 것 같기는 하다. 후루야 미노루의 <크레이지 군단>에 이런 말이 나온다.
 
춤추는 바보에 구경하는 바보, 어차피 바보가 될 거라면 구경하는 바보 쪽이 훨씬 더 바보.

나는 조금 덜 바보가 되고자 한다. 쉰일곱의 나이에도 여전히 수줍지만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하는 춤추는 바보가 되고 싶다.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나이 든 아줌마지만, 왠지 춤출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낯선 하루였고 낯선 군중 속에 있었지만, 구경만 하는 바보가 아니기 위해 노력했다. 영원이 철들지 않을 것처럼. 배우 윤여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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