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대표 직무대행과 지도부가 8일 여의도 국회에서 4.7재보궐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지도부가 전원 사퇴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한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최근 서울·부산 재·보궐 선거 결과를 두고 '이대남'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20대 남자들의 표심을 얻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논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20대의 담론을 '공정성'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알 수 있다. '공정성'의 문제는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기도 하다. 조국 사태부터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화, 최근에는 LH 사건까지, 공정성을 해친 것으로 풀이되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러나 정말 공정성이 문제일까. 필자를 포함해 과연 우리 세대가 공정함을 자기 정체성의 중심으로 두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먼저 우리 세대가 정말 모든 문제에 대해서 공정함을 가장 중요시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전에도 필자는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화 문제를 이야기하며 왜 우리는 다른 불공정함을 이야기하지 않는지 물었다. 대기업의 불공정 계약부터 경영권 불법승계, 고질적인 빈부격차는 분명 공정성의 문제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이 문제에 별로 민감하지 않다.
외형적으로 보면 산업 재해로 몇 명이 죽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이야기하자 여론이 들썩인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세대가 가진 공정성에 대한 정체성은 '선택적 공정'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공정함을 물을 문제를 선택하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세대의 정체성이 사실 공정함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조던 피터슨과의 토론에서 라캉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자크 라캉은 역설적이지만, 깊이 있는 진실을 적었습니다. 설령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다닌다는 질투심 가득한 남편의 주장이 사실일지라도, 그 남자의 질투심은 여전히 병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남편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질투심은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지젝의 말을 있는 그대로 생각해보면, 남편에게 있어 아내의 외도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찌됐든 남편은 자신의 질투심을 유지해야 하므로, 아내는 바람을 피우는 여자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청년 세대의 공정성 담론은 이 병적인 질투심과 일치한다. 자세히 말해서 현재 우리 세대는 공정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욕망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 세대의 정체성은 이 불평등에서 비롯된 상대적 박탈감에서 자라난다.
이 분석을 토대로 생각하면, 왜 우리 세대의 공정성이 '선택적'일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세대는 현재 자신의 노동력으로는 경제적 계층을 옮기기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언제나 '성공'과 '행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를 욕망하도록 가르쳐 왔다.
그리고 대기업과 대기업 일가는 바로 그 욕망의 이상적 자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저들을 문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욕망의 근본에는 현재 구조가 유지되어야 하고, 자신이 그곳으로 옮겨 가야 한다는 희망과 의무감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 구조는 바뀌어서는 안 된다.
불평등한 구조는 이미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니, 이 구조를 개선하려고 하는 시도는 자신의 공정성을 흔드는 일이다. 이 구조가 바뀌면 자신의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정체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세대에게 최근 수많은 논란이 되었던 사건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앞서 말한 지젝의 말을 통해 비유하면, 아내의 외도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자신만 '운 좋게' 계층 사다리 이동하는 게 공정인 세대
▲ 26일 오전 서울에 위치한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 강남센터 시세 전광판에 비트코인 실시간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 연합뉴스
2030 세대의 비트코인 열풍도 이 정체성 안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가령, 금융당국에서 비트코인에 대한 규제와 함께 조세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을 때 강한 반발이 있었다. 공정함이 중요하다면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원칙에 반발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공정한 일이다. 그러나 청년 세대가 선택한 길은 불공정한 구조는 유지한 채 자신만 '운 좋게' 계층 사다리를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 구조를 바꿔버리면 불평등에 대한 욕망을 꿈꾸지 못하니까 말이다.
'LH 사건'으로 뒤덮인 재보궐 선거도 마찬가지다. 여당은 이 문제의 핵심이 불공정이라고 판단하고, 상대 후보의 과거 이력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역대 선거에서 후보의 부정은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누가 더 이 욕망을 더 잘 건드리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여당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17대 대선의 교훈을 잊었다. '상대적 박탈감'이 정체성인 이 세대에서 중요한 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이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 채로 자신도 그 부동산을 통해 계층 이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이 바뀐 다음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고 해도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언론이 다루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동산을 카지노 자본주의처럼 생각하게 된 이상 비판의 대상은 이 구조를 바꾸려는 이들이 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 욕망이 자라나지 못하게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부동산은 여전히 암호화폐처럼 카지노 자본주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상대적 박탈감의 정체성은 우리 사회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문제는 이 병적인 정체성이 우리 사회의 연대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정의되는 지금 세대의 정체성은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뒤바꿈으로써 자신의 공적 자아를 사적 영역으로 매몰시킨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보길 원하고, 상대의 문제는 주관적인 것으로 판단하려는 시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문제를 '우리'의 것이 아닌 '그들'의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이미 우리 자신을 푸코가 말하는 '자기-경영적 주체'로 만들었다. 자기 자신을 자본으로 생각하고, 자본을 자신의 정체성에 기입하고 있다. '노력', '성공', '행복'으로 이어지는 단어들은 '자기-경영적 주체'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중이다. 여기에 '노력'해도 안 되는 상황이 더해지니 자본이 곧 자신인 '자기-경영적 주체'는 자신을 카지노 자본주의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야 '성공'과 '행복'이라는 관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 삶의 목적을 '행복'으로 놓는다면 이 욕망을 뒤집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상상할 수 있는 '행복'에 관한 모든 이미지는 불평등한 구조를 전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연대는 타인의 문제를 객관주의로 살피고, 자신의 문제를 주관주의로 살필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 관점은 '행복'의 길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려는 목적은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억울하게 '불행'한 일을 겪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정치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끔찍한 불행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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