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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차별의 피해자이자 가해자

[서평] 김지혜 지음 '선량한 차별주의자'

등록|2021.05.06 14:51 수정|2021.05.06 14:55
나는 내가 타인의 무심한 발언에 상처받는 차별의 피해자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가해자라는 생각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선량한 차별주의자> 책을 읽으며 내 안의 다양한 차별의 시선, 언어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 역시 어떤 이에게는 차별의 가해자였던 것이다.
 

▲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표지 사진 ⓒ 창비


그런 점에서 작년 초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자와 관련한 논란이 생각났다. 성전환 수술 뒤 법원에서 성별정정 허가를 받고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2020년 신입생으로 합격했지만 학내 반대 여론 등에 대한 부담이 커서 입학을 포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서점을 가는 길에는 전철을 탔었다. 전철역의 계단 앞에서,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나는 사회적 다수자였고, 다양한 색으로 도배된 지하철 노선도 앞에서, 세 가지 색각을 전형적으로 지닌 나는 다수자였다. 그 누구도 항상 사회적 다수자일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항상 소수자인 것은 아니다. 사람 모두는 소수인 측면과 다수인 측면을 다층적으로 쌓아나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자신을 늘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약자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을 늘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면에서는 강자일 수도 있음을 잊고, 다른 약자를 무시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고에서는 혐오만 재생산될 뿐이다.

트랜스젠더 입학생의 지적대로 그 누구도 항상 사회적 다수자일 수도 없고 항상 소수자인 것도 아니다. 혐오의 시선, 차별의 시선이 계속된다면 우린 계속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책에서도 크렌쇼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로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교차하는 곳들이 있다'는 말을 통해 다중성을 생각해야 비로소 내가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차별을 할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차별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

그런데 과연 이게 가능할까?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소수자, 인권, 차별에 관해 가르치고 연구하면서도 정작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언어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결정장애"라는 표현을 썼다고 고백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찾아보니 우리가 쓰는 일상 언어 중 많은 곳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있다. "병맛, "말문이 막혀 벙어리가 되었다", "벙어리 장갑" 등. 이를 바꿔내기 위해 엄지장갑, 손모아장갑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하지만 여전히 낯선 단어들로 한 번 알아다고 해도 계속 의식하지 않으면 무심코 차별적 단어를 쓰게 될 것이다.

저렇게 늘 상 차별의 시선, 혐오의 표현을 신경쓰는 사람마저 어떤 지점에서는 무감각하고 타인에게 폭력적일 수 있다면 과연 이 사회가 바뀔 수 있을까? 내가 차별의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해서 지금의 이 자리에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과정"으로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자각하고 나 자신을 성찰하며 평등을 찾아가는 이 과정이 나는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헛된 믿음보다 훨씬 더 값지다는 것은 분명하다"(13쪽).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해야"(38쪽)

 

저자는 차별과 혐오를 벗어난 사람으로서 독자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나 역시 부족하지만 함께 해보자라는 말로 다가왔다. 다문화 이슈에 대해서도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에 나오듯 한국의국제결혼중개업체는 홈페이지에서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중국(한족) 등 국가별 신부의 특징을 적으며 순수, 순종, 공경, 부지런 등의 단어를 넣어 남성우월주의가 유지되는 결혼 관계로 상대 국가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인 "우즈베키스탄에는 김태희가 밭을 갈고 있고 전지현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며 거리엔 수많은 샤라포바 활보하고 있다"는 어떤가? 심지어 국제결혼을 위해 노총각이 우즈베키스탄을 위해 가는 <나의 결혼원정기>(2005)에서는 우즈베키스탄에 대해서 "뭔 나라가 이런데 숨었노? 완전히 낑긴 나라 아이라? 이런 나라까정 가야 데나?"라는 대사가 나올 만큼 무지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유럽 사람들이 동양인에 대해 일본인 내지 중국인이라고만 생각하거나 영화 속 동양인은 수학을 잘하는 모범생이거나 쿵후를 잘 아는 악당 정도로 나오는 차별적 상황에 대해 우리는 분개한다.
  

▲ "당신은 이런 말들이 아무렇지 않은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선량한 차별주의자> ⓒ 창비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이 만들어내는 새장의 철망으로 남고 싶지 않다

책에서는 메릴린 프라이가 억압의 상태를 새장에 비유한다고 하고 있다. 하나 하나의 작은 차별은 철망의 한 줄처럼 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얇은 선 하나 하나가 모여서 새장을 이루며 이 새장이 새를 가두게 된다.

사실 사람들이 무심코 내뱉는 단어 하나 하나가 악의를 내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큰 문제인가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차별의 언어를 매일 들으며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는 촘촘한 철망이 되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할 힘이 사라질 수 있다. 그렇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투명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책의 제목처럼 선량한 차별주의자 개개인들이 모여서 커다란 악의를 형성하게 된다.

이를 깨기 위해서 나는 성경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면서 "내가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의 언어가 누군가에게 칼이 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하는 창살이 되지 않도록 계속 성찰하고 주변에 이를 알려 나가는 것은 나 역시 그런 대접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마르틴 니묄러의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처럼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원, 유대인이 잡혀갈 때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나치가 내게 왔을 때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내가 받는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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