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실재하면, 천재"... 유령 작사가의 충격적 실체
[TV 리뷰] <그것이 알고싶다> 'K팝의 유령들 - 그 히트송은 누가 만들었는가'
▲ 지난 8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SBS
고스트라이터(유령작가), 보통은 다른 사람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대신 써주는 이들을 지칭하던 이 단어는 오늘날 대중문화계에선 "창작을 하지 않는 사람이 명성을 얻고 저작권까지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타인의 창작물로 부당하게 이익을 얻는 가짜 창작자들을 '고스트라이터'로 칭하는 것이다.
케이팝으로 대표되는 가요계 또한 이러한 존재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지난 8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아래 <그알>) 'K팝의 유령들 - 그 히트송은 누가 만들었는가'는 대중음악계에서 꾸준히 의혹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령 작가 부조리를 파헤치고 나섰다.
<그알> 측이 유령작가의 실체를 추적하기 시작한 건 두 가지 일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달 세상을 떠난 이현배(45RPM)의 형이자 DJ DOC 멤버 이하늘은 동료 김창열 대신 동생이 곡을 썼다고 자신의 인스타그램 생방송을 통해 폭로해 파문을 낳았다. 이에 앞서 지난 3월 트위터 상에는 케이팝 작사 업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고발하는 내용이 등장했다.
제작진은 이를 토대로 작사, 드라마 작곡 업계의 실태를 파고 들기 시작했다. 특히 이날 방송의 2/3가량은 모 작사학원을 중심으로 벌어진 황당한 사례를 소개하는 데 할애됐다. 작사학원은 작사가가 되길 희망하는 원생들을 교육시키고 기획사로부터 받은 데모곡을 들려주며 작가로 입문할 기회를 부여하는 곳이다. 김아무개 원장은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내로라하는 케이팝 대표 작사가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실제 작업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학원생들의 작품에 명의를 올리고 저작권 지분도 가져간다는 주장이 '익명의 케이팝 작사가 대리인'이라는 트위터 계정을 통해 제기되었다. 방송은 김 원장이 기획사에서 곡을 채택할 시 수고비 명목으 주는 100만 원(한 곡 당)을 자신의 계좌로 입금 받고 작사에 참여한 원생들에겐 나눠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들 속사정
▲ 지난 8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SBS
피해를 당한 수강생들의 제보에 따르면, 자신들의 평균 작사 참여율은 77%에 달했지만 그들이 갖는 저작권 지분은 고작 4.5% 정도에 불과했다. 공동작업의 경우, 작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서명이 들어간 '지분확인서'를 저작권협회에 제출하게 되는데 제보자들은 이에 대한 일체의 설명이나 동의를 받은 적이 없었고 확인서조차 본 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SBS <그알>측이 취재에 돌입하자 김 원장은 뒤늦게 원생들에게 기획사 수고비를 지급하고 나섰다.
일반적으로 공동 작사의 경우, 글자 수와 마디 수를 일일이 계산해 지분을 나누는 게 관행이지만 김 원장은 1/N로 가져갔다. 이에 대해 피해자들은 "공동 작사가면 같이 작업을 해야 하는데 한두 단어 고치는 걸로 지분을 가져간다? 1/N은 솔직히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렇듯 부당한 대우가 이어졌음에도 피해 수강생들은 왜 그동안 침묵했던 걸까? 문제 제기를 한다는 건 학원을 나가야 한다는 것과 다름없고 그건 더 이상 작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일 못하게 하겠다"라는 으름장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그알>은 전했다.
그런데 <그알> 측이 취재를 하던 도중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드러난다. 엑소, 보아 등 유명 가수 노래로만 수차례 곡이 채택된 작사가 S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가 작업한 곡에는 어김없이 김 원장의 이름도 함께 기재되고 있다. 실제 엑소 노래 작사에 참여한 제보자는 "혜성처럼 등장해서 엑소 노래들만 다 채택되는 작사가가 나온 거다. 이 분이 만약 정말 실재하는 분이면 천재다"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대형 기획사 A&R 담당자와의 수상한 관계
▲ 지난 8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SBS
하지만 꼬리가 길면 결국 밟히기 마련이다. '엑소 노래만 만드는 천재 작사가' S는 실제론 해당 기획사 A&R(아티스트 및 음반 기획을 총괄하는 담당자) 부서의 팀장 최아무개씨와 관련이 있었다. 이 담당자와 김 원장의 모바일 메신저 대화 내용을 담은 대화를 폭로한 제보 메일 내용을 살펴본 업계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두 사람이 유령작가를 만든 것 같다. 최씨의 부인인 걸 숨기기 위해 예명을 사용한 것 같다"라고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최씨가 직접 가사를 썼다는 내용도 있다. 팀장이 직접 작사를 했을 가능성도 보인다"라는 추가 의혹도 제기했다.
엑소 정도의 인기 가수 곡에 이름을 올린다면 적은 지분 참여율만으로도 음원 및 음반 관련 저작권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에 유령작가를 통해 부당한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알> 방영 며칠 전 SM엔터테인먼트는 해당 팀장에 대한 중징계, 업무 배제 등의 조치를 내렸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김 원장 측은 이 문제와 관련한 <그알>에 보낸 내용 증명에서 "S는 작업에 참여하지 않은 채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분을 가져간 적이 없다. 다만 A&R 직원의 가족이기에 비공개로 작업한 거다"라고 해명하고 나섰다.
<그알>은 김 원장, 최씨, S 등의 사례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기는 쉽지 않겠지만 지망생들의 공평한 기회를 빼앗고 사익을 취한 점은 명백히 비윤리적이다"라고 쓴소리를 했다. 창작물과 관련한 분쟁에선 작사, 작곡 등의 증거 제시가 쉽지 않다는 점은 여전히 유령작가 탄생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관련, 저작권분쟁위원회 신설 및 관련 법령 개정 발의 등 개선의 노력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지만 약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보완은 여전히 미비한 실정이다. 그 누구도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는 기본적이고 단순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은 제작진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한 이들 때문에 수많은 창작자들이 피눈물을 쏟는 현실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하게 만든다. 케이팝이 앞으로도 꾸준히 사랑받으려면 시스템을 가꾸는 일도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방송은 힘주어 말한다. 창작자들 뿐만 아니라 기획사, 음악팬들을 우롱하는 유령작가의 존재가 근절되지 않는다면 케이팝의 건강한 미래는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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