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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폰지밥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문화로 읽는 노동] 스폰지밥은 내 친구일까

등록|2021.05.11 17:06 수정|2021.05.11 17:09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것' 또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생긴다. 과거에는 이상하다고 여겨진 것들이 지금 와서 다시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판명되기도 하고, 현재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가치들이 과거에는 잘못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의 대표적인 예는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이다. 만화 속 고길동은 보고픈 엄마를 찾아 헤매는 가엾은 둘리를 타박하고 괴롭히는 악역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고길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악역일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둘리의 만행을 정리한 밈(meme, SNS 등에서 유행해 다양한 모습으로 복제되는 패러디물을 이르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며, 둘리를 보고 자란 어른들에게 고길동은 둘리를 견뎌낸 성인군자로 재평가된다.

이렇듯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상황에 따라 맞았던 것이 틀린 것으로, 틀렸던 것이 맞는 것으로 변한다. 직장생활 N년차인 내 또래 친구들에게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고길동 말고도 있다. 바로 어렸을 적 즐겨봤던 만화 '네모바지 스폰지밥'이 그중 하나다.
 

▲ 어릴적 긍정적이고 매사 열심히 일 하던 스폰지밥이 노동착취와 자기착취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 위키피디아


집게리아 일등 종업원 스폰지밥

깊은 저 바닷속 비키니 시티에는 파인애플 모양을 한 집이 있다. 그곳에는 만화주제곡이 말해주듯이 '네모난 얼굴'에 '동그란 눈'을 가진 네모바지 스폰지밥이 살고 있다. 그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덕분에 '문어'나 '인어' 할 것 없이 비키니 시티의 모두와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말 그대로 모두의 친구인 셈이다.

불평불만 없이 밝은 스폰지밥의 성격은 특히 직장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스폰지밥은 관내 최고 햄버거 맛집인 집게리아에서 주방장으로 근무하는데, 그에게 있어 집게리아는 직장 그 이상의 의미다. 근무시간 물론 퇴근 이후에도 집게리아가 번창할 방법을 고민한다. 썰매 대회에 참가하면서, 상금을 받으면 집게리아의 리모델링을 하겠다고 다짐할 정도다. 이러니 스폰지밥은 사장이 벌여놓은 일로 휴게시간이나 휴일 없이 근무해도 힘든 기색은커녕 그저 행복할 뿐이다.

스폰지밥의 유일한 직장동료인 징징이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다. 근면 성실하다 못해, 사장보다 더 회사를 아끼는 스폰지밥과 달리 징징이는 직장생활보다 직장 밖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에게는 계산과 주문 수수, 홀서빙 등의 업무를 할 때보다 그림을 그리거나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등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할 때 더욱 행복하다. 징징이는 열심히 일하는 스폰지밥을 괴롭히거나 그의 적극적인 업무 수행을 비난하기 일쑤다. 또한 징징이는 최대한 일을 편하게 하고자 요령을 부리기도 하고, 스폰지밥에 비하면 고객을 응대하는 태도도 딱딱하며 친절하지 않다.

두 인물의 대비는 만화 속 그들의 삶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집게리아의 일등 종업원인 스폰지밥은 악당으로부터 마을을 구하는 영웅이 되기도 하고, 여러 부분에 있어 많은 성취를 이뤄내기도 한다. 반면 근면한 노동자가 되지 못한 징징이는 스폰지밥보다 열등한 존재로 묘사되며, 무엇을 도전하든 매번 실패한다. 심지어 징징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취미활동은 주변인들에게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거나 민폐가 되는 행동으로 여겨져 비난받는다. 우리 모두 스폰지밥의 친구였던 그때 그 시절, 우리에게 스폰지밥의 성공과 징징이의 실패는 '맞는 것'이었다.

집게리아 그리고 스폰지밥

그때 '맞는 것'의 유효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스폰지밥과 징징이가 함께 노동을 하며, 생활의 일부를 공유하는 공간인 집게리아와 그곳의 대표인 집게사장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집게사장은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한 서민 갑부로,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햄버거 전문점을 운영한다. 그는 한때 넝마를 주워입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게살버거를 개발해 순식간에 부자가 됐다. 집의 벽지를 돈으로 쓸 만큼 이미 어마한 부를 축적했지만, 여전히 집게사장은 돈 버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 이윤 추구를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노동자 착취를 일삼는다. 손님이 메뉴에 없는 음식을 주문하더라도 직원들은 무조건 그 주문을 받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100명이든 200명이든 몰아치는 손님을 감당하는 것도 스폰지밥과 징징이, 단 두 명의 직원이 알아서 해내야 할 일이다.

전달 대비 매출이 3천 원 하락한 것을 이유로 노동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며, "일할 때는 숨도 쉬지 마. 숨 쉬라고 돈 주는 거 아니야"라며 폭언을 일삼기도 한다. 이외에도 집게사장이 행한 만행이 너무나도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이 같은 극악의 노동환경 속에서도 스폰지밥의 행복회로는 멈추지 않는다. '매장에서 수다 떤 것', '근무 중 농담한 것', '껌 씹은 것' 등 근무에 온전히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당 행위에 대한 벌금을 청구해도, 임금이 3개월째 체불돼도 말이다. 그저 스폰지밥은 "이 일은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요"라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한다.

노동 착취가 숨 쉬듯 일어나는 노동환경에서도 긍정을 잃지 않는 스폰지밥을 지금도 '맞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여전히 스폰지밥이 맞는 것이라면 스폰지밥처럼 노동하지 않는, 할 수 없는 나는 틀린 것일까?

우리는 스폰지밥을 거부한다

자본은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원을 계발하기 위해 힘쓴다. 경영학에서는 일하는 사람을 인적자원(Human Resources)으로 일컬으며, 기업 목표 달성을 위해 활용되는 여느 자원 중 하나로 대상화한다. 나아가 사회는 일하는 사람 모두가 누군가의 인적자원이 될 수 있도록 학습시키고, 경쟁을 부추긴다.

인적자원이 된 우리의 노동은 작아지고 또 작아져 결국 근로만 남는다. 자본은 근로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에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자본은 그들의 이상적인 인적자원 그 자체인 스폰지밥을 갈망하며, 스폰지밥이 되는 것에 대한 달콤한 보상을 제시하며 우리를 유혹한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자기 착취는 타인에 의해 착취되는 것보다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완전히 자신이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된다고 한다. 스폰지밥이 되기로 자처한 누군가는 자유롭다는 착각 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집착에 사로잡혀 누구보다 열심히 "근로"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 중의 누군가는 노동자에서 근로자가 되고, 근로는 '맞는 것', 근로가 아닌 노동은 '틀린 것'이 된다. 근로가 노동을 대체한 자리에 "그냥 노동"은 성립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긍정의 조건이 붙지 않은 노동은 게으름, 무능함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폰지밥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근로라는 조건부 노동만이 덕목인 세상에게 "그냥 노동자"로 바라봐 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일하는 게 힘들다", "일 때문에 아프다"라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근로라는 조건 앞에 작아지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의 노동을 존중해야 한다.

각자의 노동이 그 몸과 마음까지 태워버릴 정도로 지나치지 않도록 "이만큼 했으면 되었다", "적당히 해도 괜찮다"라고 서로를 보듬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으로 인한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나의 노동에게 안부를 묻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5월 1일, 새로운 한 해의 노동절이 돌아왔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우리의 친구 스폰지밥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소원을 빌듯이 노동절의 소망을 빌어본다. 남은 한 해 동안에는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로 불리는 이가 더 많아지길, 열심히 노동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들이 되길 기원해본다. 한 때는 스폰지밥이 되려고 애썼던 나의 몸과 마음에게도 일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힘들면 쉬엄쉬엄해도 괜찮다고 안부의 말을 건네 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이자 노무사이신 임혜인님이 작성하셨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5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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