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 효과'로도 가리지 못한 지상파 3사 실종사건
[하성태의 사이드뷰] 지상파의 몰락·넷플릭스 약진 두드러진 제 57회 백상예술대상
▲ 제57회 백상예술대상의 한 장면 ⓒ JTBC
"당연한 것들을 기다리던 마음의 겨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추위가 이렇게 길고 힘들지 누구도 알 수 없었죠. 이 시간을 버티며 우리는 참 많이도 넘어졌네요. 그래서 위로를 찾아 희망을 찾아 늘 옆에 있어 주는 대중문화예술을 찾게 되나 봅니다. 찬란하게 피어나기도 모자랄 우리의 젊은 날. 당연한 것들을 잃어버린 당신에게, 긴 겨울을 버티고 있는 빛나는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제57회 백상예술대상 진행자 수지가 낭송한 '당연한 것들을 기다립니다'란 제목의 위로는 대중을 향한 것이자 대중문화예술인들 전체를 위한 것이었으리라. 예상보다 길어진 코로나19 재난 상황에 대중문화예술인들 다수가 신음했다.
이들 중 일부는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백상 시상식 전날인 12일 한국상영관협회와 한국예술영화관협회 등은 극장업계 정상화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극장업계가 코로나19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며 정부에 실효성 있는 지원책을 촉구했다.
13일 JTBC를 통해 생중계된 제57회 백상예술대상 또한 이런 대중문화예술계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난해에 이어 참석자들은 거리두기를 지킨 채 마스크를 썼다. 예전 같으면 부문별 수상자들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던 객석의 관객도 역시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축하공연조차 위로의 무대로 꾸며졌다. 수지의 낭독에 이어 무대에 오른 배우 이도현과 가수 최백호가 함께 부른 '두 손, 너에게'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격려라 할 수 있었다. 지난 한 해 사랑 받은 영화와 드라마 속 희망을 북돋는 장면이 무대 뒤 스크린에 채워진 것도 같은 맥락일 테다.
그런 분위기 속에 3시간 넘게 진행된 제57회 백상예술대상의 TV부문 대상은 MBC <놀면 뭐하니?>의 방송인 유재석이, 영화부문 대상은 <자산어보>의 이준익 감독이, 그리고 백상연극상은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우리는 농담이(아니)야>가 수상했다. 이렇게 코로나19 시대 극복을 위한 위로와 희망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제57회 백상의 특기할 만한 경향을 짚어보자.
드라마 콘텐츠에서 두드러진 넷플릭스의 약진, 지상파의 몰락
▲ 제57회 백상예술대상의 한 장면 ⓒ JTBC
<인간수업>, <스위트홈>부터 <콜>과 <승리호>에 이르기까지. 거대 OTT 플랫폼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들 중 제57회 백상의 후보에 이름을 올린 작품들의 면면이다. <콜>의 전종서가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인간수업>의 박주현이 TV부문 여자 신인연기상을, <승리호>의 정성진, 정철민 VFX 수퍼바이저가 영화부문 예술상을 수상했다.
아울러 넷플릭스는 백상에서 지난해 <킹덤2>가 TV 예술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지 1년 만에 총 7개 부문에 걸쳐 4개 후보자(작)을 냈다. 수상자 외에도 <인간수업>이 TV부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이 외에도 <스위트홈>의 송강과 <인간수업>의 남윤수가 TV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후보에, <스위트홈>의 박규영이 TV부문 여자 신인연기상 후보에, <콜>의 이충현 감독이 신인감독상 후보에, <스위트홈>의 이병주 VFX 수퍼바이저와 <승리호>의 장근영 미술감독이 각각 TV부문과 영화부문 예술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이 같은 넷플릭스의 약진은 확연히 달라진 콘텐츠 업계의 판도와 드높아진 OTT 플랫폼의 위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드라마 부문이 도드라졌다. TV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JTBC <괴물>을 비롯해 후보에 오른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 <악의 꽃>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넷플릭스 <인간수업>까지 지상파 3사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지난해 TV부문 대상을 수상한 KBS 2TV <동백꽃 필무렵>과 작품상을 수상한 SBS <스토브리그>가 맹활약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와 예능 부문 공히 케이블(tvN)과 종편(JTBC)의 강세가 수년째 이어져 왔다고 해도 올해 TV부문 작품상 후보에서 지상파 3사가 실종된 것은 일대 사건이라 할 만했다.
연출상이라고 달랐을까. <악의 꽃>의 김철규 감독이 트로피를 안은 가운데, 권영일 감독의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김희원 감독의 <빈센조>, 박신우 감독의 <사이코지만 괜찮아>, 심나연 감독의 <괴물>까지 후보자 모두 tvN과 JTBC에서 배출됐다.
지상파 3사 중 유일한 수상자는 SBS <펜트하우스>로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김소연이었다. 이외에 후보에 오른 지상파 3사의 작품은 <달이 뜨는 강>이 유일했다(여자 최우수 연기상의 김소현, 남자 신인연기상의 나인우). 이외에 남자 최우수연기상(<괴물>의 신하균)도, 남녀 조연상도(<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오정세와 <경이로운 소문>의 염혜란), 남자 신인연기상(<18어게인> 이도현) 모두 케이블 및 종편의 차지였다.
KBS 1TV <아카이브 프로젝트-모던코리아2>로 교양부문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체면 치레를 했다. 과거 '드라마 왕국'의 지위를 누렸던 MBC는 유재석과 김태호 PD가 구원한 경우다. <놀면 뭐하니?>는 TV부문 작품상을 수상했고, 이어 대상 수상자인 '유재석 효과'를 누렸다.
주지하다시피 백상 TV 부문은 대중성과 시청률을 골자로 지상파부터 케이블 및 종편을 아우르는 유일한 시상식이다. 지난 한 해 SBS 정도를 제외하고 극심했던 지상파의 부진이 올 시상식의 결과로 재확인 된 셈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예능 작품상 부문 또한 지상파 3사 작품은 <놀면 뭐하니?>와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 단 두 편이었다. 이외에 카카오TV의 <개미는 오늘도 뚠뚠>이 JTBC <싱어게인>,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과 함께 후보에 오른 것도 눈길을 끈다. 이제 넷플릭스란 OTT는 물론 포털이 만든 웹 예능 콘텐츠가 지상파와 경쟁하는 시대임을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적어도 드라마에서 만큼은 '지상파의 몰락'이 체감되지 않는가.
의외의 선택, '젊은 피'의 중용, 장인의 역작
▲ 제57회 백상예술대상의 한 장면 ⓒ JTBC
"힘든 한 해였지만 오늘 후보에 오른 분들이나 뛰어나고 멋진 작품들이 많아서 오히려 뒷날 돌이켜 보면 가장 어려웠던 시기지만 가장 보석같은 작품과 후보들이 많았던 그런 한 해로 기억될 거라 믿습니다." (봉준호 감독)
시상식 당일에도 신작 시나리오를 썼다던 영화부문 대상 수상자 봉준호 감독의 덕담이다. 그랬다. 힘든 시기였고,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는 중이다. 극장 관객 수는 70% 넘게 줄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는 연일 '최저'를 경신했고, 통합전산망이 가동된 2004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발표도 나왔다.
개봉된 신작‧대작이 줄면서 극장을 찾는 관람 문화까지 OTT로 이동했다는 분석이 수치로 입증되는 중이다. 절대 관객 수로 급감하는 와중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개봉을 택한 영화도 부지기수였다.
이날 대상을 수상한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역시 코로나19 상황이 아니었다면 다른 결과를 냈을지 모를 작품이었다. 이준익 감독 또한 만감이 교차하고 하는 듯 했다. 그의 수상 소감은 그런 안타까운 현실과 대상 수상의 기쁨이 뒤섞인 듯 보였다.
"기쁜지 불편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사극인데, 사극 영화를 한 편 만든다는 것은 많은 제작비가 듭니다. 그런데 <자산어보>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상업적이지 못해서 흥행에 큰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영화로 만드는 방법은 제작비를 줄이는 것이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 미술이나 소품이나 의상이나 촬영이나 각 분야의 스태프들이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영화에 출연한 주요 배우들과 또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우정출연을 해 주신 많은 훌륭한 배우들이 자신의 이익을 뒤로 하고 이 영화에 그야말로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은 결과로 이 상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흥행에 큰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이 영화의 가치는 이 상을 받음으로써 인정받았기 때문에, 감사드립니다." (이준익 감독)
그렇게 <자선어보>와 함께 백상이 가치를 인정한 수상작 중 눈에 띄는 작품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소리도 없이>, <남매의 여름밤> 등이었다. 작품상을 수상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시대성과 사회 비판 드라마, 여성주의 색채 등 작품성을 고루 인정받았고, 극장가와 디지털 플랫폼과 OTT 등에서도 사랑 받았던 작품이다.
감독상(홍의정 감독)과 남자 최우수연기상(유아인)을 수상한 <소리도 없이>는 '무시무시한 데뷔작'이란 평가와 함께 지난해 청룡영화상에서 신인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통해 완성도를 인정받은 바 있다.
신인감독상(윤단비 감독)과 신인 여자연기상(최정운)을 수상하고 부문별로 고르게 노미네이트된 <남매의 여름밤> 역시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공개 당시 '최고의 데뷔작'이란 찬사와 함께 독립영화로서 각종 시상식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작품이다.
이렇게 이날 주목을 받은 작품들 중 시나리오 상을 수상한 <내가 죽던 날>의 박지완 감독을 포함 홍의정 감독과 윤단비 감독 모두 장편 데뷔작으로 수상의 영광을 안은 여성 감독이 됐다. 지난해 <벌새> 감독상을 수상한 김보라 감독에 이어 여성 신인 감독들의 선전이 도드라진 셈이다.
연기상에서도 백상의 '젊은 피' 사랑은 눈에 띌 만 했다. <콜>의 전종서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고아성, <내가 죽던 날>의 김혜수, <세자매>의 문소리, < 69세 >의 예수정을 제치고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018년 <버닝>으로 데뷔한 지 3년 만에 주연상을 수상한 전종서는 "이창동 감독에게 감사하다"는 수상 소감을 남겼고, 역시 <버닝>의 주연을 맡았던 유아인도 청룡상에 이어 <소리도 없이>로 재차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코로나 19의 여파가 크나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금년 영화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들 중 흥행작이나 '텐트폴 영화' 등으로 분류할 만한 박정민이 남자 조연연기상을 수상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나 <반도>, <강철비2: 정상회담> 정도였다.
반면 백상은 '허리급 영화'로 분류되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결백>이나 비교적 적은 예산이 투입된 <자산어보>와 <내가 죽던 날>, <소리도 없이>를 주목했고, <남매의 여름밤>과 <세자매>나 < 69세 > 등은 독립영화라 할 수 있었다. 최근 백상연극상을 신설한 백상이 과거 흥행성이나 대중성을 염두에 뒀던 것과 달리 좀 더 예술성에 무게를 두는 경향으로 선회 중이라고 할 수 있을 터.
봉 감독의 말마따나, "가장 어려웠던 시기지만 가장 보석같은 작품과 후보들"에게 주목했던 제87회 백상예술대상. 올해의 위로와 격려를 딛고 영화계와 문화예술계 모두 내년엔 코로나19의 악몽을 말끔히 씻어내는 '어나더 데이'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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