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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중단 여성이 된 나, 이 '스승님'들이 은인입니다

은유, 이슬아, 이오덕... 초보 '작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글쓰기 선생님들

등록|2021.05.15 19:47 수정|2021.05.15 19:47

▲ 글쓰기 ⓒ unsplash


'경력 중단 여성'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

'노래 듣고, 여유롭게 여행하며, 글 쓰는 삶을 살고 싶다. 이왕이면 여행 작가는 어떨까?'

삶의 목표를 어디로 둬야 할지,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할지. 삶의 물음표만 가득했던 나의 20대. 나는 이렇게 일기 썼다. 한창 <걸어서 세계 속으로> 다큐멘터리나 세계 배낭여행을 떠난 여행 작가의 글에 심취해 있을 때다.

매일 눈 앞에 펼쳐지는 낯선 일상, 그것을 누비며 뜀박질하는 심장 박동 소리를 부러워했다.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포도알이 채워진 걸 뿌듯하게 보며,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감상을 매일 적었다. 글로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어느새 대학 졸업생이 됐다.

나는 컴퓨터도 아닌데, 높은 사양의 스펙을 맞추기 위해 발버둥 쳤다. 토익 900점, 한국어능력시험 등 각종 자격과 시험에 몰두해 오전 5시 눈을 떠 첫차를 타고 토익학원에 갔다. 참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이었다.

시험을 재미로 치는 건 아니지만, 재미가 없으면 능률도 안 오른다. 당연히 점수는 꾸준히 오르지 않았다. 토익 성적을 받아 들고 좌절할 때, 운 좋게도 난 점수와 자격증과 상관없이, 대학교수님 추천으로 지방의 한 신문사에 입사했다(물론 취재실습, 면접 등을 치렀다).

운은 좋았지만, 내 실력은 형편없었다. '오늘 하루도 즐거웠다' 블로그에 일기 쓰는 수준으로는 신문 기사를 쓸 수 없었다. 기자에게 기본은 글빨(?)이었다. 어디 이뿐인가. 낮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정신력, 취재원의 말을 놓치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 처음 본 사람과 넉살 좋게 어울리는 친화력, 불편한 장소에서도 서슴없이 질문하는 뻔뻔함 등이 필요했다.

"이걸 기사라고 썼냐?!"

팀장과 국장의 고함을 들어가며 찍어낸 기사들 덕분에 글빨은 나날이 상승했다. 뭐든 하는 만큼 는다고, 입사 초기 기사 1건을 쓰는 데 2시간 넘게 걸렸는데, 1년 뒤 1건당 30분~1시간이면 써내는 능력이 생겼다. 기사는 자장면 배달처럼 '신속', '정확' 해야 했다.

그런 내게, '경력 중단 여성'은 딴 세상 이야기인 줄 알았다. 출산 육아를 반복하다, 6년간의 기자 생활을 정리해야 했고, 경력 중단 여성이 됐다. 결국 내게 남은 건 '글'이었다. 내가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실력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 글 쓰는 것이었다.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아

경력 중단 여성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일로서 만나는 사람 앞에 나를 증명해야 했다. 첫인사에 건네는 명함이 필요했고, 새로 만드는 명함 내 이름 옆에 붙을 마땅한 직함이 '작가' 말고는 없었다. 작가라는 직함이 무겁게 다가왔다.

'네가 은희경, 김애란, 김유정 작가님들과 같은 직함을 쓸 정도로 능력이 되니?'

내게 묻는 질문이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질문에 답하지 못한 나는 '작가' 라는 직함 대신 '글 짓는 사람'이라 명함에 적었다. 예술인활동증명서, 출판서적 등 자신이 작가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이제야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앞에 내 보이는 일을 하는 내게, 그런 증명서 따위는 없었다.

'공모전에서 수상하거나, 등단해야겠어!'

증명서가 없는 나를 증명하기 위해,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대학 졸업생 때의 나처럼 '공모전' 문구가 보이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수많은 공모전 결과 발표날, 내 이름은 없었다. 때때로 모아둔 에세이로 출간 기획서를 성심껏 적어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귀하의 옥고를 출판하지 못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출판사님. 정말 애석하면, 이런 문구 보내지 말고 출판하는 건 어떤가요?'


내 마음의 외침과 달리, 출판사마다 오는 메일 내용이 똑같았다. 좌절해도 쓰고, 넘어져도 쓰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쓰는 것밖에 없어서 나는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순간마다 날 일으켜준 건 책과 메일로 만난 글 선생님들이었다.
 

▲ 나를 일으켜주는 글 선생님들의 책. ⓒ 김예린

 
"닫힌 방 안에서는 생각조차 닫힌 것이 된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가기가 발 디딘 삶에 근거해서 한 줄씩 쓰면 된다.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누구나 글감이 있다는 것. (중략) 글쓰기는 만인에게 공평하다." <쓰기의 말들, 은유 p.48>

공모전에서 탈락의 쓴맛을 느낄 때마다, 은유 작가가 쓴 이 글귀를 읽었고 노트북 자판 위에 손을 얹었다. 덕분에 내 좌절은 오래가지 않았고, 지금도 꾸준히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글귀를 펼쳐보곤 용기를 얻는다. 출판과 등단으로 '작가로서의 인정'을 갈망하는 내게 일간 이슬아의 발행인이자, 헤엄 출판사 이슬아 대표는 최근 이렇게 말했다.
 
"문학을 하실 계획은 없나요?"
슬아는 기자를 빤히 바라본다.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니까 전통적인 의미에서 순수 문학으로 분류된 시나 소설이나 희곡이랄지, 등단을 거친 작품 같은 것을 해볼 생각은 없으신지..."
"등단한 작가님들만의 문학을 지칭하신 거라면 순문학 말고 등단 문학이라고 말씀하시면 어떨까요? 저는 등단한 작품 중 좋아하는 책이 아주 많아요. 제가 읽고 자란 한국 소설과 시가 대부분 그 안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등단 문학은 문학의 한 갈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도 바깥에서도 온갖 종류의 문학적인 작품이 쓰여지잖아요."
"그래서... 문학을 이미 하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너무 당연하게도 그렇습니다."
<일간 이슬아 2021.05.03. 가녀장을 부탁해 ⑥ -이유 있는 문학 中>

'인정'만 바라본 내게 이슬아 작가의 말은 좀 다르게 들렸다. 그가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며 "아무렴 어때, 나처럼 계속 쓰며 너만의 길로 걸어가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글은 그렇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문장 한 구절, 문단 한 단으로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넌 잘하고 있어'라고 다독인다.

요즘은 이오덕 작가의 <이오덕의 글쓰기>를 읽는다. 이 작가님은 나를 '미사여구만 있는, 알맹이 없는 글이 아닌 삶이 있는 글을 써'라며 다그치는 듯하다.
 
"삶이 있는 글을 쓰자. 삶을 쓰자. (중략) 삶의 글은 삶의 말로 써야 한다. 삶의 말은 나날이 쓰는 정다운 우리 말, 나 자신의 말이다. 빌려온 말, 유식을 자랑하는 말, 남의 말이 아닌 쉬운 우리 말이다. 사실을 보여 주는 말, 진실을 느끼게 하는 말, 가슴에 바로 와 닿는 말이다."
<이오덕의 글쓰기,  p.114-115>

주옥 같은 글에 밑줄을 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 작가님의 가르침을 달게 받고 있다. 집안일을 할 때면 종종 오디오클립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틀어 놓는다. 옆집 언니처럼 도란도란 글쓰기 문제를 상담해주는 은유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맞아요. 언니" 하며 맞장구 치고 히죽거린다. 그의 말에서 앞으로 계속 글을 써 내려갈 힘을 충전한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내 글 선생님들. 이 글이 그들에게 닿지 않아도 고마움을 가득 담아 말하고 싶다.

"제가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건 그대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 게재됩니다. http://brunch.co.kr/@beaurin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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