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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혐오·차별하는 네오나치에게 폭력... 누가 잘못한걸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그리고 내일은 온 세상이>

등록|2021.05.21 17:52 수정|2021.05.21 17:52

▲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그리고 내일은 온 세상이> 포스터. ⓒ 넷플릭스


독일 남서부에 위치한 만하임 대학교 법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 루이자는 친구를 따라 반 나치·반 파시스트 활동단체 'P-31'에 들어간다. P-31은 그들만의 아지트를 두고 그곳에서 숙식하며 전략전술을 짜는 등 공동체 생활을 영위한다. 루이자는 귀족 집안의 여식으로, 부모님은 그의 활동을 용인하며 "서른 살 이전에 좌파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거고 서른 살 이후에 좌파면 뇌가 없는 거다"라고 쉽게 치부해 버린다. 그러던 어느날 P-31 멤버들과 루이자는 파시즘 성향의 정치인이 연설을 하는 현장에 나가게 된다.

루이자는 어느 파시즘 활동단체원이 동영상을 찍는 휴대폰을 주워 도망가다가 파시스트한테 붙잡혀 심한 폭행을 당한다. 그녀를 구한 건 다름 아닌 P-31 내 강경파 수장 알파다. 온건파 쪽으로 시작한 루이자의 성향이 강경파 쪽으로 기울게 된 계기였다. 이후 루이자는 알파와 함께 강경파의 핵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P-31 강경파는 네오 나치 또는 파시스트 활동단체 모임을 사전에 입수해 습격하는 식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물품 부수는 걸 목적으로 할 때도 있고 사람을 다치게 만들 때도 있다. 루이자는 강경파로서의 활동이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한다. 그렇다고 온건파로 활동하자니, 이는 세상을 향한 구호일 뿐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루이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국민저항권에 대하여

독일 기본법 제20조 4항은 다음과 같다. '독일 연방 공화국은 민주적 사회적 연방 국가다. 이러한 질서의 폐지를 기도하는 자에 대해 다른 구제 수단이 불가능할 때, 모든 독일인은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그리고 내일은 온 세상이>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문구이다. 어떤 의미일까.

'국민저항권'이라 불리는 이 조항은, 일찍이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 존 로크가 1690년 저서 <시민정부론>에서 주창하고 1776년 '미국 독립선언'과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구현되었던 문장이다. 헌법에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자연권으로 간주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 시민의 당연한 권리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사례를 찾자면 2016년 12월의 '촛불 혁명'을 꼽을 수 있다. 영화는 그런 면에서 충격을 던진다. 우리가 아는 독일은 최초의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한, 선진국이 아닌가.

국가질서를 파괴하려는 자 vs. 저항하는 자

독일 기본법 제20조 4항을 다시 들여다보면, 민주적·사회적인 독일의 국가질서를 파괴하려는 자가 있는데 막을 수단이 없다면 국민이 나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내일은 온 세상이>를 보면,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들이 명명백백 국가질서에 해를 끼치려 하는데 나라에서 수수방관하고 있으니 국민들로 이뤄진 P-31 같은 단체가 나서서 저항하려 한다. 그런데 그들을 막아서는 게 비단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뿐만은 아니다. 오히려 경찰 공권력, 정부가 이들을 막아선다.

여기서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의 활동 또한 민주적·사회적 활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의견도 있으면 저런 의견도 있는 게 당연하고 또 건강한 것이라는 주장 말이다. 이 경우 정부가 P-31의 활동을 막는 게 정당해진다.

반면 다른 하나는,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의 활동이 현 독일의 국가질서에 반한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P-31 멤버들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시선을 공유한다.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의 활동은 제제받아야 하며 정부에서 책임지지 못하니 자신들이 나서서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법론에선 첨예하게 둘로 갈린다. 이상 실현을 위해 절대적인 무폭력주의 지향의 '온건파'와 이상 실현을 위해 테러도 불사한다는 '강경파'.

온건하게 저항해야 하는가, 강경하게 저항해야 하는가

이론적으론 온건파가 맞을 것이다. 폭력은 적에게 빌미를 제공하거니와 자칫 수단이 목적으로 변질되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설 여지가 너무나도 다분하고 영원할 수도 없다. 폭력 없이 이상을 이룰 수만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이다. 결국 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닌가. 하지만 현실을 완전히 다를 요량이 크다.

강경파는 현실에 맞닿아 있다. 제아무리 구호를 외쳐도 조금의 폭력만으로 충분히 와해시켜 버릴 수 있으니, 폭력의 힘은 매우 크다. 막상 폭력을 당해 보면 그 두려움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이어나가기가 힘들 테다. 즉각적이고 확실한 반응이 있기에, 폭력은 이상 실현을 위해 가장 완벽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수단이자 도구인 것이다.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영화에서 루이자는 온건파와 강경파를 두루 경험한다. 하지만 무엇도 완벽할 수 없었고 정답 또한 없었다. 나름의 해답도 정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땅한 길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저 활동 한 번 해 본 걸로 만족해야 할까? 본격적으로 활동하기에 앞서 좋은 경험을 해 봤다고 생각해야 할까? 영화가 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대신 생각해 보게끔 한다. 어떤 시선을 견지하며 살아갈 거냐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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