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이 월급 올려줄테니 만나자고 했다"
[2020년 서울여성노동자회 평등의전화 상담사례 ③] 직장 내 성희롱 Ⅰ
서울여성노동자회는 1995년부터 평등의전화 상담실을 운영하며 여성노동자 현실을 알려내고 성평등노동실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수렴되었던 2020년, 상담실에서 진행된 상담 통계와 사례를 통해 여성 노동자의 현실은 어떠했는지 살펴보고자 하며, 이를 '남녀고용평등강조주간(5월 25부터 31일)'동안 5회에 걸쳐 오마이뉴스에 기고한다.[기자말]
▲ 서울여성노동자회 평등의전화·고용평등상담실 2020년 1월~12월 상담 유형 분석. ⓒ 서울여성노동자회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은 59.5%(295건)으로 상담 중 가장 많다. '고용평등기타' 중 가족돌봄휴가(0.5%)를 제외한 '직장 내 고충 처리 문의'(5.2%)와 '기타 직장 내 성희롱 관련 문의'(2.8%)을 합치면, 전체 상담의 67.5%가 직장 내 성희롱 관련 상담이다.
모든 연령대에서 성희롱 상담이 가장 높다. 상담 건수로는 '30~39세'가 가장 많으며, 직장 내 성희롱 상담 비율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20~29세'이다.
▲ 서울여성노동자회 평등의전화·고용평등상담실 2020년 1월~12월 상담 ⓒ 서울여성노동자회
직장 내 성희롱 상담 내담자의 근속연수는 '1년 미만'이 50.7%, '3년 이상' 30.5%, '1년~3년' 18.8%로 근속연수가 1년 미만으로 짧은 경우가 절반이나 되었다.
아랫글에 인용된 성희롱 내용은 성희롱 사례를 분류한 것이지만, 실제 내담자의 사례가 드러나지 않도록 분절하고 통합하였다.
상담 내용을 살펴보면 각기 다른 사례인데도 놀랄 만큼 비슷한 내용이 포착되고, 가해하는 말이나 행동은 사례를 읽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외상이 생길 정도로 심각하다. 그러므로 인용된 글에는 성희롱의 구체적인 단어나 행동은 되도록 삭제하였고, 상황이 이해될 정도로만 구성하였다.
성적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말
남자들이 여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배출 욕구 때문 / 여자는 늙으면 노래방 도우미를 한다
여성인 동료가 옆에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얼마나 여성을 폄하하는지 알 수 있으며, 그것이 함께 일하는 여성 노동자에게도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데 꽃밭에 있으니 기분이 좋다/ 예쁘다 / 아름답다 / 네가 꿈에 나왔다
여성이 다수인 자리에 남성이 '꽃밭에 있어 좋다'고 말한다. '기분 나빠할 수도 있지만'이라는 단서를 단다. 듣는 상대방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가해자는 알고 있다.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가해자로 지목되면 기분 좋으라고 한 칭찬인데 억울하다고 말한다. 단순히 칭찬이었을까?
칭찬이라 받아들이기에는 의도가 분명하다. 아름답다는 찬사 뒤에는 사적인 만남과 술자리를 바란다.
퇴근하면 뭐 하냐 / 술을 마시자 /인사불성이 되도록 /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냐고?
기혼 상사가 나에게 '네가 좋다'고 말했다. 이후 나에게 호감을 표해 회사 소문도 났다/ 이사의 호감 표시에 불쾌함을 말해도 '너를 좋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 사장이 이성적으로 좋다는데 / 기혼 남성 직원이 내가 좋다고 말했다
성희롱 가해자는 좋아하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마음대로 안 되는 거라며 억울해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자연스러운 감정일까?
위 사례들에서 '남성'은 여성의 상사인 기혼 남성이며, '여성'은 남성보다 나이가 어리고 남성의 부하직원이며 비혼이다. '좋아한다'는 말 뒤에는 '외롭다', '배우자와 관계가 좋지 못하다', '자고 싶다'는 말이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 기혼 남성이 배우자가 아닌 여성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여성과 어떤 관계를 원하는 것인가?
심지어 자신과 개인적으로 만나면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대표 이사가 월급을 올려줄 테니 만나자고 / 대표가 따로 만날 때마다 돈을 주겠다고 하는데 / 고객사 대표가 돈을 주겠으니 따로 만나자는데
성적 요구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금전 등의 이익을 주겠다고 하는 행위는 직장 내 성희롱이다. 이를 따르지 않았다고 불이익을 주는 것 또한 직장 내 성희롱이다.
성희롱 발언을 들은 사람은 당연히 불쾌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말'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잡아둘 수 없는 것이라 피해를 증명하기가 힘들다.
이러한 말이 매우 불쾌하였는데 성희롱 발언이 아닌지? / 성희롱인 것 같은데 처벌받게 할 수 있을까? / 불쾌하다 했더니 미안하다면서도 성희롱 발언을 계속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 상사가 평소 성희롱 발언을 자주 하는데 말이어서 증거가 없는데 성희롱 신고를 할 수 있을까?
성희롱 발언이 악질인 것은 '농담'이나 '칭찬'인 척하는 것이다. 농담이라거나 칭찬이라는 말은 가해자들이 주로 하는 변명이다. 하지만 농담이나 칭찬은 듣는 사람이 재밌거나 기분이 좋아야지, 말하는 사람만 재밌는 게 무슨 농담이고 칭찬인가. 그런데도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그렇듯 대놓고 '하지 말라'거나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참을 수밖에 없을 때가 많다.
성적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신체적 접촉
▲ 피해자는 성희롱 발생 시 혹시 친절이거나 호의일까 고민하기도 한다. 성희롱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피해에 대한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가해자가 정말로 인지하지 못했거나 불가피했던 일회의 상황이었기를 바라는 것 또한 피해자이다. 피해가 지속되지 않는 것이 피해자가 원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멈추지 않으니 문제인 것이다. ⓒ 오마이뉴스
신체적 성희롱 가해자는 성희롱 행위가 가해자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쳤거나 불가피한 접촉이었던 것처럼 변명한다. 길에서 상대가 나의 발을 밟았을 때 상대가 인지하지 못했거나 불가피했었는지 아니면 일부러 내 발을 밟았는지 정도는 대체로 알 수 있지 않은가?
어깨동무를 하거나 내 어깨를 주무르는 행위도 지속하는데 / 안마를 해주겠다며 내 몸을 잡아당기는데 / 자신의 어깨를 주물러 달라는데 / 업무 장소의 통로가 좁은 편인데 일부러 지나가며 내 몸에 손을 댄다. 조심해달라고 말했는데도 이러한 터치가 계속되는데
상사가 내 컴퓨터를 보는 듯하며 얼굴을 가까이 대거나 손을 만지는데 / 목덜미를 만지거나 손등에 뽀뽀하는데 / 상사가 내 허벅지를 만지거나 내 엉덩이를 만지는데 / 회식 날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뽀뽀를 했는데
내담자가 '성희롱인 거 같은데'라고 말할 때는 대부분 성희롱 피해가 지속된 경우였다. 우연이거나 불가피했다고 변명하기에는 너무 잦은 성희롱 피해가 있었다. 피해 노동자는 가해자의 성희롱에 단번에 성희롱을 그만두라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고?
성희롱 가해자가 높은 확률로 사업주나 상사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사업주나 상사가 불합리한 지시나 말, 행동했을 때 대번에 '아니오'라고 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성희롱 상황에서는 피해 노동자가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는지를 묻는가?
피해자는 성희롱 발생 시 혹시 친절이거나 호의일까 고민하기도 한다. 성희롱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피해에 대한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하지만 성희롱 행위는 성희롱이다. 누구에게나 하는 친밀한 행동과 성희롱 행위는 분명히 구분된다.
가해자가 정말로 인지하지 못했거나 불가피했던 일회의 상황이었기를 바라는 것 또한 피해자이다. 피해가 지속되지 않는 것이 피해자가 원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멈추지 않으니 문제인 것이다.
"회사에 신고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우리 사회가 성희롱 피해에 들이대는 많은 잣대와 의심 때문에 성희롱 피해자는 혹시나 본인이 예민한 건가 검열하고 판단을 보류한다. 잠깐의 불쾌함을 참고 넘어가면 괜찮지 않을까, 한 번이지 않을까, 정말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칭찬하고 북돋아 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아니다. 참으면 피해가 심화된다.
나에게 예쁘다 칭찬을 하거나 사생활에 관심을 갖더니 점점 어깨동무하거나 / 대표의 손이 내 손이나 팔에 일부러 닿는 것 같았지만 예민하게 굴지 말자 생각했는데 성추행이 점점 심해지는데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시 피해 노동자는 회사에 성희롱 신고를 하더라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을까 봐 걱정한다. 이전에 고충 신고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것을 보았거나 상사에게 고충을 털어놓았는데 오히려 이상한 사람을 만든다. 이런 경우 피해자는 회사에 신고한다고 해서 성희롱 피해가 중지되고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하기가 어렵다.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대충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 이전에도 사내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지만, 가해자 징계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 회사에서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
직장 내 성희롱 신고를 했는데도 회사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거나, 처리를 차일피일 미루는 경우도 있다.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거나 조사를 할 수 없으니 피해 노동자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직장 내 성희롱 고충 신고를 했는데 회사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 / 회사에 고충 신고 했지만, 일주일이 넘도록 어떠한 조치도 없다 / 성희롱 가해자가 잘못한 게 없다고 반박하자 대표는 회사에서는 판단할 수 없다면서 나에게 개인 간 소송으로 진행하라고 하는데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을 '신고받거나 발생 사실을 인지'하면 '지체 없이 조사'를 해야 한다. 조사 기간 '피해 노동자를 보호'해야 하며 조사 결과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이 확인되면 '지체 없이 가해자에 대하여 징계, 근무 장소 변경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직장 내 성희롱은 예방부터 조치까지 사업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는 안전하게 일할 권리가 있고 사업주는 노동자의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하도록 사내 문화를 만들고 방치한 것도 사업주의 잘못이다. 성희롱 가해자의 잘못인데 회사 탓을 하는 게 억울한가?
사업주가 우리 회사는 성희롱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며 성희롱 시 가해자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음을 명확히 한다면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회사를 계속 다닐 생각이라면 규율을 마음대로 어길 만한 노동자는 없을 테니까.
[기획 / 2020년 서울여성노동자회 평등의전화 상담사례]
① 회사의 채용 공고 보니 남녀 임금이 다른데요? http://omn.kr/1tdi2
② 육아휴직 후 복직... 더 교묘해진 회사의 퇴사 압박 http://omn.kr/1te05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서울여성노동자회 활동가입니다. 본 기사에 인용된 상담사례는 실제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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