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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입학생을 매년 7만 명 뽑는다면

[주장] 우리 교육은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꾸지 않는 것

등록|2021.06.06 11:32 수정|2021.06.06 11:32

▲ 서울대학교 정문. 자료사진. ⓒ 권우성


한국교육, 왜 바뀌지 않는가? 미국의 한 역사학자가 쓴 영문 서적의 한글 번역서 제목이며 지난 5월 22일에 열렸던 한국교육개혁전략포럼의 토론 주제였다. 2002년에 간행된 이 책의 원제목은 교육열을 뜻하는 'Education Fever'였는데 번역자들이 고심 끝에 정한 한글 제목이 '한국교육은 왜 바뀌지 않는가?'였다.

이 책이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 현대 교육이 지난 70여 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취학율, 학생수, 학교수, 교사수 등 모든 교육관련 지표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고,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민주화 성취 과정을 설명하는 국내외의 모든 연구에서 교육은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이렇게 성장하였고, 이렇게 사회변화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바뀌지 않았다는 말일까?

저자 마이클 세스 교수가 한국 독자들에게 쓴 서문에 나와 있듯이 '명문대 학위'를 얻기 위한 '교육열'과 이것이 만들어 내는 온갖 사회 문제는 별로 바뀐 게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명문대 학위를 얻기 위한 교육열

해방 10년, 정부 출범 7년, 휴전 4년이 지난 즈음인 1955년 말에 교육자 성래운(연세대 교육학과 교수 역임)은 당시 교육계에 만연되어 있던 분위기를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한 발악"(<새교육> 제8권 1호)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발악'을 위해 "학생 그 시절을 살지 못"하고 "한 달은 고사하고 반달이 못 되어 잊어버릴 그까짓 토막 지식을 외우다가" 귀중한 시간을 보내는 안타까운 지경이 당시 교육이었다.

바뀌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1956년 새해를 맞으며 성래운은 "저 입에 옮기기도 지긋지긋한 시험 준비를 때려눕히고" 학생들로 하여금 보람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길을 터주자고 호소하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호소하고 있지만 바뀌지 않고 있다.

성래운의 호소 이후 두 세대를 넘어 한 세기를 향해가고 있지만, 오로지 좋은 대학 입학이라는 교육의 유일 목적과 이를 향한 전 국민의 발악은 털끝만큼도 변한 것이 없다. 이 책의 저자 세스 교수는 한국인의 교육열이 변하지 않는 한 한국 교육에서의 경쟁적인 분위기는 가까운 미래에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한국교육, 왜 바뀌지 않는가'라는 주제 하에 열린 토론회 참석자들 대부분이 세스 교수의 주장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상 교육열을 주도하는 중산층 학부모, 교육개혁에 무기력한 교육관료, 그리고 공교육을 능가하는 사교육 시장이 존재하는 한 우리나라 교육에서 희망을 찾기는 어렵다는 자조적인 의견이 적지 않았다.

나는 토론회 참석자들과 책의 저자인 세스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교육열은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심성에 내재된 변하지 않는 문화가 아니라,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이 만들어서 지속시키고 있는 제도의 결과물이 아닌가? 교육열을 포기하지 못하는 학부모들은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피해자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교육 환경 아래에서는 그 어떤 교육 정책으로도 교육열을 완화하여 학생들이 학령기에 보람 있는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이 교육 환경이라는 것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주어진 조건인가, 아니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조건, 그래서 변화 가능한 조건인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 환경, 이 조건을 변화시킴으로써 학부모들을 교육열의 담지자, 교육열병의 보균자 지위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열이 아닌 교육 환경

요즘 우리나라의 많은 교육자들이 동의하는 교육선진국이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복지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북유럽의 핀란드이다. 핀란드의 인구는 우리나라 인구의 1/10 수준이고, 수도 헬싱키 인구 또한 서울 인구의 1/10 정도이다. 이 나라의 교육은 모두 무상이다. 초등부터 대학까지 학부모의 학비 부담이 없다.

13개의 국립 종합대학교가 있는데 가장 큰 대학은 수도 헬싱키에 있는 헬싱키대학이다. 그런데 핀란드에서 헬싱키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발악 수준의 경쟁은 물론 일반적인 입시경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헬싱키대학에 입학하기에 유리한 고등학교 형태가 따로 있다거나, 헬싱키대학에 입학하는데 유리한 교육 환경을 가진 지역이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핀란드 학부모들이 한국의 학부모들보다 착한 것일까? 자녀 교육에 무관심한 것일까? 핀란드 청소년들은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들에게 교육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노키아나 리눅스 신화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고, 제조업 비중이 17%로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독일, 일본과 함께 최고 수준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며,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에 이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OECD 주관 국제학력평가(PISA)에서 세계 모든 나라가 부러워하는 최상의 수준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핀란드와 우리나라의 차이는 서열화된 대학의 존재 유무 하나 밖에는 없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만든 공부 분위기의 차이이다. 핀란드 학생들의 자발적인 학습과 우리나라 학생들의 타율적인 학습이다. 자발적 학습의 결과가 타율적 학습보다 지속가능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사회 적응력은 불안하게 느껴지는 반면, 핀란드 교육의 미래사회 적응력은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어찌 보면 가장 큰 차이일지도 모른다. 이런 차이를 해소함으로써 우리나라 교육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헬싱키대학의 등록 학생 수는 3만 4~5천 명에 이른다.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 있는 최고의 국립(법인)대학교인 서울대학교보다 학생 수가 6~7천 명 정도 더 많다. 인구 비례를 적용해 보면 핀란드 학부모들이 느끼는 대입 스트레스는 서울대학교 학생 수가 35만 명이었을 때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느끼는 것과 유사할 수준일 것이다.

매년 서울대학교 학부 신입생을 3만 5천 명 정도 뽑는다면 과연 우리나라 학부모들 사이에 지금 수준의 발악적 교육열이 지속될까? 아니라고 본다. 수능 응시생의 0.7%(143명 중 1명)만이 입학 가능한 지금의 상태에서 7%(14명 중 1명)가 입학 가능한 상태가 된다면 학부모들이나 학생들이나 맹목적 입시 준비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사는 과정으로 공부를 대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핀란드와 우리나라의 차이는 학부모의 교육열이 아니라 잘못된 교육 환경의 차이이고, 이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고 유지하는 변화 가능한 조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서울대학교 입학정원을 대폭 확대한다면

인구 100만의 수도 헬싱키에는 헬싱키대학 이외에도 학생 2만 명의 탐페레대학과 1만 8천 명의 알토대학이 있으며, 이들 세 국립 종합대학 간 서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점 분야에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헬싱키에 있는 세 개의 국립종합대학교 전체 입학생 수와 인구 차이를 고려한다면 이는 마치 서울대학교 입학생을 매년 7만 명 정도 뽑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수능 응시자의 15% 정도가 입학할 수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지금 수준의 강제된 교육경쟁과 숨 막히는 사교육 열풍을 유지할까? 아닐 것이다.

교육경쟁을 완화시키기 위해 서울대학교 입학정원을 대폭 확대한다면 수도권을 향한 인구집중, 이에 따른 국토의 불균형 발전 심화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존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방 소규모 대학의 위기는 확대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국립대학교의 완전한 통합과 이를 통한 지방 소재 국립대학의 역할 확대일 것이다.

이번 포럼에서도 토론자 중 한 명(경희대 김종영 교수)이 제안하였듯이 10개의 서울대학교를 전국에 만든다면, 그래서 지금의 서울대학교 수준의 대학이 전국에 균형 있게 분포한다면,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발악은 핀란드 학부모들의 건전한 교육열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필자가 이미 주장하였던 서울대학교 학부의 폐지와 유사한 효과를 거두리라고 본다.

문제는 10개의 지방 소재 서울대학교를 어떻게 만드느냐일 것이다. 그런데 해결해야 할 과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두 가지 과제가 놓여 있다.

하나는 졸업장에서의 차이 소거를 통한 학벌사회와의 결별 선언이다. 10개 국립 서울대학교의 명칭을 하나로 통일하고, 졸업장에 대학의 소재지 정보가 기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울대학교라는 명칭을 버리고 제3의 단일 국립대학교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선행 조건이 될 것이다. 서울대학교라는 명칭이 지닌 프리미엄을 인정한 채 지방에 있는 현재의 국립대학교들을 서울대학교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과제는 모든 국립대학교들의 교육여건을 동일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한 혁명적 변화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나라 교육에서 정부의 의도가 관철된 사례가 없었다는 세스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과감하고 혁명적인 조치를 통해 우리의 역대 정부가 지닌 그런 불명예스런 이미지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지표를 보자. 현재 서울대학교의 경우 교수 1인당 학생수가 13명 내외인 데 반해, 지방 국립대학교의 경우에는 그 두 배가 넘는 30명 수준이다. 균등한 교육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 무엇이 만든 차이일까?

현재 서울대학교에 대한 1년 정부지원 예산이 5천억 원에 이르는데 반해 나머지 지방 국립대학교에 대한 지원금은 1500억 원 수준이다. 이런 불균형 속에서는 결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가 10개의 서울대학교 체제일 것이다.

공교육 정상화는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

다시 핀란드 이야기를 하면 수도에 소재하는 가장 큰 헬싱키대학과 지방에 소재하는 여타 국립대학들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거의 동일하다. 정부지원금만으로 보면 오히려 지방 소재 국립대학교 학생 1인당 교육비가 더 높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대학교와 지방 국립대학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무려 3:1 수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부 지원금 차이가 만든 차별이다.

2021학년도 서울대학교에 대한 정부지원금은 5123억 원인데 비해 지방 국립대학교 중 학생 수가 서울대학교보다 많은 대학의 경우에도 2000억 원 이상을 받는 대학은 없다. 비슷한 학생 규모를 지닌 전북대학교의 경우 1518억 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차이와 차별은 다른 개념이지만 우리나라 교육에서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현실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 국립대학 간 정부지원금에서의 차등이다.

여기에 더해 공정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지표를 적용하여 대학을 평가하고, 이 평가 결과에 따라 다시 차별을 확대시키고 합리화시킨다. 70년 동안 반복해온 관행적 차별이다. 식민지 시대에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진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차별보다 결코 작지 않은 차별이다.

한국의 학부모와 핀란드 학부모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는 교육열이 아니라 바로 이런 차별의 존재 유무, 이런 차별에 대한 사회적 반응의 다름일 것이다. 차별에 둔감한 우리나라 학부모와 차별에 민감한 핀란드 학부모가 만든 차이일지도 모른다.

특별이라는 이름이 붙은 도시가 필요하고,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대학교가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오래된 낡은 의식이 유지시키고 있는 만들어진 전통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 사회 민주화의 완성을 위해 사라져야 할 식민지 멘탈리티이다.

2년 전 <한국교육 제4의 길을 찾다>라는 책을 쓴 이후 우리나라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었다. 지난 70년간 경험한 우리나라의 교육과 교육정책을 회고해 보면 공교육 정상화는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대학의 서열화를 해소하는 것이 왜 불가능하다고, 간혹 바람직스럽지 않다고까지 주장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우리 교육은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꾸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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