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네? 지원금 취소합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재일한국인 차별과 그 논리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유엔에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일본 정부가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는 게 22일 자 <교도통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작년 5월 일본 정부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대학생에게 최대 20만 엔(약 205만 원)을 지원하는 '학생지원 긴급 급부금' 제도를 실시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설립한 조선대학교의 재학생은 이 제도의 지원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대학교'가 아니라 '대학'으로 불린다. 일본 정부는 조선대학교가 일본 법률상의 대학이 아니라 '각종 학교'에 포함된다는 이유로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영어로는 Korean University로 표기되는 이 대학은 1956년 북한 정부의 자금으로 건립돼 처음에는 2년제로 운영되다가 2년 뒤 4년제로 전환됐다. 이 학교에는 2년제·3년제·4년제 과정과 대학원 과정이 있다. 대학원 과정까지 있으므로 누가 봐도 대학이지만 일본 정부는 각종 학교로 분류하고 있다. 엄연한 대학을 대학으로 분류하지 않고 합리적 이유 없이 각종 학교로 분류해 대학과 달리 대우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올 2월 유엔 인권문제 특별보고관 4명은 조선대학교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 것은 차별에 해당된다는 뜻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유엔은 "민족정체성을 촉진하는 교육에 대한 접근을 한층 어렵게 한다"며 차별의 시정을 '강하게 요구한다'고 표명했다. 유엔이 볼 때도 일본 정부가 조선대학교를 차별하는 것은 민족 문제 때문이었다. 이 학교가 대학의 요건을 갖추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지난 4월에 보낸 답신에서 '차별이 아니다'라는 뜻을 고수했다. 조선대학교는 대학이 아니라 각종 학교이므로 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게 일본 정부의 주장이다.
차원이 다른 차별
이민족 혹은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은 우리 한국 사회에도 존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겠지만,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은 차원이 다르다. 차별의 정도가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재일한국인들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차별을 받는지는 1955년 마루쇼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전쟁 휴전 2년 뒤인 그해 5월 12일 새벽 1시 20분경이었다. 도쿄에서 남쪽 해안을 따라 자동차도로로 2시간 거리인 시즈오카현 미시마시의 트럭 화물 취급소인 마루쇼 운송점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고이데 지요코라는 33세의 주인이 사망한 채로 발견된 것이다.
보름 뒤인 5월 27일 일본 경찰은 이 여성을 살해한 용의자로 재일한국인 트럭 운전사인 42세의 이득현과 일본인 조수를 체포했다.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에 이득현이 트럭을 몰고 근처를 운행했다는 게 이유였다. 1심 재판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2심과 최고재판소는 이득현의 항소 및 상고를 각각 기각했다.
증거도 없이 재일한국인을 살인범으로 몬 이득현 사건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공분을 일으켰다. 일본인들이 볼 때도 너무 황당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득현 후원회가 결성됐고, 일본에서는 '마루쇼 사건 후원회'가 구명운동에 나섰다.
구명운동에 힘입어 이득현이 가석방되기는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가석방은 1977년에 이뤄졌다. 한편 일본 법원은 재심 청구를 받아주지 않았다. 재심 청구를 위해 싸우던 중인 1989년 1월 2일 75세의 이득현은 후원자가 건네준 귤을 먹다가 호흡 곤란으로 질식사했다.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이지만, 일본인 후원자들은 사건 당시 제3의 장소에서 이득현을 목격했다는 증인을 찾아냈다. 또 고이데 지요코가 타살되지 않았다는 법의학 감정도 나왔다.
1978년 3월 3일 자 <경향신문> 기사 '득현씨 사건 새 증거를 제출'은 "이득현씨의 재심청구를 추진 중인 일본변호사연합회 인권옹호위원회는 최근 삿포로 의과대학 야소시마 노부노스케 교수로부터 '피해자의 주변 상황을 종합해볼 때 피해자는 살해된 것이 아니라 자살했다'는 새로운 법의학 감정을 얻어 이를 시즈오카 지방재판소 누마즈 지부에 새로운 증거로 제출하기로 했다"라고 보도했다.
일본 경찰이 처음부터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만만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붙인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만한 사건이었다.
한국인이란 이유로 채용 취소
조선대학교 같은 교육기관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고 이득현 같은 한국인을 특별한 증거도 없이 살인범으로 모는 등등의 차별 사례는 한도 끝도 없다. 이득현 사건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뜨겁던 시기에 발행된 1980년 12월 24일 자 <중앙일보> '70만 재일동포에 일제 때 못잖은 차별'은 "신성한 교육에서도 민족차별은 극심하다"며 이런 사례들을 소개한다.
취업에 관한 차별의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사건도 이 기사에 소개돼 있다. 히타치 입사시험에 합격했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입사를 거부당한 박종석 사례가 그것이다.
박종석은 히타치에 일하러 간 게 아니라 투쟁하러 간 셈이 됐다. 3년 6개월의 투쟁 끝에 회사 출근의 기회를 얻게 됐지만, 그는 그 뒤로도 계속 차별 철폐운동을 벌여야 했다.
그가 그런 운동을 벌인 것은 제2, 제3의 박종석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1의 박종석'이 회사에서 여전히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받아준 회사는 그에게 공정한 근무 여건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원이 아니라 투사로 살 수밖에 없었다.
세금 낼 것 다 내고 사회 곳곳의 온갖 허드렛일은 다 하면서도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재일한국인들은 이처럼 코로나19 같은 대재앙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진학과 취직에서 터무니없는 차별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를 몰고 운전할 때도 주변 어디선가 혹시라도 일본인이 죽지 않을까를 걱정하면서 살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램지어 교수, 위안부 이어 재일한국인도 왜곡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들의 일본 이민은 엄밀히 말하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이 만들어놓은 경제 환경으로 인해 식민지 한국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적지 않다. 그런 한국인들이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차별을 받고 있으니, 재일한국인 차별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이 빚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류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재일한국인들의 처지는 그들 자신의 선택과 기질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린다.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학 교수가 이런 생각의 '이론적 합리화'를 시도하고 있다.
작년 9월 유럽법경제학지(European Journal of Law and Economics)에 기고한 '사회적 자본과 기회주의적 리더십의 문제점: 재일한국인의 사례(Social capital and the problem of opportunistic leadership: the example of Koreans in Japan)에서 램지어 교수는 재일한국인들이 차별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들의 개인적 특성에서 규명하고자 했다.
램지어는 "한국인들은 1910년대에 일본으로 이민 가기 시작했다"면서 "그들은 가난하고 독신이고 남성이고 젊었으며 교육을 받지 못했고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해방 뒤에 귀환하지 않고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은 '더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갔다"면서 "그대로 머문 사람들 중에는 낮은 수준의 사회적 자본이 남아 있었다"고 학술적 표현을 써가며 재일한국인들을 폄하한다.
그는 재일한국인들이 주류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이유를 위생 상태나 범죄율뿐 아니라 '사상 문제'에서도 끄집어낸다. 1948년 제주 4·3항쟁 때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이들이 재일한국인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재일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거부감을 조장한 이유였다고 말한다.
4·3 이전부터도 한국인들은 극심한 차별을 받았고, 한국보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운동이 더 활발했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4·3항쟁 때 일본에 유입된 한국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재일한국인 차별이 극심해졌다는 엉뚱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램지어는 일본제국주의로 인해 한국인이 한국에 살 수 없어 일본으로 이민할 수밖에 없었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채, 일부 한국인들의 개별적 특성에서 재일한국인 차별의 명분을 끄집어내고 있다. 그가 독창적인 분석을 통해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냈다기보다는, 일본 주류 사회의 정서를 학문적으로 합리화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재일한국인 차별 역시 제국주의 침략 범죄의 산물이므로, 일본이 한일관계를 제대로 풀려면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는 물론이고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 문제 역시 해결해야 한다.
작년 5월 일본 정부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대학생에게 최대 20만 엔(약 205만 원)을 지원하는 '학생지원 긴급 급부금' 제도를 실시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설립한 조선대학교의 재학생은 이 제도의 지원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영어로는 Korean University로 표기되는 이 대학은 1956년 북한 정부의 자금으로 건립돼 처음에는 2년제로 운영되다가 2년 뒤 4년제로 전환됐다. 이 학교에는 2년제·3년제·4년제 과정과 대학원 과정이 있다. 대학원 과정까지 있으므로 누가 봐도 대학이지만 일본 정부는 각종 학교로 분류하고 있다. 엄연한 대학을 대학으로 분류하지 않고 합리적 이유 없이 각종 학교로 분류해 대학과 달리 대우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올 2월 유엔 인권문제 특별보고관 4명은 조선대학교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 것은 차별에 해당된다는 뜻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유엔은 "민족정체성을 촉진하는 교육에 대한 접근을 한층 어렵게 한다"며 차별의 시정을 '강하게 요구한다'고 표명했다. 유엔이 볼 때도 일본 정부가 조선대학교를 차별하는 것은 민족 문제 때문이었다. 이 학교가 대학의 요건을 갖추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지난 4월에 보낸 답신에서 '차별이 아니다'라는 뜻을 고수했다. 조선대학교는 대학이 아니라 각종 학교이므로 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게 일본 정부의 주장이다.
▲ 이타가키 류우타 도시샤대(同志社大) 교수가 30일 오후 일본 중의원 제1의원회관에서 열린 집회에서 문부과학성 관계자에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는 대학생을 지원하는 정책의 대상에서 재일조선대학을 배제한 것에 항의하는 성명을 전달했다. 이 성명에는 일본 교수 709명이 동참했다. 2020.11.30 ⓒ 연합뉴스
차원이 다른 차별
이민족 혹은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은 우리 한국 사회에도 존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겠지만,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은 차원이 다르다. 차별의 정도가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재일한국인들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차별을 받는지는 1955년 마루쇼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전쟁 휴전 2년 뒤인 그해 5월 12일 새벽 1시 20분경이었다. 도쿄에서 남쪽 해안을 따라 자동차도로로 2시간 거리인 시즈오카현 미시마시의 트럭 화물 취급소인 마루쇼 운송점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고이데 지요코라는 33세의 주인이 사망한 채로 발견된 것이다.
보름 뒤인 5월 27일 일본 경찰은 이 여성을 살해한 용의자로 재일한국인 트럭 운전사인 42세의 이득현과 일본인 조수를 체포했다.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에 이득현이 트럭을 몰고 근처를 운행했다는 게 이유였다. 1심 재판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2심과 최고재판소는 이득현의 항소 및 상고를 각각 기각했다.
증거도 없이 재일한국인을 살인범으로 몬 이득현 사건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공분을 일으켰다. 일본인들이 볼 때도 너무 황당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득현 후원회가 결성됐고, 일본에서는 '마루쇼 사건 후원회'가 구명운동에 나섰다.
구명운동에 힘입어 이득현이 가석방되기는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가석방은 1977년에 이뤄졌다. 한편 일본 법원은 재심 청구를 받아주지 않았다. 재심 청구를 위해 싸우던 중인 1989년 1월 2일 75세의 이득현은 후원자가 건네준 귤을 먹다가 호흡 곤란으로 질식사했다.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이지만, 일본인 후원자들은 사건 당시 제3의 장소에서 이득현을 목격했다는 증인을 찾아냈다. 또 고이데 지요코가 타살되지 않았다는 법의학 감정도 나왔다.
1978년 3월 3일 자 <경향신문> 기사 '득현씨 사건 새 증거를 제출'은 "이득현씨의 재심청구를 추진 중인 일본변호사연합회 인권옹호위원회는 최근 삿포로 의과대학 야소시마 노부노스케 교수로부터 '피해자의 주변 상황을 종합해볼 때 피해자는 살해된 것이 아니라 자살했다'는 새로운 법의학 감정을 얻어 이를 시즈오카 지방재판소 누마즈 지부에 새로운 증거로 제출하기로 했다"라고 보도했다.
일본 경찰이 처음부터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만만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붙인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만한 사건이었다.
한국인이란 이유로 채용 취소
▲ 2019년 3월 14일 후쿠오카 지방재판소 고쿠라 지부에서 열린 규슈조선고급학교 고교무상화 배제 취소소송 1심 판결에서 패소한 규슈조선학교 학부모들이 재판소의 부당 판결에 항의하고 있다. ⓒ 김지운
조선대학교 같은 교육기관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고 이득현 같은 한국인을 특별한 증거도 없이 살인범으로 모는 등등의 차별 사례는 한도 끝도 없다. 이득현 사건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뜨겁던 시기에 발행된 1980년 12월 24일 자 <중앙일보> '70만 재일동포에 일제 때 못잖은 차별'은 "신성한 교육에서도 민족차별은 극심하다"며 이런 사례들을 소개한다.
72년 4월 재일동포 3세 황진기 양(당시 15세), 77년 3월 한국인 2세 설청화 군(18)은 각각 무사시노고(高)와 후꾸이 공대에 합격했으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취소당했다.
취업에 관한 차별의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사건도 이 기사에 소개돼 있다. 히타치 입사시험에 합격했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입사를 거부당한 박종석 사례가 그것이다.
1970년 3월 아이치현립 벽남고를 졸업한 박종석군은 그해 11월 히타치사(社)의 입사시험에 합격, 채용 통지까지 받았으나 박군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안 회사 측은 일방적으로 박군의 입사를 취소했다. 박군은 70년 12월부터 74년 6월까지 3년 6개월에 걸친 법정 투쟁을 전개, 끝내 승소했다.
박종석은 히타치에 일하러 간 게 아니라 투쟁하러 간 셈이 됐다. 3년 6개월의 투쟁 끝에 회사 출근의 기회를 얻게 됐지만, 그는 그 뒤로도 계속 차별 철폐운동을 벌여야 했다.
그가 그런 운동을 벌인 것은 제2, 제3의 박종석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1의 박종석'이 회사에서 여전히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받아준 회사는 그에게 공정한 근무 여건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원이 아니라 투사로 살 수밖에 없었다.
세금 낼 것 다 내고 사회 곳곳의 온갖 허드렛일은 다 하면서도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재일한국인들은 이처럼 코로나19 같은 대재앙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진학과 취직에서 터무니없는 차별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를 몰고 운전할 때도 주변 어디선가 혹시라도 일본인이 죽지 않을까를 걱정하면서 살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램지어 교수, 위안부 이어 재일한국인도 왜곡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들의 일본 이민은 엄밀히 말하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이 만들어놓은 경제 환경으로 인해 식민지 한국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적지 않다. 그런 한국인들이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차별을 받고 있으니, 재일한국인 차별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이 빚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류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재일한국인들의 처지는 그들 자신의 선택과 기질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린다.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학 교수가 이런 생각의 '이론적 합리화'를 시도하고 있다.
작년 9월 유럽법경제학지(European Journal of Law and Economics)에 기고한 '사회적 자본과 기회주의적 리더십의 문제점: 재일한국인의 사례(Social capital and the problem of opportunistic leadership: the example of Koreans in Japan)에서 램지어 교수는 재일한국인들이 차별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들의 개인적 특성에서 규명하고자 했다.
램지어는 "한국인들은 1910년대에 일본으로 이민 가기 시작했다"면서 "그들은 가난하고 독신이고 남성이고 젊었으며 교육을 받지 못했고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해방 뒤에 귀환하지 않고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은 '더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갔다"면서 "그대로 머문 사람들 중에는 낮은 수준의 사회적 자본이 남아 있었다"고 학술적 표현을 써가며 재일한국인들을 폄하한다.
그는 재일한국인들이 주류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이유를 위생 상태나 범죄율뿐 아니라 '사상 문제'에서도 끄집어낸다. 1948년 제주 4·3항쟁 때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이들이 재일한국인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재일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거부감을 조장한 이유였다고 말한다.
4·3 이전부터도 한국인들은 극심한 차별을 받았고, 한국보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운동이 더 활발했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4·3항쟁 때 일본에 유입된 한국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재일한국인 차별이 극심해졌다는 엉뚱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램지어는 일본제국주의로 인해 한국인이 한국에 살 수 없어 일본으로 이민할 수밖에 없었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채, 일부 한국인들의 개별적 특성에서 재일한국인 차별의 명분을 끄집어내고 있다. 그가 독창적인 분석을 통해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냈다기보다는, 일본 주류 사회의 정서를 학문적으로 합리화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재일한국인 차별 역시 제국주의 침략 범죄의 산물이므로, 일본이 한일관계를 제대로 풀려면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는 물론이고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 문제 역시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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