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부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잡지
어린이 잡지 '고래가그랬어' 안현선 편집장을 만나다
밝은누리 아카데미 강좌 청년학당에서 수강생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강의 후기용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기자말]
준비호와 창간호 사이에서
▲ 개성 넘치는 창간호와 초창기 발행호 표지 ⓒ 청년학당
잡지를 펴낼 당시 준비호를 냈다가 어린이들의 반응을 보고 아차 싶어 내용, 구성, 편집까지 모두 바꿔 창간호를 낸 사연을 말씀해주셨다. 준비호는 전형적인 교양지 형태의 깔끔한 편집과 구성으로 나왔다. 어른들은 무척 흡족해했으나, 정작 어린이들은 외면했다고 한다.
어른이 보기에는 어수선하고 너무 화려해 보이는 구성이나 그림일지라도 어린이들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과감한 시도를 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창간호는 준비호와 정반대의 평가가 있었다. 준비호와 창간호 사이에서 경험한 일 덕분에 지금까지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면 된다는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잡지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독자와 함께 만드는 잡지
▲ 고래가그랬어 독자엽서우편으로 접수 받는 독자엽서. 잡지에 끝 쪽에 제공되는 우편엽서에 자유롭게 적고, 그려서 우체통에 쏙 넣으면 된다. ⓒ 청년학당
<고래가그랬어〉 책등에는 매호마다 '고그토론' 주제가 나와 있다. 잡지를 만드는 이들, 잡지를 읽는 어린이들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꼭지다. 고그토론은 어린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정돈해서 표현하는 지면이다.
토론회에 참여하고 싶은 어린이가 신청을 해서 당첨되면 당첨된 이가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현장에서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와 관련한 여러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안현선 편집장님이 직접 고그토론 현장에 찾아가 취재를 하는데, 편집장님이 토론에 개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저 최소한으로 진행할 뿐이고, 잘 듣고 잘 정리해서 실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생각과 목소리가 오롯이 담긴 지면이다.
독자엽서와 고그글마당 또한 〈고래가그랬어〉의 참여 공간이다. 고래가그랬어에 하고 싶은 말이나 고그토론을 읽고 든 생각을 자유롭게 적어서 보낼 수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멋진 그림 솜씨를 뽐낼 수도 있다. 우편이나 누리편지(이메일)로 접수된 독자엽서는 날것 그대로 〈고래가그랬어〉 지면에 실린다.
고래동무는 고래가그랬어 출판사의 든든한 연대단체이다. 잡지 구독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어린이들도 차별 없이 교육과 문화를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2005년 만들어진 비영리 사회적 구독 단체인데, 이 단체에서는 후원금을 모아 〈고래가그랬어〉 책을 구매해서 지역아동센터, 보육원, 농어촌 분교 등 2500여 곳에 보낸다.
'고래이모'와 '고래삼촌'들의 연대로 매달 잡지를 받아볼 수 있는 어린이들이 9만여 명이라고 한다. 〈고래가그랬어〉를 보고 자란 어린이가 어느새 20대가 되어 고래동무가 된 소식을 접했을 때 무척 감격스러웠다는 편집장님의 말씀이 왠지 뭉클했다.
다양한 감각 일깨우고 자기 취향 찾도록 돕는 것
▲ 고래가그랬어 안현선 편집장(왼쪽에서 두 번째) ⓒ 청년학당
<고래가그랬어>는 지면의 70퍼센트가 만화로 되어 있다. 창간 초기와 달리 지금은 만화에 대한 위상이 달라지면서 웹툰 시장이 활성화되었고, 콘텐츠를 담아내는 매체도 다양해졌다. <고래가그랬어>도 여러 가능성과 방향을 열어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현재는 종이가 줄 수 있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다.
웹툰으로는 담을 수 없는 컷 만화 감성, 펼침면으로만 담을 수 있는 글과 그림, 한 장씩 책장을 넘기며 몰입하는 경험을 주기 위해서이다. 매호 표지도 전문 그림작가의 손길로 태어난다. 풍성한 내용과 더불어 다양한 미적 감각을 제공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그밖에도 과학이나 문화, 사회 현실을 다룬 이야기, 수어를 알려주는 지면 등 다양한 배움을 통해 여러 가지를 느끼고, 생각해볼 수 있도록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잡지의 매력은 다양한 선택지를 줄 수 있다는 점이에요. 아이들이 전체 내용을 정독하며 읽기보다는 자기 취향에 맞는 것을 찾아가는 형태로 읽었으면 좋겠어요."
소통을 위한 글쓰기
〈고래가그랬어〉는 어린이를 부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어린이는 스스로 생각하며 자기 선택을 해나가는 어엿한 사회 구성원이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는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쓰고 읽는 사람 간에 정답게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어린이 교양지를 표방하면서 어른이 제시한 기준에 맞춰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 참여를 이끌어내려고 했다면 〈고래가그랬어〉가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아마 어린이들이 읽고 싶지 않은 학습지로 남아 있거나, 일찌감치 자취를 감추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탐방을 통해 "내 할 말만 하지 않고 상호 소통하는 것"이 삶에서 시작하는 글쓰기의 기본 원칙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밝은누리 누리집(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