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하라!" 파묘 시위 연례행사 대전현충원, 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대전현충원 ①] 40년간 1백만평에 14만 안장... 일부 인사들로 갈등
한 국가의 국립묘지는 교과서와 같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들의 삶을 재조명하다 보면 그 나라의 역사와 정신을 알 수 있다. 국립대전현충원은 1982년부터 군인, 경찰관, 국가원수, 애국지사 등이 안장돼 있다. 이에 오마이뉴스와 시민미디어마당 사회적협동조합은 대전현충원 안장자들을 살펴보고 현충원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편집자말]
호국영령과 순국선열들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성스런 공간에서 왜 이들은 매년 집회와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국립대전현충원은 어떤 공간일까? 어떤 인물들이 묻혀있을까? 여러 물음들에 답하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 반민족행위자 묘 이장촉구 집회제66회 현충일인 6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앞에서 광복회 대전지부 등 대전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행위자 묘 이장 촉구 시민대회'를 열고 있다. ⓒ 우희철
국립대전현충원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는 국가보훈처 산하 국립묘지로 1982년부터 사병·장교·경찰관, 국가원수, 애국지사, 국가사회공헌자, 장군, 의사상자 및 순직공무원 등이 안장돼 있는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의 추모공간이자 인물로 보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교육장이다. 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를 보면 서울 동작동에 설립되었던 국립묘지의 안장능력이 한계에 이르게 되자, 1974년 12월 16일 중부지역에 국립묘지를 추가로 설치하라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추진되기 시작했고, 1976년 4월 14일 현재의 위치로 결정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국방부는 1976년 5월 11일 지방국립묘지 설치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1979년 4월 1일부터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1985년 11월 13일 준공했다. 동아건설과 공영토건이 주 시공사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1985년 11월 13일자 기사를 통해 "총 1백여만평의 대지에 19만평을 묘역으로 조성, 14만여구를 안장할 수 있다. 43여만 평 대지에 5만4천여 국가유공자가 잠든 동작동 국립묘지보다 2.5배 큰 규모"라고 소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의 현충시설로는 현충탑, 현충문, 호국분수탑, 홍살문, 충혼당 등이 있고, 임시 안치실인 봉안관, 안장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가 열리는 현충관, 군의 각종 전투장비를 전시하고 있는 야외전시장인 보훈장비전시장 등이 있다. 또 1667㎡ 면적의 2층 건물로 나라사랑 교육 중심의 전시가 이루어지는 보훈미래관을 현충시설로 두고 있다. 또한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보훈가족쉼터, 유족대기실, 야생화공원, 보훈산책로 등을 갖추고 있다.
▲ 대전현충원 현충탑대전현충원 중앙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가 숨진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현충탑이 세워져 있다. ⓒ 우희철
국립대전현충원이 자리한 대전시 유성구 갑동 일대는 동쪽으로 지족동, 서쪽으로는 계룡산의 한 줄기를 시계(市界)로 공주시 반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유성-삽재고개 정상간 도로인 현충원로를 경계로 하여 덕명동과 접해 있고, 반석동이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쪽의 갑하산-신선봉 능선 사이 두리봉 아래에 현충탑이 세워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우산봉, 동쪽으로는 지족산과 왕가봉, 남쪽으로는 옥녀봉과 박산이 있어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다.
전체 면적은 330만9553㎡(99만9천평)으로 10만663기를 안장할 수 있다. 1982년 안장을 시작한 이래 2021년 4월말 현재 9만5929기(안장률 95.3%)를 안장했고 4만1281기의 위패를 봉안했다. 안장 40주년이 되는 내년이면 만장이 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2019년 5월에 봉안당인 '충혼당'을 착공해 2년 만인 2021년 5월 4일 개관했다. 충혼당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면적 9천647㎡ 규모로 유골함 4만9천기를 수용할 수 있는 봉안동과 40개 제례실, 안장식장, 휴게공간 등을 갖춰 향후 40여 년은 더 봉안이 가능해졌다.
안장의 역사를 살펴보면 1982년 8월 27일 사병이 최초로 안장되면서 묘역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1985년 2월 28일부터 장교와 경찰관이 안장됐고 1986년 11월 7일 장관급 장교, 1987년 4월 6일 애국지사, 1989년 10월 23일 국가사회공헌자, 1994년 12월 6일 소방관이 각각 최초로 안장되었다.
이후 국립대전현충원은 2006년 1월 30일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소관부처가 국방부에서 국가보훈처로 바뀌었다. 2006년 10월 26일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최규하 전 대통령이 이곳에 묻혔고, 2007년 4월 26일부터 의사상자가 안장되기 시작했다.
▲ 대전현충원 묘역 대전현충원에는 군인, 경찰관, 애국지사, 국가사회공헌자, 소방관, 의사상자 등 10만여명의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 우희철
2010년 4월 29일에는 천안함 46용사 합동안장식이 거행됐고 제2연평해전 전사자 합동묘역,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 합동묘역이 2015년 9월과 11월에 각각 조성되기도 했다. 집배원으로는 고 차선우씨가 2011년 처음으로 이곳에 묻혔고, 2014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묘역이 조성됐다. 2017년에는 장교와 사병을 통합 안장했으며, 2020년부터는 장군도 장병묘역에서 영면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씨앗,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이 와중에 논란의 인물들이 묻히게 되면서 대전현충원은 갈등의 장소로 떠오른다. 친일반민족행위에 연루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 김창룡 전 특무대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 밀정으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 김구 선생을 암살한 배후로 밝혀지기도 했다.
독립군 토벌대인 만주군 상위의 간도특설대 출신 김석범, 송석하, 신현준 등과 일본군 중좌 출신 백홍석, 일본군 대위 출신 유재흥 이형근도 대전현충원에 있다. 최근에는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는 과정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대전현충원 안장은 더욱 큰 논란거리로 부상됐다.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꼽히는 유학성, 5공비리의 주역 안현태, 주체사상 창시자 황장엽 등도 논란의 인물들이다.
시민단체들은 이를 두고 "호국보훈의 성지라는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보수단체에서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한다.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시사한다.
대전현충원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자 호국보훈의 다양한 교육의 장으로 운영하기 위해 '열린 현충원, 밝은 현충원'을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현충원이 갈등과 싸움의 장에서 벗어나 진정한 호국보훈의 성지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 홈페이지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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