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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원피스를 입고 나갔더니 퀴어퍼레이드였다

[서평] 정세랑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등록|2021.06.29 10:04 수정|2021.06.29 10:04
제22회 서울퀴어문화축제의 대표 행사인 서울퀴어퍼레이드가 27일 서울 중구 숭례문 인근 광장에서 열렸다. 코로나19 방역 수칙에 따라 10인 이상 집회가 불가능해, 각 6명으로 구성된 6개 팀이 수백 미터 간격을 둔 채 퍼레이드를 진행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어디선가 불쑥 보수 기독교 진영이 튀어나와 행패를 부리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소규모 퍼레이드여서 그런지 다행히 방해자들은 등장하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쯤 '열린 광장에서 안전하게 스스로일 수 있는 날'이 이 땅에도 찾아올까?
 
기분 좋은 진동음이 5층까지 닿았고 창밖에는 밝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무슨 축제인지 몰라도 축제에는 무지개 옷이지, 하고 꺼내 입고 나갔더니 심지어 퀴어 퍼레이드였다. 그렇게까지 우연으로 TPO에 맞춰 옷을 입은 적은 인생에 또 없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곧바로 축제에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그 퍼레이드는 완벽했다. 건물마다 지지의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바리케이드도, 혐오 세력도 없이 열린 광장에서 모두가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플래카드는 종교 상징으로 쓴 '관용(Tolerance)'이었다. -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159쪽

차멸과 모멸을 겪으며 깎여나가지 않는 세계 
 

▲ 정세랑 작가가 퀴어퍼레이드에서 만난 플래카드 ⓒ 정세랑


소설가 정세랑은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위즈덤하우스)에서 우연히 참가하게 된 독일 뮌헨의 퀴어 퍼레이드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의 퀴어 친구들을 떠올렸고, 몇 년 동안 그날을 곱씹게 되었다.
 
왜 한국에서는 칸막이 없는 축제가 아직 불가능한지를, 어떻게 하면 가능해질지를 말이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차별과 모멸을 겪으며 깎여나가지 않는 세계를 절실히 바란다. -160쪽

정세랑은 넷플릭스 드라마로 방송되어 인기를 끈 <보건교사 안은영> 등의 작품으로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핫한 SF 작가이다.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정세랑의 첫 에세이인데, 여행이 멈춰버린 시대에 9년 만에 완성한 여행 에세이다.
 
어쩌다가 여행 에세이를 9년째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종종 소설보다 뒤에 붙은 '작가의 말'이 재밌다는 말을 들어서 에세이도 쓸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예상과 달랐다. 쓰다가 멈추고 쓰다가 지우고 쓰다가 고치며 시간이 흘러버렸다. -8쪽
 

▲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 허형식


밖으로 드러난 형태는 여행 에세이지만, 정세랑은 여행을 싫어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뉴욕까지 날아가고, 응모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자동응모 이벤트에 당첨되어 런던에도 가고, 남자친구의 유학을 따라 독일에도 간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이런저런 이유를 책에 투덜투덜 털어놓지만, 그 투덜거림 속에 같은 지구인으로서 살아가는 고민이 들어나 깊은 여운을 준다.
 
하와이는 아름다웠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기적적으로 형성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태계는 눈 돌리는 곳마다 강렬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아주 취약한 것이기도 했다. 하와이 사람들이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지키려고 해도 다른 지역 사람들이 엉망으로 살면 그대로 망가질 수밖에 없는 종류의 취약함 말이다. 그래서 하와이를 사랑하게 된 나는 결심했던 것이다. 하와이에 되도록 가지 않겠다고. 제주도를 사랑하면 제주도에 너무 자주 가서는 안 되듯이. 하와이로 은퇴하겠다는 농담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396쪽

여행을 즐기면서도, 나의 발길이 그곳을 망치지는 않는지 고민하는 작가의 시선에서 독자들은 다시 한 번 왜 지금 독자들이 정세랑의 글을 사랑하는지 깨닫는다. 작가는 어느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속속들이 시선을 건넨다.

저자는 뉴욕 지하철을 타며 터무니없이 모자란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보며 2001년 한국 오이도역에서 발생한 리프트 사고 이후 시작된 장애인 차별 철폐 운동가들의 성과를 떠올리고(49쪽),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는 출발 자체가 제국주의적일 수밖에 없었던 역사와 문명의 일그러짐에 불편해한다.

그러다가도 어느 나라 어느 박물관에 가도 있는, 점토로 만든 통통한 새들을 좋아한다고 고백(69쪽)하고, 점토가 남으면 비둘기나 오리 같은 것을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에 인류의 본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72쪽)에 이르기도 한다.

존중의 경험을 품을 수 있는 여행을 꿈꾸며

여행이다 보니 정세랑의 여행기에도 아찔한 순간이 있다.
 
L과 오전에 함께 집을 나서 거리를 걸어갈 때였다. 공사 현장 곁을 스쳐 지나가는데, 갑자기 L이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멀쩡하게 걷던 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여서 이게 무슨 일인가 당황했고, 알고 보니 공사 현장의 인부들이 우리 두 사람을 향해 굉장히 불쾌한 말들을 던진 것이었다. 섹시 아시안 걸 어쩌고 하는 단어들이 들렸던 듯도 한데 나는 그 대상이 우리일 줄은 상상도 못 하고 흘려버렸다. 헐렁한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기에, 성추행은 피해자의 옷차림과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굳이 또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내내 불법 촬영 같은 음습한 방식의 여성 혐오를 주로 접하다가 그렇게 직접 발화되는 미국식 여성혐오를 접하니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81쪽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최근 빈번히 등장하는 '캣콜링'(길거리에서 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언어적·육체적·시각적 성희롱)을 직접 겪은 것. '캣콜링은 신체적인 상해를 입히는 종류의 폭력은 아닐지 몰라도, 매일 겪으면 사람을 조금씩 갉아먹을 것 같은 종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캣콜링은 그냥 말에서 그치지 않고 빈번하게 폭행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드물게 살인으로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정세랑이 걸었던 뉴욕, 아헨, 오사카, 런던, 타이베이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우리가 언젠가 한 번쯤 걸었던 그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은 길을 걸어도 어떤 시선으로, 어떤 필터와 렌즈로 보냐에 따라 특별해진다.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가 종식되면 떠날 미래의 여행길에는 이 책의 제목인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신조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싶다. "21세기가 끝내 모두가 받아 마땅한 존중을 누리는 시대가 되길, 만난 적 없는 이들이 모멸 대신 안전을 얻길, 걸음걸음마다 바라(83쪽)"는 그런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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