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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축적, 그 물질적 인내심

[갤러리에서] 김병구 작가, 갤러리 앨리스에서 초대개인전 '축적의 시간' 열어

등록|2021.07.17 17:41 수정|2021.07.17 17:41
  갤러리에서
마띠에르 기법, 팔레트나이프페인팅, 임파스토 기법 등으로 간단명료하게 작품해설을 마치기에는 김병구 작가의 '축적의 시간'은 시공간적 장엄함이 두텁다.

전시실 조명의 방향 아래에 놓인 작품의 높은 선들은 담 또는 만리장성같은 그림자를 새로 그려 넣는다. 이 굳건한 선들은 격자무늬였다가 깊이 패인 흔적으로 달려 나가 어느덧 화성의 메마른 골짜기에 도달한 듯 생경하다. 작가는 노인의 손 또는 두껍게 갈라져 세월을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는 고목의 표피를 이야기하지만 많은 감상자들은 맨해튼 같은 대도시의 상공에서 바라 본 도시의 복잡한 구조 또는 이름 모를 행성의 태곳적 지형을 떠올린다.

'축적의 시간'은 곧 '시간의 축적'이 된 듯하다. 작가는 오랫동안 사용하던 붓 대신 팔레트나이프를 들고 물감의 질감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질감의 변화과정을 창조했던 것 같다. 이 과정은 캔버스의 평면성을 거역하며 중력을 거스르게 될 구조물을 성립시키는 것으로 인내심, 집요함의 시간들이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쏜살같이 지나는 시간일 지라도 작가의 팔레트에 녹아들면 인내를 짓누르는 중력으로 바뀌는 화학작용이라도 일으킬 것이다.

작품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축적의 시간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선 김병구 축적의 시간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선 53*45.5cm ⓒ 김병구


  
  

축적의시간축적의시간 2020-08 162x130cm ⓒ 김병구



'축적의 시간 2020-08'. 나 같은 고도근시를 가진 감상자는 안경을 벗고 두 눈을 작품에 거의 닿을 듯이 밀착시켜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보는 것이 가능하다. 단단하게 굳은 물감은 조명에 반사되는 밝은 굴절부분들로 인해 여전히 액체에 가까운 물성을 지닌 것처럼 반짝인다. 멀리서 볼 때 흰색이 아닐까 생각했던 작품의 한 가운데에는 녹색, 분홍색, 남색, 노란색이 서로를 숨기면서 켜켜이 쌓여 있고 다만 그 최상층을 흰색이 마무리하면서 전체적으로 밝은 색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캔버스의 모든 면이 두터워지는 것이 아니라 굵은 실처럼 나이프로 쌓아 올려진 네모난 틀들 덕택에 깊은 바닥과 솟아오른 벽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거대한 세상의 버드뷰같은 생각이 든다.

최상층을 기록하는 흰색은 놀랍게도 먼저 쌓아올려진 색을 덮어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 끌어안아 여러 가지 색깔들의 탑의 형성을 돕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프가 지나간 세밀한 흔적들은 고된 시간의 경과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시간은 고통일 수도 있었다.

또 다른 작품을 본다.
 

사유의 공간사유의 공간 91X117cm ⓒ 김병구



'사유의 공간'은 조금 더 단순화된 화면구조를 보여준다. 거대한 힘의 무게를 분산하는 강직한 가로선들이 협력관계처럼 가지런히 중력에 맞서 정렬해 있다. 붉은 바탕과 같은 선들은 한겨울 치운 눈을 쌓아 올린 듯 자연스런 스카이라인을 가지고 있으며 간혹 화폭을 가로지르는 선들만이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처럼 난장을 허용한다. 그렇더라도 질서는 강고하게 느껴진다. 무게와 질서 그리고 엄숙한 위트가 절정이다.

갤러리앨리스의 분할된 벽면을 큼직하게 가로막는 김병규작가의 작품들은 거리에 따라 너무 다르게 보여 진다. 하물며 컴퓨터 화면이나 핸드폰 화면을 통해서 보이는 작품들은 밋밋한 평면을 적당한 색상으로 칠한 말끔하지만 건조한 작품처럼 느껴진다.

조명과 거리에 따른 시각의 오묘한 반응에 의한 감상만이 김병규 작가의 작품이 왜 '축적의 시간'인지 통렬히 깨닫게 될 듯 하다. 시간과 싸우는 작가. 오히려 작가는 흐르는 세월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나이보다 젊어 보이게 하는 미소년의 동안은 축적하는 시간이 가져다 준 행운이 아닐까?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수상, 다수의 국제전 출품 등을 하였으며 이번 '축적의 시간'展으로 갤러리앨리스(광명시 가학동)에서 7번째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다.

작품전시는 8월 1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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