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시민권자 됐으니 한국을 떠나라? 이게 최선입니까
[주장] 복수국적 허용하지 않는 국적법, 이젠 손볼 때가 됐다
영국에 처음 온 지 31년이 넘은 지난 7월 22일, 나는 우여곡절 끝에 영국시민권자가 됐다. 하지만 동시에 대한민국 국적 상실을 앞둔 난처한 처지가 됐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결과적으로 국적을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는 한국 법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
영국 시민권자가 되기까지
1990년 4월, 나는 영국 버밍엄에 있는 우드부룩 퀘이커 연구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해 7월까지 공부한 뒤 9월 영국 에섹스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해 학사·석사학위를 마쳤다. 1997년 4월, 나는 영국 쉐필드대학교 박사과정 중에 만난 한 영국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다음해 우린 영국에서 결혼했고, 그해 말 나는 '함석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난 영국영주권을 얻었다. 그동안 영국에서 태어난 1남 1녀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200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1년 나는 국영문판 <함석헌 평전>을 출간했고 국문판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나는 과거사 정리 기관인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 그리고 반부패조직인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와 한국투명성기구 등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아내는 피부암에 걸렸다. 한국의 뜨거운 여름을 아내의 피부가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사는 아내에게 살고 싶으면 영국에 돌아가 살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이들도 한국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있었다.
깊은 고민 끝에 2008년 12월 한국생활 8년 만에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영국으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 끝나고 약 2~3년 뒤 영국에서 가족과 합류하겠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2010년 4월,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진실화해위 위원장 체제에서 난 쫓겨났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합류하고자 한 우리 가족에게 영국 정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보냈다. 비록 내가 영국 영주권자였지만 영국을 2년 이상 떠나 있었기에 영주권이 취소됐다는 통보였다. 영국 변호사들은 내게 영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선 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여 승소해야 한다고 했다. 법정 다툼을 시작하자 영국 정부는 나의 영국 입국을 아예 불허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서 가족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도 내 한국에서의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2011년 3월, 나는 <함석헌 평전>을 쓴 지 10년 만에 그 내용을 대폭 보강해 개정판을 펴냈다.
3년여의 시간이 흐른 2013년, 우리 부부는 영국 정부를 상대로 한 법적 투쟁에서 영국 정부가 내놓은 몇 가지 조건을 전제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영국 정부가 내건 조건은 1999년처럼 내가 영주권이 아닌, 2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임시배우자 비자를 받고 영국에 들어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 배우자' 비자 소지자는 영국정부로부터 실업수당, 병가수당, 구직수당 등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이 판결 이후 내 몸은 21세기 영국 사회를 살았지만, 법적 지위는 사회복지가 전혀 없는 19세기 영국 사회에 살았다. 게다가 난 유럽연합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영국 직장에서 정기적으로 내는 국가보험료 외에 1년에 약 100만원가량의 국가보험료를 추가로 더 내야 했다. 이런 사연을 거쳐 난 2013년 12월, 5년간의 이산가족 생활을 마치고 영국에 있는 가족에 간신히 합류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20년 11월, 나는 영국 영주권을 다시 회복했다. 영국 영주권을 처음 받은 해가 1999년이었으니까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 부부는 물론 가족들, 아이들까지 모두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아이들은 영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 중 법정에 나가 '아버지가 보고 싶고 함께 살고 싶다'면서 눈물어린 증언을 하기도 했다. 내가 법정 투쟁을 벌인 건 '영국 신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과 그저 조용히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필수불가결의 절박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또다시 마주한 난관
2020년 내가 영국 영주권을 회복했을 때, 우리 부부는 향후 이런 일이 또 반복될 수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아예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영국시민권을 신청했고 올해 7월 22일, 영국에 처음 온 지 31년 만에 시민권자가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영국 국적을 받으면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다'는 통보를 주영 한국대사관으로부터 받았다. 나는 대사관에 '지난해 환갑이 지났으니 4년 후 65세가 되면 복수국적을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65세 이상 복수국적 허용은 무조건 65세 이상에 대해 복수국적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아니니 혼란 없으시기 바랍니다. 외국 국적으로 귀화한 자는 당연히 국적상실신고를 하셔야 하며, 국적상실자가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하여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고자 하는 경우 65세 이상이면 국내에서 국적회복업무를 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내가 여생을 한국에서 살지 않으면 65세가 넘어도 복수국적을 받을 수 없다고 통보했다. 반면 영국 정부는 복수국적을 남녀 상관 없이 모두 인정한다.
나는 한국 정부의 국적법을 납득할 수 없다. 세계 대부분의 선진국은 복수국적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간 경쟁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복수국적은 경제적으로는 더 많은 투자를 끌어들이고 인구감소도 막는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또 원활한 문화교류를 위해서도 복수국적을 용인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걸 한국 정부는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복수국적 이슈에 있어서 병역 문제가 함께 거론되곤 한다. 남북 분단 상황이 문제라면 병역을 마치거나 면제받은 이에게는 복수국적이 허용돼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처럼 징병제를 실시하는 대만, 이스라엘, 독일, 핀란드 등은 모두 복수국적을 인정한다. 지금은 19세기처럼 쇄국정책을 실현하는 시대는 아니지 않나.
환갑이 넘은 내게 복수국적 유지 여부는 경제적으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그에 따른 애로사항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나무가 그 뿌리가 잘리면 제대로 자랄 수 없듯 역사를 상실한 인간은 올바른 삶을 누리기가 어렵다. 대한민국은 나의 뿌리이자 정체성이다. 나는 여전히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뼛속까지 한국인인 것이다.
최근 나는 복수국적 허용에 관한 건으로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했다. 현재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국적 상실의 순간에 놓인 나는 여전히 한국을 뿌리로 둔 활동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7월엔 해방 후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사건을 피해자 입장에서 다룬 책 <조작된 간첩들>을 펴냈다.
"악용 방지책 세우고, 복수국적자의 민간외교 역할 장려해야"
복수국적 인정이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동포들이나 한국에 사는 이들도 복수국적에 대한 인식 개선과 제도 개선을 바라고 있었다.
한 재미동포는 "어쩔 수 없이 외국 국적을 선택한 한국인을 그저 '변절자' 혹은 '검은머리 외국인'으로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외국 국적을 택하는 일은 비단 개인의 영리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삶의 터전이 한반도 내에 머무르지 않는 경우, 가족 때문에 직장 때문에 타지에서의 안정성 때문에...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한 호주동포는 "영주권자의 신분은 항상 불안정하다"라며 "어쩔 수 없이 호주 시민권자가 됐다.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잃었지만 나는 스스로 한국인이라 여긴다"라고 말했다.
제도 개선에 대한 목소리도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한 지인은 내게 "분단된 나라에서 '통일'이라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포용적인 시각으로 복수국적 허용 완화를 하되 악용 방지책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복수국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건 '공정'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갖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며 "국적은 다른 나라에 두고 한국의 복지 혜택만 누리는 소위 '얌체족' 사례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다 보니 그런 것 같다"라고 짚었다. 그러므로 "정부가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는 한편, 복수국적자가 양국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정책도 동시에 펼쳐야 한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영국 시민권자가 되기까지
▲ 2010년 나와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으로 살았다. 당시 가족들과 반가운 재회. ⓒ 김성수
1990년 4월, 나는 영국 버밍엄에 있는 우드부룩 퀘이커 연구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해 7월까지 공부한 뒤 9월 영국 에섹스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해 학사·석사학위를 마쳤다. 1997년 4월, 나는 영국 쉐필드대학교 박사과정 중에 만난 한 영국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다음해 우린 영국에서 결혼했고, 그해 말 나는 '함석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 나는 과거사 정리 기관인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 그리고 반부패조직인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와 한국투명성기구 등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아내는 피부암에 걸렸다. 한국의 뜨거운 여름을 아내의 피부가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사는 아내에게 살고 싶으면 영국에 돌아가 살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이들도 한국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있었다.
깊은 고민 끝에 2008년 12월 한국생활 8년 만에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영국으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 끝나고 약 2~3년 뒤 영국에서 가족과 합류하겠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2010년 4월,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진실화해위 위원장 체제에서 난 쫓겨났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합류하고자 한 우리 가족에게 영국 정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보냈다. 비록 내가 영국 영주권자였지만 영국을 2년 이상 떠나 있었기에 영주권이 취소됐다는 통보였다. 영국 변호사들은 내게 영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선 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여 승소해야 한다고 했다. 법정 다툼을 시작하자 영국 정부는 나의 영국 입국을 아예 불허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서 가족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도 내 한국에서의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2011년 3월, 나는 <함석헌 평전>을 쓴 지 10년 만에 그 내용을 대폭 보강해 개정판을 펴냈다.
3년여의 시간이 흐른 2013년, 우리 부부는 영국 정부를 상대로 한 법적 투쟁에서 영국 정부가 내놓은 몇 가지 조건을 전제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영국 정부가 내건 조건은 1999년처럼 내가 영주권이 아닌, 2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임시배우자 비자를 받고 영국에 들어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영국정부를 상대로 법적투쟁을 벌이자 영국정부는 아예 나의 영국 입국을 불허했다. 그래서 나는 영국을 방문할 수 없어서 가족들과 프랑스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 김성수
그러나 '임시 배우자' 비자 소지자는 영국정부로부터 실업수당, 병가수당, 구직수당 등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이 판결 이후 내 몸은 21세기 영국 사회를 살았지만, 법적 지위는 사회복지가 전혀 없는 19세기 영국 사회에 살았다. 게다가 난 유럽연합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영국 직장에서 정기적으로 내는 국가보험료 외에 1년에 약 100만원가량의 국가보험료를 추가로 더 내야 했다. 이런 사연을 거쳐 난 2013년 12월, 5년간의 이산가족 생활을 마치고 영국에 있는 가족에 간신히 합류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20년 11월, 나는 영국 영주권을 다시 회복했다. 영국 영주권을 처음 받은 해가 1999년이었으니까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 부부는 물론 가족들, 아이들까지 모두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아이들은 영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 중 법정에 나가 '아버지가 보고 싶고 함께 살고 싶다'면서 눈물어린 증언을 하기도 했다. 내가 법정 투쟁을 벌인 건 '영국 신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과 그저 조용히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필수불가결의 절박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또다시 마주한 난관
▲ 이산가족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필자 ⓒ 김성수
2020년 내가 영국 영주권을 회복했을 때, 우리 부부는 향후 이런 일이 또 반복될 수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아예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영국시민권을 신청했고 올해 7월 22일, 영국에 처음 온 지 31년 만에 시민권자가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영국 국적을 받으면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다'는 통보를 주영 한국대사관으로부터 받았다. 나는 대사관에 '지난해 환갑이 지났으니 4년 후 65세가 되면 복수국적을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65세 이상 복수국적 허용은 무조건 65세 이상에 대해 복수국적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아니니 혼란 없으시기 바랍니다. 외국 국적으로 귀화한 자는 당연히 국적상실신고를 하셔야 하며, 국적상실자가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하여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고자 하는 경우 65세 이상이면 국내에서 국적회복업무를 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내가 여생을 한국에서 살지 않으면 65세가 넘어도 복수국적을 받을 수 없다고 통보했다. 반면 영국 정부는 복수국적을 남녀 상관 없이 모두 인정한다.
나는 한국 정부의 국적법을 납득할 수 없다. 세계 대부분의 선진국은 복수국적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간 경쟁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복수국적은 경제적으로는 더 많은 투자를 끌어들이고 인구감소도 막는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또 원활한 문화교류를 위해서도 복수국적을 용인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걸 한국 정부는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복수국적 이슈에 있어서 병역 문제가 함께 거론되곤 한다. 남북 분단 상황이 문제라면 병역을 마치거나 면제받은 이에게는 복수국적이 허용돼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처럼 징병제를 실시하는 대만, 이스라엘, 독일, 핀란드 등은 모두 복수국적을 인정한다. 지금은 19세기처럼 쇄국정책을 실현하는 시대는 아니지 않나.
환갑이 넘은 내게 복수국적 유지 여부는 경제적으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그에 따른 애로사항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나무가 그 뿌리가 잘리면 제대로 자랄 수 없듯 역사를 상실한 인간은 올바른 삶을 누리기가 어렵다. 대한민국은 나의 뿌리이자 정체성이다. 나는 여전히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뼛속까지 한국인인 것이다.
최근 나는 복수국적 허용에 관한 건으로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했다. 현재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국적 상실의 순간에 놓인 나는 여전히 한국을 뿌리로 둔 활동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7월엔 해방 후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사건을 피해자 입장에서 다룬 책 <조작된 간첩들>을 펴냈다.
"악용 방지책 세우고, 복수국적자의 민간외교 역할 장려해야"
복수국적 인정이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동포들이나 한국에 사는 이들도 복수국적에 대한 인식 개선과 제도 개선을 바라고 있었다.
한 재미동포는 "어쩔 수 없이 외국 국적을 선택한 한국인을 그저 '변절자' 혹은 '검은머리 외국인'으로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외국 국적을 택하는 일은 비단 개인의 영리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삶의 터전이 한반도 내에 머무르지 않는 경우, 가족 때문에 직장 때문에 타지에서의 안정성 때문에...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한 호주동포는 "영주권자의 신분은 항상 불안정하다"라며 "어쩔 수 없이 호주 시민권자가 됐다.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잃었지만 나는 스스로 한국인이라 여긴다"라고 말했다.
제도 개선에 대한 목소리도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한 지인은 내게 "분단된 나라에서 '통일'이라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포용적인 시각으로 복수국적 허용 완화를 하되 악용 방지책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복수국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건 '공정'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갖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며 "국적은 다른 나라에 두고 한국의 복지 혜택만 누리는 소위 '얌체족' 사례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다 보니 그런 것 같다"라고 짚었다. 그러므로 "정부가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는 한편, 복수국적자가 양국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정책도 동시에 펼쳐야 한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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