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서 죽었다'... 죽은 자가 던진 검정고무신
[제주살이를 꿈꾸는 당신에게] 섯알오름에 얽힌 끔찍한 과거
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편집자말]
그런데 지난 주말, 4·3에 못지않은 학살극이 제주에서 벌어진 현장을 보고 왔다. 이른바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사건'이다. 이런 끔찍한 또 한 차례의 학살 만행이 자행됐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한 상태에서 현장을 맞닥뜨린 것이다. 일주일 전인 3월 9일에 쓴 일기다.
단산은 모슬포나 산방산 쪽으로 다닐 때마다 보게 되는 제법 큰 오름이다. 오름이지만 산으로 불리는 데다가 울퉁불퉁 험난하게 생겨 여느 오름과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 아직 가볼 엄두를 내보지 못했다. 마침 하늘빛 오름회에서 단산을 간다길래 열 일 제치고 따라나선 것이다.
이 산을 북쪽에서 보면 마치 박쥐 모양을 닮아서 바구미(박쥐의 옛말) 오름이라고 부르다가 바굼지오름이 됐고, 다시 한자로 광주리 단(簞)을 써서 단산(簞山)이 됐다고 한다. 듣고 보니 산의 형상이 동서로 날개를 편 박쥐를 많이 닮았다.
제주의 오름은 대부분 완만하게 둥글거나 삼각형 모양인데, 이 단산은 생김새가 완전히 다르다. 서쪽 기슭에서 정상을 거쳐 동쪽 기슭에 이르기까지 기다란 모습이고, 암봉이 날카롭게 솟아 있어 안전한 등산로를 안내할 사람이 없으면 위험해 보였다.
오름회 회장님을 선두로 단산을 올라갔다. 제주에 온 이래 처음으로 등산하는 기분이 들었다. 웬만한 오름은 산책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녔는데, 이 단산만큼은 육지의 험한 산을 타는 느낌이다.
막상 산에 오르니 보이는 것처럼 위험한 코스는 아니었다. 모두 무사히 정상에 올랐다. 여느 오름과 마찬가지로 역시 내려다보이는 경관은 뛰어났다. 남쪽으로 유채꽃과 밭작물들이 펼쳐지고, 그 너머 짙푸른 바다가 이어진다. 멀리 추사가 현판을 썼다는 대정향교도 보인다.
작은 오름 속에 숨은 역사
▲ 섯알오름 학살 암매장 현장1950년 음력 칠월칠석 새벽 계엄군이 예비검속자들을 집단학살한 후 돌무더기로 암매장한 현장 ⓒ 황의봉
다음 목적지는 섯알오름으로 송악산 바로 앞의 자그마한 동산이다. 송악산은 제주올레 10코스가 지나고 있어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유명한 오름이다. 제주올레 초창기에는 정상을 거치도록 코스를 만들었는데, 정상부 훼손이 심해 현재는 오르는 길이 막혔다. 대신 둘레길을 만들고 올레 코스도 이곳으로 우회하도록 했다.
특히 바닷가 쪽 절벽 위로 낸 길이 최고의 경치를 보여준다.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육지 손님이 오면 자주 안내하는 곳이 바로 이 송악산 둘레길이다.
이처럼 익숙한 송악산인데도 정작 지척에 있는 섯알오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송악산 둘레길을 다 돌아 나오면 자동차 도로가 나온다. 바로 그 건너편에 야트막한 오름이 보이는데 그게 섯알오름이었다. 높이 21m에 둘레 704m의 아담한 숲이다.
송악산 북쪽에 알오름 3개가 있는데 그중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섯알오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육중한 송악산 뒤로 꼬마 오름 3형제가 엎드려 있으니 자주 지나치면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나 보다.
하늘빛 오름회에서 왜 이런 작은 오름을 찾아왔을까, 잠시 의아했지만 정상(?)을 거쳐 반대편 기슭까지 왔을 때 모든 의문이 풀렸다. 이 작은 오름 속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역사가 숨어 있었다.
숲속으로 난 야트막한 숲길을 올라가니 뜻밖에도 고사포 진지가 두 군데 나타났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일제가 미군 항공기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군사시설이었다. 원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구축된 고사포 진지가 4기는 완공된 상태로, 1기는 미완공된 상태로 발견됐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결사항전 기지로 삼았던 증거라는 것이다.
고사포 진지를 지나 반대편 기슭으로 내려갔다. 얼마 가지 않아 원형의 넓은 공간이 나타나고, 그 안에 구덩이 2개와 제단과 추모비가 보였다. 이곳이 바로 6·25 당시 예비검속된 민간인들을 군대를 동원해 학살하고 돌무더기와 함께 암매장한 장소였다. 원형의 커다란 구덩이는 원래 일제가 제주도민을 동원해 만든 제주 최대의 탄약고였다고 한다.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폭파된 이 탄약고 터가 아비규환의 지옥이 된 것이다.
일행은 추모비 앞에서 간단히 묵념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불법주륙기'의 상세한 기록을 보면서 도저히 문명사회라면 있을 수 없는 만행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불법주륙기섯알오름 학살 사건의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돌에 새겼다. ⓒ 황의봉
주륙(誅戮)이란 '죄로 몰아 죽인다'라는 뜻이다. 희생자들이 어떤 죄를 지었다는 것일까. 바로 '빨갱이'라는 죄였다. 공산군이 남침을 감행해 물밀듯 쳐내려오니, 이에 호응해 적으로 돌변할지도 모를 빨갱이 의심자들을 미리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빨갱이로 몰아 처단한다는 발상 자체가 반문명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평범한 민간인들이 대거 끌려가 주륙 당했으니 만행도 이런 만행이 없을 터였다. 희생당한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예비검속자다. '4·3 귀순자와 평소 사상을 의심받았던 자'를 미리 잡아들였다는 것인데, 4·3 당시 한라산으로 피신했다가 내려오면 살려준다고 해서 내려온 사람을 '귀순자'라고 주륙의 대상으로 삼았다니 기막힌 일이다. '평소 사상을 의심받았던 자'에 이르러서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대리석에 상세히 자초지종을 기록한 불법주륙기 옆에는 희생자들이 신었던 검정고무신과 몸에 지녔던 물품들을 재현해 놓았다. 트럭에 태워져 학살 현장으로 끌려가면서 죽음을 직감한 예비검속자들이 가족들에게 장소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트럭 밖으로 던진 유품들이었다. 섯알오름 한곳에서만 이날 희생된 사람이 191명. 1950년 8월 20일 음력 7월 7일 새벽 아직 동트기 전이었다.
▲ 희생자들의 유품 전시트럭에 실려 학살장소로 끌려오던 희생자들이 죽음을 직감하고 가족들에게 장소를 알리기 위해 내던진 검정고무신과 소지품들을 재현해 놓았다. ⓒ 황의봉
불법적인 학살사건이 자행된 후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불법주륙기 옆에 '65년 고난의 약사'가 적혀 있다. 학살 현장을 은폐하고 유족들의 접근을 봉쇄한 당국의 조치로 인해 유족들이 시신을 발굴한 것은 사건 발생 6년 뒤인 1956년이었다.
4·19혁명이 있고서야 비로소 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조사 결의안이 통과됐다. 그러나 다음 해 5·16쿠데타가 발발하자 진상규명은 없었던 일이 되고, 겨우 조성한 희생자 묘역 위령비도 경찰 주도로 파괴해버렸다. 유족들에게 다시 암흑기가 시작됐다.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에 이르러서야 백조일손유족회가 창립되고, 위령비가 세워졌고, 유족들의 진상규명 활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40여 년이나 쉬쉬하며 감춰오던 학살 만행이 비로소 '봉인 해제'된 것이다.
악의 평범성
섯알오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얼어붙었다. 권력이 뭐길래, 이념이 뭐길래 원시 시대에도 없었을 야만의 극한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검속, 학살에 가담한 경찰과 군인은 아무리 명령에 움직였다고 해도 그게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이었을까. 만행을 기획한 자나 명령한 자, 집행한 자도 집에 가면 모두 자상한 가장이요, 소중한 자식일 텐데.
미국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으로 2차 대전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취재한 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제시해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었다고 한나 아렌트는 분석했다.
이 '악의 평범성'이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인가. 그래서 빨갱이로 의심되는 자들이니 구덩이에 처넣고 무차별로 죽이라는 명령을 따랐던 것일까.
하늘빛 오름회에서 섯알오름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난 오늘 혼자 집을 나섰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해 묘역을 조성했다는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를 가야만 할 것 같았다. 무더기로 암매장돼 누구의 시신인지도 구분할 수 없어 한군데에 모시고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붙은 합동 묘지다.
내비게이션을 치고 안덕면 사계리 쪽으로 가다 보니 주변이 온통 밭이다. 안내판이 보였다. 백조일손묘역 400m, 학살 터 3.8㎞라고 쓰여 있다. 곧 묘역에 도착했다. 안내판부터 읽어봤다.
이곳은 1950년대 모슬포 경찰서 관내(현재 한림읍, 대정읍, 한경면, 안덕면)에 거주하던 순박한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청년단체장, 학생 등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의 자의적 판단에 근거하여 구금되었던 양민이 사법적 절차 없이 정부군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당한 일백서른두 위의 원혼이 영면하신 곳입니다.
묘역은 잘 단장되어 있었다. 백조일손영령 위령비가 가운데 세워져 있고, 그 뒤의 넓은 평지에 132위의 나지막한 봉분이 열을 지어 나란히 조성돼 있었다.
유족들이 사건 발생 6년 만에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는데, 도저히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돼 132개의 칠성판 위에 두개골 하나에 등뼈, 팔·다리뼈들을 적당히 맞추어 132구로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해마다 7월 칠석날 아침에 유족들이 합동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묘역의 맨 뒤 중앙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고 그 뒤로 산방산이 보였다. 또 위령비 위에도 묵직한 돌에 태극기를 새겨 올려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가 묘역의 앞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기분이 묘했다.
백조일손지지 답사를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 산방산과 단산이 보였다. (2019.3)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