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서울극장 폐관 소식, 30년 전 그 장면이 떠올랐다

[아듀! 서울극장]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서울극장'

등록|2021.08.14 10:39 수정|2021.08.14 10:39
얼마 전 서울극장이 코로나19 장기 확산으로 인한 경영난 악화를 이유로 2021년 8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솔직히 놀랍지 않았다. 내게 크고 작은 추억을 남긴 단성사,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드림시네마(구 화양극장), 국도극장, 중앙시네마, 시네코아, 코아아트홀, 동숭시네마텍, 하이퍼텍 나다 같은 극장이 이미 문을 닫았다.

70mm 상영관을 자랑하던 대한극장과 한국 영화인들의 핸드프린팅과 사인을 설치한 '스타의 광장'이 위치한 피카디리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도 목격했다.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소식을 담담히 받아들였지만, 마음 한편이 아려온 것도 사실이다. 서울극장은 내게 특별한 추억을 남긴 곳이기 때문이다.
 

▲ 서울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사랑받았던 서울극장이 개관한 지 약 42년 만에 문을 닫는다. 서울극장은 지난 3일 홈페이지에 8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한다는 공지를 했다. 사진은 4일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의 모습. ⓒ 연합뉴스


<첩혈쌍웅>의 기억

<첩혈쌍웅>(1989)은 내가 서울극장에서 본 첫 영화다. 당시 잠실에 거주하는 중학생이었던 난 <첩혈쌍웅>이 보고 싶은 나머지 개봉일인 1989년 7월 29일 토요일(그 시절엔 토요일에 영화가 개봉했다)에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종로로 향했다.

신문에 실린 영화 광고를 통해 이름만 친숙하던 서울 시내의 10대 개봉관(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허리우드극장, 스카라, 명보극장, 국도극장, 대한극장, 중앙극장, 국제극장) 중 하나인 서울극장에 가기 위해 지하철 성내역(현재 잠실나루역)에서 출발해 을지로3가역을 거쳐 종로3가역에 도착하는 여정은 내게 모험과 다름이 없었다.

서울극장 앞의 오징어, 쥐포, 땅콩을 파는 사람들을 지나 매표소 앞에 다다랐지만, 난관은 끝난 게 아니었다. <첩혈쌍웅>이 '고교생 관람가'였기에 극장 직원에 걸리진 않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어른들 사이에 줄을 섰다. 무사히 오전 10시 20분 조조표를 구입한 후 극장에 들어가 마침내 <첩혈쌍웅>의 첫 장면을 본 순간의 감흥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그것이 영화의 감동인지, 처음으로 혼자 종로에 왔다는 설렘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첩혈쌍웅>은 서울극장에서 '서울시네마타운'으로 바꾼 다음 내세운 개관 특선프로였다. 서울극장은 1958년 국쾌남이 이끌던 세기상사가 지은 세기극장을 전신으로 한다. 1978년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회장은 자신이 제작한 영화들을 안정적으로 상영할 요량으로 세기극장을 인수해 서울극장으로 이름을 바꿔서 영업을 시작했다.

이후 1989년 70mm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1200석 규모의 상영관 2개(1관 칸느, 2관 아카데미)와 600석 규모의 상영관 1개(3관 베니스)로 구성된 국내 최초의 복합상영관 '서울시네마타운'으로 재건축하고 개관 특선 프로그램으로 한국 영화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1989), 할리우드 영화 <메이저 리그>(1989), 홍콩 영화 <첩혈쌍웅>을 걸었다.

단성사, 피카디리, 서울극장이 모인 한국 극장 산업의 중심지에서 홍콩 누아르 영화를 상영했다는 건 당시 우리나라의 문화적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의 대표영화관인 서울극장이 <첩혈쌍웅>을 상영함으로써 서울의 10대 개봉관에 들지 않았던 화양극장, 명화극장, 대지극장에서 개봉한 <영웅본색>(1986)과 <영웅본색 2>(1987), 변두리의 재개봉관, 동시상영관의 상영작이던 <천녀유혼>(1987)으로 대표되는 홍콩 영화 신드롬은 당당히 주류 문화로 올라섰다. 그해 <첩혈쌍웅>은 서울에서 2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외화 흥행 순위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90년 11월 24일 개봉한 <사랑과 영혼>은 서울의 4개 개봉관에서 150만 명을 동원하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내가 극장에 보러 가기 전에 TV와 라디오에선 영화의 주제곡 '언체인드 멜로디'가 쉴 새 없이 재생되는 중이었다. 뒤늦게 서울극장에서 <사랑과 영혼>을 보며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일간지에 실린 <사랑과 영혼> 광고 상단엔 'UIP 영화'라고 적혀 있었다. 1985년 한국 영화 시장에 대한 개방을 요구하는 한미영화협상이 타결되고 1986년 영화법 개정을 거쳐 미국영화직배(직배- 배급권에 의하여 생산자 또는 판매점으로부터 직접 소비자에게 배급함) 허용을 중심으로 한 후속 조치가 이뤄지자 1988년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유니버셜, 파라마운트, MGM이 해외배급을 위해 공동으로 설립한 다국적 기업 UIP(United International Pictures)가 국내 직배 상영에 나섰다. 최초의 UIP 직배 영화는 1988년 9월 24일 서울의 신영극장과 코리아극장을 포함한 전국 10여 개 영화관에서 개봉한 <위험한 정사>(1987)다.

UIP 직배에 맞서 다수의 영화인이 직배 저지를 위한 반대 시위를 벌이는 등 강력한 단체행동에 나섰다. 극장주들이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회장은 자신이 소유한 복합상영관 서울시네마타운에 직배 영화 <사랑과 영혼>의 상영을 강행해 한국 영화 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한상언영화연구소의 한상언 대표는 논문 <서울시네마타운 연구>에서 1990년대 서울시네마타운의 할리우드 직배영화 상영이 끼친 변화를 "인기 있는 할리우드영화들을 지속적으로 상영하면서 영향력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벌어드린 수익으로 지방 극장들을 서울시네마타운의 영향력 아래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는 전국적인 배급망의 설립으로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곽정환 회장의 힘은 대단했다. 2004년 <씨네21>은 곽정환 회장을 "<씨네21>이 선정하는 한국 영화산업 파워 50에 9년 연속, 상위권에 랭크"했으며 "20여 년 전 서울극장을 차려 이후 배급·극장업계에서 큰손 대접을 받아온" 인물이라 평가했다.

내게 <첩혈쌍웅>과 <사랑과 영혼> 이후 서울극장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은 없다시피 한다. 잠실 롯데월드에 극장이 있어서 거길 자주 갔고 집 근처에 위치한 재개봉관과 동시상영관을 들락거린 탓이다. 극장 환경이 급격히 변한 것도 원인이다.

1998년 CJ가 강변역에 위치한 테크노마트 내에 본격적인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 강변11을 개장하고 동양그룹이 2000년 삼성동 코엑스에 메가박스 1호점 문을 열면서 영화 산업은 단관 중심에서 대기업 중심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과거'가 돼버린 서울 10대 개봉관
 

▲ 서울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사랑받았던 서울극장이 개관한 지 약 42년 만에 문을 닫는다. 서울극장은 지난 3일 홈페이지에 8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한다는 공지를 했다. 사진은 4일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의 모습과 홈페이지 영업종료 공지. ⓒ 연합뉴스


영화 산업의 중심이 바뀌면서 서울의 10대 개봉관은 국제극장(1992년), 국도극장(1999년), 스카라극장(2005년), 단성사(2008년), 명보극장(2008년), 중앙극장(2010년) 순으로 하나둘 사라져갔다. 대한극장과 피카디리는 단관을 부수고 그 자리에 복합상영관을 세웠다. 허리우드극장은 실버영화관으로 변신했다. 이제 서울 10대 개봉관은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가 되었다.

예전엔 종로의 문화를 상징하는 명소로 서울극장, 종로서적, 뮤직랜드가 유명했다. 그러나 종로서적은 2002년, 뮤직랜드는 2004년에 폐점했다. 이제 서울극장이 2021년 8월 폐점할 예정이다. 종로서적, 뮤직랜드, 서울극장의 몰락은 출판 산업, 음반 산업, 영화 산업의 변화를 의미한다. 수익이 남지 않았기에 사라진 것이다.

한편으론 많은 사람의 삶에 소중한 추억을 남긴 이런 공간들이 하나도 남지 못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서울극장을 미래유산으로 남길 방법은 없을까. 서울시, 영화진흥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머리를 맞대고 보존을 위한 실질적인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만 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에서 시간을 버티며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극장 하나 정도는 있어야 마땅하다. 공간의 기억을 자본과 개발의 논리로 마구 허물어뜨리는 실수를 더는 저지르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추억을 잃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