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더위에 아파트가 정전되고서야 깨달은 것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의 소중함
▲ 밤도시의 어두운 밤 ⓒ pixabay
저녁 8시 33분, 조금 늦은 퇴근길. 이번 주 들어 가장 더운 하루여서 그런지 해는 이미 사라졌지만 저녁 날씨라고 하기에는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열기가 남아있다. 빨리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쉬려는 마음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하던 그때 아내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정전 됐어요.'
땀으로 끈적거리는 몸을 시원하게 씻고 나와 적당히 선선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려고 했는데. 깜깜한 욕실에서 씻는 건 고사하고, 씻고 나와도 에어컨, 선풍기도 없는 깜깜한 거실에서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저녁이 될 거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물론 그 불안이 현실이 될 거란 건 자명했다.
최대한 땀을 내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었지만 30도가 넘는 더위에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는 땀을 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가방을 멘 어깨와 등이 축축하게 젖어갈 때쯤 난 어느새 아파트 단지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집집마다 켜져있어야 하는 거실 불빛들이 정전으로 사라지자 마치 죽은 도시의 건물인 것 같았다. 아파트는 어둡고, 조용했다.
설마설마했지만 집 앞까지 와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조용히 들어선 아파트 복도는 그나마 비상 전력으로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잠깐의 기대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사그라들었다. 깜깜한 거실에서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날 비추는 손전등 불빛 두 개만이 집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줬다. 다행스럽게도 집 안은 아직까지 냉기가 조금 남아있었다. 우리 집 냉방기는 다행히 조금 전까지 열심히 일을 했었던 것 같았다.
"어서 와요. 더운데 수고했어요. 저녁 안 먹었죠. 얼른 손만 씻고 나와요."
"깜깜한데 됐어요. 그냥 맥주나 한 잔 하고 말려고요."
"된장찌개에 호박잎 삶아놨으니 조금만 들어요."
"그럼 조금만요."
부지런히 씻고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내는 식판에 약간의 반찬과 된장찌개를 담아서 내왔다. 깜깜한 곳에서 조명이라고는 손전등 밖에 없는데도 저녁을 먹지 못하고 퇴근이 늦은 날 위해 정성스레 저녁 밥상을 준비해 왔다. 퇴근하면서 사온 맥주와 아내가 차려준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잠시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가 늘 누리며 살면서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
정전을 경험한 것도 무척 오랜만이다. 딸아이는 자신의 기억 속에는 정전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요즘은 보기 드문 일이 됐다. 생각해보면 서울에 살 때 몇 번은 있었던 경험이지만 아마 딸아이가 어렸을 때라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사를 오고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나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특히 오늘과 같이 냉방기 없이는 잠시도 버티기 힘든 더운 날씨에는 더욱 그런 듯하다. 하지만 오히려 참기 어려울 정도의 삼복더위에 정전을 경험하면서 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에 대해 당장 사용을 못하거나, 누리지 못하게 되면 얼마나 불편하게 되는지 더 깊게 이해하고, 알게 됐다.
당연한 일상의 소중함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사는지 생각해 봤다. 밝게, 따뜻하게 때로는 시원하게도 할 수 있는 전기도 그렇지만 편안하게 씻고 마시는 물도, 아늑한 집도, 차도, 맛있는 음식들도. 정말 우린 다양하고, 많을 걸 누린다는 생각이 든다.
부족해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이상 풍족하게 누리는 것들의 고마움을 모르고 지나간다. 오늘처럼 정작 필요할 때 없거나, 부족한 경우가 드물겠지만 그럴 때만이라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지금의 나처럼 한 번쯤 돌이켜보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런 문제는 비단 사물이나 물질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내 곁을 지키는 가족, 친구, 동료 등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 곁에 있다고 항상 내 곁을 지킬 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물도 함부로 펑펑 쓰면 언젠가는 물이 부족할 시기가 올 것이고, 요즘처럼 덥다고 냉방기를 원 없이 돌리다 보면 오늘처럼 전력량 부족으로 대단위 정전 사태가 생기기도 한다. 넘칠 때일수록 아껴야 하고, 늘 부족함이 없음에 감사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부모, 아내, 형제, 자식들이니 당연히 날 아껴주고, 사랑해 줄 것이다 라는 안일한 생각은 금물이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관계는 양방향이다. 물론 친구나, 동료보다는 관계에서의 가족은 조금은 특별하다. 하지만 그 특별함도 영원하지는 않다.
결국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모든 관계는 단방향일 수 없다. 아낌없이 주는 사이는 영원할 수 없다. 부모, 자식 간에도 그건 당연한 일이고, 지극히 순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안 그래도 아들이 학원을 일찍 나서는 날이면 밥상을 두 번 차려야 하는데 요즘 나의 잦은 야근으로 아내는 저녁 밥상 차리는 일이 늘었다. 아내는 적게는 두 번, 많게는 세 번까지 차려야 하니 말은 하지 않지만 지칠 법도 하다.
하지만 아내는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내 저녁밥상을 챙기고, 내가 식사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어두운 식탁에 손수 손전등까지 들고서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난 이런 예쁜 아내를 위해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걸 묵묵히 하고 있다. 아내를 위한 폭풍 수다, 조금은 소심한 애교 그리고 이 더위를 조금은 식혀줄 나의 아재 개그까지 3종 세트로 끼를 부렸다.
"중학생 하고, 고등학생이 타고 다니는 차가 뭔지 알아요?"
"글쎄요."
"크크, 중고차요~"
"에~휴~, 얼른 식사해요."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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