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체조 여왕이라고 불리는 올림픽 4관왕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Simone Biles)가 자신의 정신 건강을 이유로 경기 중 기권했다.
그녀가 트위터에 남긴 말이다.
그녀의 선택은 빛이 난다. 온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 예전에도 정신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 기권한 선수들이야 수두룩 하겠지만, 이 기권은 유난히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지지와 박수를 받고 있다. 두려워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선택
두려움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 자신도 오랫동안 '사라짐'이란 질병을 앓았고, 지금도 사라질락말락 경계에 섰던 사람들, 그 경계에서 자신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사람들과 코칭을 한다.
이런 '사라짐'의 증상들을 묘사해보면, 먼저 자기표현을 어려워한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나 자기감정 표현은 좀처럼 입 밖으로 내질 못한다. 주어진 의무는 필요 이상으로 수행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시간은 가질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진심이나 솔직한 생각 대신, 그냥 해야 될 것 같은 말을 한다. 그래서 결국 하나마나한 말을 하게 된다.
진심을 드러내면 분위기를 깨거나,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 두려워한다. 감정을 의심하거나 아예 부인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느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가스라이팅을 하거나, 쉽게 가스라이팅을 당한다. 어떤 감정을 느끼든 자신이 너무 과하다거나 스스로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과 불안을 항상 안고 산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친구와 지인이 얼마나 많든 상관없이 뿌리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통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오히려 외로움을 가중한다. 이런 자기 소외는 엄청난 분노를 낳는데, 하필 분노는 사회적으로 가장 용인되지 않는 감정이라, 내면의 갈등이 반복되며 더 큰 분노가 쌓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런 갈등이 극에 달하면 점점 사회 활동에서 사라지거나, 우울증 진단을 받거나, 심각한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이어진다. 오랜 시간, 매일매일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한결같이, 성실하게 자기 자신을 포기해 온 결과, 이런 극적인 소멸이 일어난다.
조금 과장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라짐'은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의 문제다.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조금씩 잘라내며 살아온 사람이 삶 자체에 비관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시몬 바일스는 자기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부상이라는 거짓말을 하거나, 두려움과 죄책감 속으로 사라져 자신의 기권을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이건 자신을 위한 진실된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용감하게 자기편에 섰다.
바로 이 용기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기권은 어찌 보면 비겁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비겁한 사라짐이 아니라 적극적인 현존이다. 그래서 올림픽 금메달로도 고취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종류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금메달리스트나 유명 체조선수라는 기능보다,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하다는 교훈 말이다.
이런 종류의 진실은 여론을 양분시킨다. 한 편에서는 그녀가 자신의 정신 건강을 담보로 기능을 완수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능이나 의무도 한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인간의 가치가 기능을 완수하는 데 있다는 의견과 인간은 존재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 당신은 과연 어느 편인가?
친절함과 연민
글의 논조를 보면 뻔하겠지만, 나는 존재로서 인간의 가치를 믿는 편이다. 스스로를 잘라내면서 살아남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앞으로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힘을 기르도록 보조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코칭의 잡 디스크립션(job description)이다.
존재로서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의 감정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타인도 같은 태도로 대한다. 이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은 남모르게 자기 자신도 학대하는 경우가 많다.
성공 지향, 성취 지향적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인간적 감정, 필요, 욕망을 싸잡아 억누르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살도록 요구하는 사례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참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의 외모를 헐뜯는 사람은 남모르게 자기 자신도 못났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학벌로 평가하는 사람은 종종 안쓰러울 정도로 열등감에 시달린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존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사랑하지 못한다.
불행의 유형을 어떻게 나누고, 얼마나 많은 설명을 붙이든 상관없이 불행은 불행이다. 자기 자신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자신을 친절하게 대하는 연습을 권한다. 부담스러운 재능과 더러운 단점, 뜨거운 감정과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뒤엉킨 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건, 그게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이 연습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훈련이다. 어떤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더 자주 먹고 싶다고 했고, 솔직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친밀해지는 시간을 계획하는 사람도 있었다. 실패하지 않도록 자신을 겁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각대로 되지 않는 자신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를 찾는 연습이다.
그래서 어느 날 당신이 위험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온 세상의 기대를 등에 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느끼는 진실은 기대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 차고 넘치는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길 기원한다.
▲ 올림픽 4관왕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Simone Biles)가 트위터에 남긴 말 ⓒ 시몬 바일스 트위터
저는 넘치는 사랑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 경험으로 나 자신이 제가 이룬 성취나 체조 선수 이상의 존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진심으로 자신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트위터에 남긴 말이다.
그녀의 선택은 빛이 난다. 온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 예전에도 정신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 기권한 선수들이야 수두룩 하겠지만, 이 기권은 유난히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지지와 박수를 받고 있다. 두려워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두려움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 자신도 오랫동안 '사라짐'이란 질병을 앓았고, 지금도 사라질락말락 경계에 섰던 사람들, 그 경계에서 자신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사람들과 코칭을 한다.
이런 '사라짐'의 증상들을 묘사해보면, 먼저 자기표현을 어려워한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나 자기감정 표현은 좀처럼 입 밖으로 내질 못한다. 주어진 의무는 필요 이상으로 수행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시간은 가질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진심이나 솔직한 생각 대신, 그냥 해야 될 것 같은 말을 한다. 그래서 결국 하나마나한 말을 하게 된다.
진심을 드러내면 분위기를 깨거나,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 두려워한다. 감정을 의심하거나 아예 부인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느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가스라이팅을 하거나, 쉽게 가스라이팅을 당한다. 어떤 감정을 느끼든 자신이 너무 과하다거나 스스로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과 불안을 항상 안고 산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친구와 지인이 얼마나 많든 상관없이 뿌리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통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오히려 외로움을 가중한다. 이런 자기 소외는 엄청난 분노를 낳는데, 하필 분노는 사회적으로 가장 용인되지 않는 감정이라, 내면의 갈등이 반복되며 더 큰 분노가 쌓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런 갈등이 극에 달하면 점점 사회 활동에서 사라지거나, 우울증 진단을 받거나, 심각한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이어진다. 오랜 시간, 매일매일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한결같이, 성실하게 자기 자신을 포기해 온 결과, 이런 극적인 소멸이 일어난다.
조금 과장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라짐'은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의 문제다.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조금씩 잘라내며 살아온 사람이 삶 자체에 비관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시몬 바일스는 자기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부상이라는 거짓말을 하거나, 두려움과 죄책감 속으로 사라져 자신의 기권을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이건 자신을 위한 진실된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용감하게 자기편에 섰다.
바로 이 용기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기권은 어찌 보면 비겁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비겁한 사라짐이 아니라 적극적인 현존이다. 그래서 올림픽 금메달로도 고취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종류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금메달리스트나 유명 체조선수라는 기능보다,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하다는 교훈 말이다.
이런 종류의 진실은 여론을 양분시킨다. 한 편에서는 그녀가 자신의 정신 건강을 담보로 기능을 완수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능이나 의무도 한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인간의 가치가 기능을 완수하는 데 있다는 의견과 인간은 존재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 당신은 과연 어느 편인가?
친절함과 연민
글의 논조를 보면 뻔하겠지만, 나는 존재로서 인간의 가치를 믿는 편이다. 스스로를 잘라내면서 살아남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앞으로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힘을 기르도록 보조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코칭의 잡 디스크립션(job description)이다.
존재로서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의 감정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타인도 같은 태도로 대한다. 이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은 남모르게 자기 자신도 학대하는 경우가 많다.
성공 지향, 성취 지향적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인간적 감정, 필요, 욕망을 싸잡아 억누르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살도록 요구하는 사례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참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의 외모를 헐뜯는 사람은 남모르게 자기 자신도 못났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학벌로 평가하는 사람은 종종 안쓰러울 정도로 열등감에 시달린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존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사랑하지 못한다.
불행의 유형을 어떻게 나누고, 얼마나 많은 설명을 붙이든 상관없이 불행은 불행이다. 자기 자신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자신을 친절하게 대하는 연습을 권한다. 부담스러운 재능과 더러운 단점, 뜨거운 감정과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뒤엉킨 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건, 그게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이 연습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훈련이다. 어떤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더 자주 먹고 싶다고 했고, 솔직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친밀해지는 시간을 계획하는 사람도 있었다. 실패하지 않도록 자신을 겁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각대로 되지 않는 자신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를 찾는 연습이다.
그래서 어느 날 당신이 위험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온 세상의 기대를 등에 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느끼는 진실은 기대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 차고 넘치는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길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pussiful)에도 같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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