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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한 환경 속의 서자 출신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3] 신익희의 항일운동→반독재투쟁으로 일관한 저항정신의 발로

등록|2021.08.10 17:53 수정|2021.08.10 17:53

▲ 선거 10일 전에 돌아가신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 선생 ⓒ 국가기록원


신익희는 대단히 총명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열 살 전후해서 <사서삼경>을 읽고 집에 소장되어 있는 각종 도서와 <삼국지연의>ㆍ<수호전> 같은 소설을 읽었다. 글씨를 잘 써서 인근에 소문이 나면서 소년의 글씨를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글씨 재주가 있다 하여 어른들에게 칭찬을 듣고, 열 살이 다 못 되어서 아이로서 글씨를 잘 쓴다는 소문이 근동에 퍼져 나가서 글씨를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신이 나서 글씨를 써 주던 생각이 난다. 이 칭찬에 더욱 신바람이 나서 사랑 앞 모래땅에 꼬챙이를 깎아 가지고 글씨 연습을 하느라고 기나긴 봄날이 저무는 줄 모르고 연습에 열중했던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동무 아이들이 이것을 부러워하고 시기하여 옆에 와서 흉내를 내며 방해하면 격분하여 일어서서 멱살잡이하며 싸운 일도 기억난다.

그는 학덕이 깊은 아버지와 정숙한 어머니, 교양이 넓은 큰형의 가르침 등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서자라는 신분상의 올가미는 감수성이 예민한 그에게 충격이고 저항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동학의 폐정개혁안과 갑오개혁으로 신분 타파ㆍ과부의 재혼 등이 개혁의 대상으로 제기되었으나 현실은 여전히 반상과 적서차별이 유지되었다. 양반가일수록 이 같은 차별 의식이 극심했다.

아무리 명문가의 성스러운 혈통을 받았다 한들 해공은 서자의 취급을 면할 수 없었다. 이는 몸 둘 바 모르는 비극이었다. 철이 들어 선대의 제사를 지낼 때면 떳떳하게 조상도 받들 수 없는 당시의 낡은 풍습을 혁파하고자 벼르고 벼르던 중 쉽사리 뜻을 이루기 어렵게 되어 한번은 제사상을 뒤집어엎으며 야성적인 기질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개혁자다운 용기도 발산해서 마을 일대에 한때 소문도 자자했다.

▲ 정미의병(1907).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처음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1895)은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 자료사진


신익희의 항일운동→반독재투쟁으로 일관한 저항정신의 발로는 어릴 적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차별에서 발아된 것이다. 자칫 어릴 적의 저항심은 반사회적ㆍ반윤리적으로 발산되기 쉽지만, 그는 민족의식으로 발현되고 큰 인물로 성장하는 자양분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8, 9세 때 일이다. 당시 재상(宰相)이던 문정공(文貞公) 이도재(李道宰)씨가 우리 동네 안골에 있는 그분의 친산(親山)에 해마다 한식ㆍ추석 절사(節祀)에 참사하러 오는데 꼭 내 집에 들렀다. 내 아버지와는 거의 이십 년 연하이므로 꼭 와서 뵙고 가는 것이 연례 행사였다. 이 해에는 내가 『시전(詩傳)』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어른 오던 그 날에는 진풍(秦風)의 사마편(駟馬篇)과 소융편(小戎篇)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이 어른이 "아 숙성하다. 네 나이에 벌써 <시전>을 읽다니, 너 오늘 배운 사마ㆍ소융 이 두 편을 암송(暗誦)하고 그 뜻을 해설할 수 있겠느냐?" 하기에 신바람나게 두 편을 모두 외우고 뜻을 말씀드렸다. 그는 아주 신기해 하며 칭찬을 하고 돌아갔는데 그 다음날 하인을 우정 보내며 마구리에 '청(靑)'ㆍ'홍(紅)' 딱지 붙인 두루마리와 향내가 물씬물씬 나는 먹(黑)과 붓을 보내 주었다. 그 때의 그 기쁨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영민한 소년이 궁벽한 시골에서 자라고 있을 즈음 나라의 사정은 혼란이 거듭되었다. 민비(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살해되고 김홍집 내각은 성인 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다. 민비 살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유생들이 봉기하는 을미의병이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반일 감정이 높아진 상태에서 이범진ㆍ이완용 등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공모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주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서재필이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최초의 시민단체 독립협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조선사회는 격동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주석
3> 『구술 해공 자서전』, 48쪽.
4> 유치송, 앞의 책, 61쪽.
5> 『구술 해공 자서전』, 48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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