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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공예 47년, 장인의 가락지엔 순애보가 흐른다

[인터뷰]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7호, 가원공방 엄익평 옥장

등록|2021.08.15 12:13 수정|2021.08.15 12:13
옥(玉)자를 풀이하면, '아름다운 돌'이라고 한다. 예부터 옥은 '잡귀를 물리치는 힘'과 군자의 덕(德)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군자필패옥(君子必佩玉)이라 해서 '군자는 반드시 옥을 몸에 지녀야 한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옥은 동양의 보석 중 보석으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소수의 귀족과 왕실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옥은 구하기도 어렵고 다루기도 어려워 오래 전엔 옥을 만드는 사람의 수를 국가에서 제한해, 그 수가 극히 적었다고 전해진다.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7호 엄익평 옥장(62) ⓒ 박정하

 
"옥은 정말 귀한 거예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7호' 엄익평 옥장(62)은 47년 경력의 옥 장인이다. 그의 말 뒤에는 옥을 다루는 사람의 어려움이 같이 담겨 있다. 원석을 자르고, 다듬고, 광택을 내는 과정에서 엄익평 옥장은 아내를 생각하며, 반지를 제작한다. 아내의 손가락 굵기는 30년간 무형문화재의 제작 표준이 되었다. 그는 뮤즈인 아내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준다. 지난 7월 26일, 가원공방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상도동 달동네에서 시작한 옥공장 
   

▲ 가락지는 남녀 애정의 징표, 음양의 화합을 뜻하는 패물로써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 박정하


"반지 샘플을 만들 땐 제 와이프 손가락 크기에 맞춰서 만들어요. 그리고 진짜 귀한 재료로 만든 건 아내한테, 팔지 말고 가지라고 하죠.(웃음)"

아내는 열정의 원천이다. 그 에너지는 엄익평을 옥공에서 아티스트로, 그리고 옥장에서 무형문화재로 만들었다. 옥을 처음으로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학교를 그만두면서다. 둘째 형의 소개로 들어간 옥공장에서 스승 홍종호를 만나고, 공장이 스승의 지인에게 넘어가면서 공장을 그만두었다. 그는 용기를 냈다. 상도동 달동네 언덕배기 버려진 원두막에 중고기계를 들여와 옥공장을 차렸다. 그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아는 사람마저도 헛웃음 쳤다. 제대로 된 기계도 없는 상황에 삼 년차 옥공의 공장 경영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일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었다. 그는 중학교 중퇴에 미술이나 예술에 관해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다. 당시 그에게 독립은 옥공으로써 자신의 앞날을 점쳐볼 만한 중요한 시도였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그의 공장엔 공구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처음 시도한 백옥향로 내부를 다듬을 공구가 없었다. 공구를 살 돈도 없고,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방법밖에 없었어요. 일단, 살 수 없다면 직접 만들어 보기라도 해야 했죠. 공구 만들 재료가 2만 4000원이었고 당시 월급이 4000원 정도였으니까, 한 육 개월 치 월급을 털어서 직접 만들었죠."

세 달을 거쳐 탄생한 향로를 마주했을 때, 그는 옥공으로서 자긍심을 느꼈다. 그 이후 공장은 자리를 잡아갔다. 19살, 옥공장을 차렸던 패기는 나이가 들면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다음 도전 과제는 한국 고유의 옥공예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옥 문화는 중국에서 시작돼 한국으로 이어졌다. 비록 중국에서 시작된 문화지만, 우리 조상은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옥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장 상황은 달랐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고백했다.

"한... 80년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 옥공예 양식을 답습하는 데 그쳤죠. 뭐 제대로 배운 것도 없고 그러니까요. 게다가 사람들은 복잡한 문양의 옥 제품을 선호했으니까 저절로 모방하게 되더라고요." 
 

▲ 화려하고 복잡한 외형의 중국 옥 공예품(좌), 윤곽을 강조해 간결미를 나타낸 엄익평 옥장의 '백옥 참외형 주전자 및 잔대'(우) ⓒ 강원종합박물관, 가원공방


중국의 옥공예는 원석을 날 것 그대로 깎고, 다듬어 작업한다. 세밀하고, 사실적이어서 화려하고 복잡한 모습을 뽐낸다. 반면, 한국은 '선' 처리를 중시한다. 애초에 원석을 가공할 때부터 원하는 모양을 잡고 작업하며, 세밀한 세각보다 옥의 윤곽과 선을 부각해 화려함보다는 간결미를 강조한다.

"어느 날 어떤 학자분이 제 작품을 보고 '복잡한 데서 아름다움을 찾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무슨 말인지는 알았죠. 그런데 쉽게 버릴 수 없었어요. 조각이 덜 들어가거나, 너무 단순하면 일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또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복잡한 옥 제품을 선호하니까요."

그날 학자의 말은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맴돈다고 한다. 단순한 데서 찾는 아름다움. 화려한 조각을 비워내고 버려내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멈춰야 할 순간을 깨닫게 됐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다시 한국의 옛날, 그때로 돌아갔다.
 

▲ 23회 전승공예대전에서 총리상을 수상한 '당초수(壽)자 길상문 합' 각 면의 중앙에 행복과 길복을 비는 박쥐 길상문을 넣었다. 고려시대 청자투각장방형합(靑磁透刻長方形盒)을 모티브로 삼았다. 엄익평 옥장 作 ⓒ 가원공방


"우리 전통 문양에는 저마다 다른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는 한국 전통 문양을 섭렵하기 위해 우리의 옛 문양이 담긴 문양집을 연구했다. '영원한 삶'을 뜻하는 십장생부터 '장수나 행복을 비는' 길상문, 당초문, 와당이나 옛 전석의 문양까지 익히지 않은 문양이 없을 정도로 힘과 정신을 기울였다.

아침 여덟 시에 출근해 새벽까지 하루 16시간 이상은 공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작품 공모전이 있으면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출품했다.

"공모전에 보통은 작품을 하나 정도만 출품하는데 저는 두 점씩 출품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제 작품끼리 경쟁하고 있더라고요." 

그의 작품은 점차 한국 전통 옥공예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각종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문화부 장관상, 문화재 위원장상, 국무총리상 등을 수상하여 2006년, 서울시무형문화재 제37호 옥장으로 지정됐다.
 

▲ 투각 기법이란 묘사할 대상의 윤곽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구멍 내는 기법이다. ⓒ 가원공방


옥을 가늘게 깎는 세각 기술은 옥제품의 정교한 문양을 표현하기 위한 작업으로 긴 작업 시간을 필요로 한다. 엄 옥장은 작업의 효율을 위해, 불필요한 세각은 줄이고 자신만의 투각 기법을 고안해 작업 시간을 단축시켰다.

그렇게 수십 년간 옥을 갈고 닦으며 마침내 그만의 상감 기법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밋밋한 옥에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상감 기법은 금속이나 목재의 표면에 무늬를 새겨 금, 은 등을 박아 넣는 공예 기법으로, 깨지거나 균열이 가기 쉬운 옥의 특성을 고려하면 함부로 시도하기 어려운 기법이다. 엄 옥장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힘 조절로 옥 상감 기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 특허를 낸 상감 기법이 들어간 ‘백옥 오동상감 보상당초 봉화문합’ 향을 넣거나 염주를 담는 용도로 제작됐다. ⓒ 박정하


기술적으로 발전을 이뤄낸 그는 예술의 궤도에 올라 장인으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게 되었다. 수십 년의 시간은 현대 한국 옥 공예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그 역사보다 더 많은 부침이 그에게 있었다.

70년대 강원도 춘천 광산에서 백옥이 발굴되었다. 80년대 부유층이 많아지면서 공예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옥 시장도 활기를 띠었다. 결혼 예물로 옥가락지를 할 만큼 옥은 일반인들이 선호하는 보석 중 하나였다.

불이 나도... 끊을 수가 없었던 옥
 

▲ 다양한 밫깔의 옥가락지 ⓒ 박정하


"공장에서 옥가락지 같은 걸 만들고 남대문에 가면 상인들이 많이들 사갔어요. 그 때 가장 벌이가 괜찮았죠." 

공장에서 옥가락지를 만들고, 팔고, 다시 재료를 사고, 만드는 과정에서 엄익평 선생의 옥 공장도 순탄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수입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88올림픽을 기점으로 금이나 은, 다이아몬드 등 외석 수입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환금성이 높은 귀금속이 불과 몇 년도 안 돼 우리나라 보석 시장을 점령했다. 그러면서 옥을 찾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공장에 불이 났다.

"지금도 생각나요. 95년 1월 20일. 뭐라도 건지려고... 그래서 뛰어 들어가 작품 몇 점을 밖으로 허겁지겁 던졌어요. 당연히 살림살이는 하나도 못 건졌죠. 다 타버렸어요." 

찬 겨울, 뒷집에서 시작된 불은 다닥다닥 붙어있던 달동네를 집어삼켰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작업실에서 건진 작품 몇 점을 제외하면, 가족이 머물렀던 집부터 작업실까지 모두 잿더미가 됐다. 달동네라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와 아내는 어린 아이들을 형제들 집에 맡기고, 길가에 친 텐트에서 겨울을 보냈다. 겨울이 지나고 봄까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 직업에 처음으로 회의감이 들었어요. 애들은 어리고, 그렇다고 제가 다른 걸 배운 것도 아니고. 어쨌든 할 수 있는 거라곤 옥밖에 없었죠. 어쨌든… 그냥  버텼어요." 

불은 그를 옥공에서 옥장으로 만들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옥장은 10명 남짓 정도라고 한다. 설상가상 우리나라 유일 옥 출토지인 춘천 백옥 광산이 중국 기업에 넘어가면서 재료 수급마저 어려워진 상황이다.

"옛날엔 옥이 귀하니까, 나라에서 옥 만드는 사람 수를 조절하고 그랬는데 요샌 그 반대예요."

엄 옥장의 두 딸과 사위는 모두 옥 공예를 업으로 삼고 있다. 금속공예를 전공한 사위는 최근 그의 뒤를 이어 옥장의 길을 걷고 있다.
 

▲ 옥장 엄익평과 그의 아내 김정희 매듭장 ⓒ 박정하


"언젠가부터 일을 안 하면 불안해요. 앞으로 뭐 할지 생각해둔 것도 없어요. 그냥 끊을 수가 없어요. 옥을…" 

그는 지금도 하루 14시간을 꼬박 공방에서 보낸다. 그의 에너지원인 아내도 옆을 항상 지킨다. 그녀는 매듭장이다. 노리개나 부채를 장식하는 데 매듭은 필수다. 남편을 돕기위해 배운 매듭이, 매듭 장인이란 호칭을 얻게 했다.

달동네 작은 작업실에서 수입 보석으로 매출이 줄어들 때도, 공장과 집이 한 번에 불타 한겨울을 비닐하우스에서 버틸 때도 아내 김정희는 그와 함께했다. 옥공에서 옥장으로, 그리고 무형 문화재까지.

전통 옥 공예를 전수해줄 스승도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을 평생을 바쳐 이뤄냈다. 그리고 옥 공예에 상감기법을 도입해 특허까지 받았다.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은 아내의 정성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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