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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은퇴' 김연경이 한국 배구에 남긴 것

[주장] 국가대표 내려놓고 배구인생 후반기 보내는 김연경에 박수를

등록|2021.08.13 14:26 수정|2021.08.13 14:26
김연경이 태극마크와 아름다운 작별을 고했다. 대한배구협회는 12일 김연경의 국가대표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김연경은 이날 오후 협회에서 오한남 대한배구협회장과 면담을 갖고 국가대표 은퇴의사를 최종적으로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오 회장과 배구협회도 선수의 의사를 존중하여 은퇴를 받아들였다.

김연경은 이미 지난 9일 2020 도쿄올림픽 동메달 결정전 후 국가대표 은퇴를 언급한 바 있다. 한국은 4위로 올림픽을 마치며 목표했던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일본, 도미니카 공화국, 터키를 꺾고 아시아팀으로는 유일하게 4강에 오르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달성했다. 당시 김연경은 "국가대표는 이번 대회가 마지막일 거 같다"고 고백하며 "이번 대회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갈 방향을 잡았다. 여기까지 끌어올린 여자배구를 후배들이 열심히 이어줬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김연경은 2004년 아시아청소년여자선수권대회 때 청소년 국가대표에 선발되며 태극마크와 첫 인연을 맺었다. 김연경은 고교 3학년 신분이던 2005년에는 프로데뷔와 함께 국제배구연맹(FIVB) 그랜드챔피언스컵에 출전하며 첫 성인 대표팀에 승선했다.

김연경은 이후 2012년 런던부터 리우, 도쿄까지 3회 연속 올림픽 출전, 3회의 세계선수권대회, 4회의 아시안게임 등을 누비며 수많은 국제대회에서 한국 여자배구 부동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2012 런던올림픽 4강을 견인하며 대회 득점왕과 MVP에 올랐고,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수확했으며, 2020 도쿄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팀을 4강에 올려놓은 것이 김연경의 대표적인 업적들이다. 아시아무대에서도 중국-일본 등에 비하여 선수층이 두텁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 배구가 2010년대 세계배구의 다크호스로 선전할 수 있었던 데 김연경의 영향력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평가다.

김연경은 프로무대에서도 데뷔 초기부터 독보적인 활약을 보이며 리그를 제패했다. 2009년부터는 일본무대를 시작으로 터키, 중국 등을 거치며 한국 선수로는 보기 드물게 해외리그에서도 오랜 시간 활약했다.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과 MVP 수상, CEV컵과 터키리그 우승, 중국 정규리그 우승과 챔프전 준우승 등을 휩쓸며 해외무대에서도 최정상급의 활약을 선보였다. 외신과 전문가들로부터도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극찬을 받았다.

김연경이라는 월드클래스급 선수의 등장으로 한국 여자배구의 인지도와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이전까지만해도 비인기 종목에 가깝던 여자배구에 대한 관심과 인기를 끌어 올리는 기폭제 역할을 해냈고 나아가 국제대회 경쟁력까지 한단계 끌어 올렸다.

김연경은 2009년 해외진출 당시 FA 신분문제로 당시 소속팀 흥국생명과 첨예한 갈등을 빚었으나 법적공방과 국제배구연맹을 통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강수를 거듭한 끝에 자신의 권리를 쟁취했다. 이 사건으로 선수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한국 배구계의 현실이 공론화되고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계기로 이어졌다.

이후로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고나서는 협회의 부실한 지원, 선수차출의 공정성 등 공적인 문제에 대하여 여러 차례 쓴 소리를 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선수들이 대놓고 언급하기 꺼리는 금전 문제에 있어서도 솔직하며, 본인이 '현역 선수중 세계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당당히 공개하고, '여성 선수들이 남성 선수들에 비하여 낮은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아무리 슈퍼스타라고 해도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체육계 구조상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김연경의 문제제기는 대부분 합리적이었고 누군가는 당연히 해야 할 말이었기에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무엇보다 많은 팬들이 김연경에 열광한 것은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된 이후에도 항상 한국 여자배구의 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진정성 때문이다. 김연경은 외국과 한국을 오가는 강행군도 마다하지 않고 대표팀의 부름에 매번 응했다. 김연경은 국가대표 17년 경력 동안 수술대에 오른 것만도 여러 번이고 수많은 부상으로 혹사 논란이 내내 따라다녔다. 지난해는 올림픽 준비를 위하여 몸값까지 자진삭감하며 국내에 복귀했으나 이다영-이재영 자매와의 불화설과 학폭 논란으로 쑥대밭이 된 소속팀과 대표팀의 뒷수습까지 감당하며 많은 정신적 부담을 안아야 했다.

그렇게 쉴틈없이 달려오면서도 국가대표팀에서 김연경이 기량이 흔들리거나 불성실한 모습을 보여준 적은 거의 없었다. 거침없는 이미지와 달리 사생활을 둘러싼 어떤 잡음이나 구설수도 전무할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특히 김연경은 마지막이 된 올림픽에서 여전히 뛰어난 실력은 물론이고 끊임없이 팀동료들을 격려하며 리더의 역할을 감당해냈다. 외신으로부터도 '10억분의 1의 별' '진정한 리더'라는 극찬을 받았다. 팀동료와 상대 선수들, 지도자들, 외신과 전세계 배구계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김연경의 기량과 인성, 프로의식을 인정했다는 것은 바로 김연경이 선수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어 김연경은 국가대표 은퇴에서도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 최고의 자리에서 많은 이들이 아쉬워할 때 본인의 의지로 박수받으며 떠난다는 것은 내로라하는 슈퍼스타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것을 후회없이 불태운 김연경은 17년간 소중하게 지켜 온 태극마크를 아름답게 내려놓는 길을 택했다. 대한배구협회는 대표팀 은퇴식을 제안했으나 김연경이 정중하게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김연경은 선수로서 모든 생활이 끝나는 시점에 대표팀 은퇴식을 열기로 협회와 합의했다. 많은 팬들은 김연경의 등번호 10번을 대표팀 영구결번으로 지정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레전드와의 작별에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제 한국 여자배구도 김연경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지난 17년간 김연경 없는 대표팀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할 과정이다. 대표팀이 한동안 약해질 수 있고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김연경의 카리스마와 월드클래스급 기량을 단숨에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장기적으로 한국 여자배구가 한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김연경 시대의 그림자를 넘어서야 한다.

팬들은 영광과 부담이 교차했던 태극마크를 내려놓는 김연경이 홀가분하게 남은 배구인생 후반기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를 끝까지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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