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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장 살리려고... '시민모임'까지 만든 인천 사람들

[경기 별곡] 인천 홍예문과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감리교, 성공회, 가톨릭 교당 그리고 애관극장

등록|2021.08.18 13:43 수정|2021.08.18 13:43

1908년 일제가 구축한 석조문, 홍예문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인들이 살던 구획은 점점 포화상태로 접어들어 그 구역을 확장하기 위해 인천항에서 동인천으로 들어가는 산을 깎아 홍예문을 조성했다. ⓒ 운민


이번 시간에는 인천 구도심에 있지만 차이나타운, 개항장 거리와 다소 떨어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웬만해서 잘 닿지 않지만 역사적 가치를 보았을 때 그 상징성은 여느 명소 못지않은 곳을 가려고 한다.

우선 여기에 가기 위해서는 꽤나 긴 언덕길을 따라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하지만 그 끝에 도달하면 터널처럼 생긴 석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범해 보이지만 인천의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라 할 수 있다. 바로, 홍예문이다.

과거, 조계지 부근에 살던 일본인들은 점차 건너오는 숫자가 늘고, 더 이상 과밀화된 인구를 수용하기엔 부지는 너무나 좁았다. 결국 동인천역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는 대공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당시 그 중요성 때문인지 몰라도 일본인들은 혈문(穴門)이라 불렀다.

1908년 축조된 홍예문은 설계와 감독은 일본인이 맡고,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투입되어 공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동인천역에서 인천항까지 가려면 중간에 산자락에 막혀 돌아서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터널의 개통으로 서로의 왕래가 훨씬 수월해졌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홍예문은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기 전까지 인천 앞바다는 물론 팔미도와 주변 섬까지 한눈에 보였다. 광복 이후에도 주민들은 물론 인천여고, 제물포고, 박문여고 학생들의 주요 통학로로 쓰였다고 하니 이 지역 일대에 살던 사람들에겐 그 추억이 남다른 장소라 할 수 있겠다. 현재도 홍예문은 차량이 다니는 도로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는 지역 주민들이 수시로 지나다니고 있었다.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홍예문을 기점으로 해서 근대기에 건설된 의미 있는 장소들을 두루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 된다. 굳이 그곳을 목적지로 정하지 않더라도 그 골목 자체가 진한 옛 정취를 풍기고 있다. 비록 예전 근대 시절에 지어졌던 수많은 건물 대신 낡은 가옥과 주택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가로수길과 담쟁이넝쿨이 얽힌 담벼락은 그때 그 시절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이제 홍예문 옆쪽의 골목길을 따라 신포시장 방향으로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다 보면 건축의 문외한인 나의 눈으로 봐도 범상치 않은 모습의 성당이 나타난다.
 

인천 성공회 성당, 내동성공회성당홍예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공회에서 세운 내동 성공회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 운민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성공회 성당이다. 성공회라는 교파는 영국 국교회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독교 중에서 가톨릭, 정교회 다음으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종파이다. 영국의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를 두고 로마 가톨릭과 대립한 끝에 왕의 주도로 탄생했지만 후에 영국이 수많은 식민지를 만들며 끊임없이 세력을 뻗어갈 당시 많은 전파가 이뤄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개항과 함께 영국인들에 의하여 수많은 성공회 성당이 건설되었다. 대표적으로 서울시청 맞은편에 있는 서울 성공회 성당과 한옥양식을 차용한 강화 성공회 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각각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성당을 보러 종종 찾기도 한다.

여기 내동 성공회 성당도 일반 교회나 성당과 달리 중세풍의 석조 건물 양식을 취하고 있어 그 형태나 모양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원래 인천이 개항한 직후 서양 열강들을 따라서 수많은 선교사와 교회 세력이 들어왔다.

비록 미국의 감리교와 장로교가 먼저 들어왔지만 성공회는 다른 교파와 달리 적극적인 전도보다는 사회활동과 그 신앙을 실천하는 것에 무게를 두었다. 그와 동시에 한국문화를 존중하고, 그에 동화되는 교회를 추구했는데 그 일환으로 강화읍과 온수리에 한옥으로 만든 성당을 짓게 된 것이다.
 

새롭게 복원된 내리교회의 제물포웨슬리예배당우리나라의 근대교육에 큰 영향을 끼친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건설한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이다. 증축과 화재로 건물이 파괴되었지만 2012년에 새롭게 복원되었다. ⓒ 운민


내동 성공회 성당을 나와 언덕길을 조금 내려가다 보면 붉은색 벽돌로 만들어진 교회를 만나게 된다. 바로 1901년 인천 최초의 서구식 예배당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그 유명한 아펜젤러가 한옥 예배소를 허물고 세운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과시했던 교회였지만 1955년 건물을 중축함으로써 원형을 잃어버렸고, 1964년 화제로 인해 건물 전체가 소실되었다.

즉 현재의 건물은 과거의 사진을 바탕으로 2012년에 새롭게 복원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 의료 등 큰 영향을 끼친 감리교회의 역사성이 이렇게라도 재조명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극장, 애관극장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 애관극장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 애관극장은 수많은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공세속에서도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 운민


이제 거대한 규모의 내리 교회 쪽으로 언덕을 내려와 맞은편 도로를 건너 인천의 근현대사를 알려주는 다른 장소로 이동해 본다. 건물 앞에 자리한 영화 포스터를 보니 이곳이 극장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일반 멀티플렉스의 명칭 대신 애관극장이라는 향토적인 정서가 짙게 풍기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대기업의 멀티플렉스가 아닌 일반 극장들, 심지어 서울극장 조차도 최근에 문을 닫게 된 힘든 상황 속에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1895년 전후에 탄생된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이며 치열한 경쟁 속에 100년이 훨씬 넘게 인천 시민과 세월을 함께 했다.

미림, 도원, 인천, 문화 극장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고, 애관극장도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지만 뜻깊은 사람들이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을 결성해서 그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대기업의 극장들도 그 규모를 축소하는 유래 없는 위기 속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새삼스레 걱정이 앞선다. 부디 이 힘든 시기를 잘 넘기길 염원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해 본다.  

인천을 대표하는 건축물, 답동성당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성당, 답동성당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중심에 서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재도 인천 주교좌 성당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 운민


인천항 방면으로 한 블록만 걷다 보면 멀리서부터 위용 있는 모습의 성당을 볼 수 있다. 가톨릭 인천 교구의 중심이자 인천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답동 성당이 바로 그곳이다. 성당 앞은 새롭게 주차장과 광장을 정비하는 공사가 한창이라 언덕길을 둘러서 올라가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보니 그 기품과 장대함이 여느 다른 성당, 교회보다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인천의 답동성당은 약현성당에 이어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성당으로 명동성당보다 그 시기가 빠른 1897년에 건립되었다.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띄고 있고, 고아들과 여성 등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기도 했었다. 그 움직임은 점차 커져 1900년 인천항 사립 박문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해방 이후 노동운동의 성지이기도 했는데 1987년 인천의 민주화운동의 중심지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감리교의 내리 교회, 성공회의 내동성당과 다른 종파지만 서로 대립하지 않고 사이가 돈 득한 편이며 함께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이제 슬슬 배가 고파지려 한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신포시장으로 이동해보기로 하자.
덧붙이는 글 9월초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경기별곡 시리즈 1권이 책으로 출판됩니다. 많은 사랑,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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