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마주한 불일폭포, 이런 장관이 또 있을까
쌍계사와 불일폭포, 천년고찰과 천리길 같던 폭포 가는 길
눈이 떠졌다. 머리가 아팠고, 올림픽은 별탈 없이 진행 중이었다. 밤새 틀어놓은 에어컨에 몸이 시렸다.
지난 8월 4일, 쌍계사를 가기로 했다. 화개터미널에서 시간마다 가는 버스가 있었고 나는 잡아타야 했다. 쌍계사는 소설 <토지> 속 윤씨 부인과 서희가 백중날 공양을 바칠 때 방문했던 곳이었고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길상이 악양 평사리로 돌아와 몸 조섭을 한 뒤 관음탱화를 조성한 곳이었다. 나는 그곳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쌍계사 가람배치 얘기를 들려준 분은 구례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으로 화엄사에 실망했다면 쌍계사는 더욱 별로일 거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천년 사찰임에 사람들의 때가 많이 탔고, 좁은 산문에 이것저것 욱여넣었다고 말해주셨다. 배치가 빼곡한 곳, 요즘 말로 건폐율이 높은 곳이라는 것이다.
쌍계사 위치에 헤맸다. 10분 차이로 하동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내린 곳에서 내막을 말씀드렸고 기사님은 서둘러 5분 뒤에 쌍계사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며 서두르라고 하셨다. 버스에 올라타니, 먼저 보이는 분은 안내일을 하는 분이 계셨는데, 연세 있는 분들이 버스에 함께 타셨다. 주 임무는 버스 요금 조율과 어르신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타고 내릴 때 부축과 보조를 하는 것이었다.
다시 쌍계사로 가는 버스를 탄다. 벚꽃과 단풍이 흐드러질 때에는 이 10여 km되는 거리가 지역의 명소가 된다. <토지>를 읽고 윤씨 부인의 공양을 생각하고 왔다. 길 곁에 늘어선 벚나무의 행렬이 근사했다.
졸다 깨다 도착한 쌍계사. 천년 고찰답게 산문에 들어서는 일들도 무거웠다. 지독한 혹서과 염천 때문이기도 했다. 더워도 몹시 더운 날이었다. 마침 경남 하동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내렸던 날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쌍계사는 봐야 했다. 하동 땅에서 볼 하나를 꼽는다면 '쌍계사'였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행(은 아니더라. 그냥 떠도는 것)을 떠날 때, 사찰이나 암자, 중축된 성당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쌍계사 일주문을 들어선다. 문을 건널수록 '사천왕'과 저승의 온갖 관리들이 나를 맞이한다. 탱화의 색감은 누구에게나 친숙하지 않아서, 내가 아는 분들은 절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튼 쌍계사에 들어선다. 쨍하다 못해 입은 옷이 바삭바삭해지는 날씨인데도 많은 분들이 오셨다. 주로 경남 방언을 쓰던 사람들에게서 유대와 연대를 느낀다.
대웅전을 비롯한 사찰 내부를 둘러 본다. 마침 해가 쨍한 날. 대웅전 맞배지붕에 걸린 근사한 구름이 이야기를 거는 듯하다. 일껏 보지 못했던 하늘과 자연, 그리고 천년을 이어온 사찰을 마주한다.
대웅전은 웅장했고 다른 건물들은 얌전했다. 사장님의 말처럼 실망하고 섭섭한 산문은 아니었다. 하나하나 문화재였고 나라와 하동군에서 지정한 보물이었다. 나는 그저 저 품에서 종횡으로 걷는 와중이었다.
대웅전을 비롯해 불상을 모신 곳을 마주하면 공수를 한 뒤 인사를 드렸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냉담도 오래됐고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도 전혀 없다. 그러던 중, 마주한 명부전(冥府殿). 인사를 드리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가운데 앉은 분이 자비로운 미소를 보내셨다. 그는 내 모든 저간 사정을 알고 계실까.
'명부'라는 의미는 죽어서 심판을 받는 곳, 다시 말해 염라대왕이 있는 곳이다. 쌍계사 내 명부전엔 염라대왕이 아니라 지장보살이 앉아 계셨다. 죄가 많은 중생이라 적이 안심됐다. 지장보살을 호위하는 시왕(十王)이 지장보살 곁에 시립해 있고, 저 구석엔 험악한 차사(장군?)가 세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동 쌍계사 명부전은 조선 후기 승려 성안대사가 창건한 곳으로 천년 사찰에 말석쯤에 앉은 건물. 그곳에 앉아 한 곁에 놓인 경전을 들춰보니 살아온 생애가 찰나처럼 스쳐간다.
잠깐 눈을 감았다. 순간, 이곳을 배경으로 단편 정도 쓸 수 있을 듯한 내용이 떠올랐다. 쓰기 전에 개요만 늘어놓기보다는 다 써서 어느 곳에 게재해야겠다.
명부전 옆에 마련된 약수샘에 물이 솟는다. 한 잔 마시니 시원하진 않고 미지근하다. 폭염주의보 이 날씨에 산턱에 자리한 사찰을 온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대웅전 뒤에 있는 삼존석불이라고 암벽에 부처님과 보살님 두 분을 새긴 곳이 있는데 지켜보며 감탄했다. 마땅한 도구도 없었을 당시, 온전히 끌과 정, 시간과 공력만을 들여 조성한 이의 수고를 생각하게 됐다. 쌍계사에는 삼존석불 말고도 마애석불이라고 바위에 새긴 귀여운 부처님 한 분이 더 계시다. 벽에 맺힌 세월이 더위 너머로 끼쳐오는 것 같았다.
삼존석불을 보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공덕비 하나가 세워져 있다. 마애불과 삼존석불 옆 계단을 조성하는데 큰 액수를 시주한 농심 신춘호 회장 일가의 이름이 나열돼 있는 비석이었다. 그 가운데 신 회장이 특히 아꼈다는 막내딸 신윤경씨와 그의 남편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쌍계사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하려는데, 발견하게 된 '불일폭포'로 가는 길이란 팻말(나는 여기서 발을 돌려야 했다). 하동 10경의 하나라는 불일폭포의 절경을 볼까 하고 고민했다. 지도앱을 돌려보니 걸어서 35분쯤 걸린다고 한다(앱 담당자를 찾고 있다. 아시면 제보 좀). 가진 건 튼튼한 두 다리뿐이라 올라가 보자 했다.
그렇게 가는 데만 90여 분에 달하는 산행이 시작됐다. 오르막, 계단, 비탈길의 연속이었다. 초반엔 데크로 만든 계단이 있어 발이 편했는데 갈수록 흙과 바윗길이었다. 덥다 못해 녹아버릴 듯한 날씨에 돌아갈까 생각을 20210804번쯤 했고 불일폭포의 포말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건, 산이 깊은 곳이라 시원한 기운이 골을 거치며 건너왔기 때문이었다.
구례 연기암도 그렇고 하동 쌍계사 불일폭포도 그렇고 왜 내 여정은 고행의 연속일까 싶었다. 마침 일 때문에 들고 온 랩탑과 책 두 권, 그밖에 물건들을 담은 무게가 10Kg는 족히 되었다. 마스크 스트랩에 맺히는 땀방울조차 무게처럼 느껴졌다.
쌍계사가 자리한 지리산 자락은 신라가 자랑하는 천재 고운 최치원과 연이 닿아 있다. 그가 속세를 지긋지긋해 하며 떠난 곳 가운데 하나가 이곳이고 폭포로 가는 길 가운데 자리한 환학대(喚鶴臺)는 최치원이 이상 세계처럼 여긴 청학동으로 건너갈 때 학을 불러 타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다.
쌍계사 경내에 최치원이 쇠막대기로 새겼다는 글자(진감선사 대공탑비)도 전해지고 있다. 당대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진 당나라로 건너가 외국인 대상 과거시험 격인 빈공과에 합격하기도 했고 격문으로 반란을 잠재우는 문장가이기도 했던 천재를 생각하게 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힘들었다. 힘들고, 지치고, 땀 나고, 덥고, 무겁고, 들러붙는 산모기가 성가셨다. 나는 왜 이런 길을 오늘 같은 날씨에 골랐을까라고 20210805쯤 생각할 무렵 불일폭포를 10여 분 거리에 둔 휴게소를 만났다. 구원 같은 곳이었다.
알고 보니 휴게소는 몇 년 전 없어졌고 쌍계사에서 조성한 외국인 승려를 위한 수행터와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의 분소가 마련돼 있었다. 해사하게 웃으시며 나를 맞아주는 그분들을 보니 무간지옥에 빠져 악귀들이 들러붙을 때 마주한 지장보살님이 꼭 이렇게 생겼으리라 생각했다.
물을 마시고, 빈 물통을 채웠다. 조갈이 멎지 않았다. 지친 기색으로 앉아 있다 보니 그곳 관리부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나아가 몽골에서 오셨다는 수행 스님이 타주시는 대자대비한 믹스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정오가 지난 이 무렵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커피의 단맛이 몸 안에 돌기 시작했고 피톨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다시 걸을 힘이 생겼다.
짐을 맡기고 내려오는 길에 찾아가겠다고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응낙해주셨다. 물병 하나와 전화기만 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휴대전화는 골 깊은 그곳에 가서도 끊을 수 없는 족쇄였다.
다시 불일평전이라 불릴 정도로 평평한 곳이 이어지더니 데크와 쇠 프레임으로 잘 마감한 계단과 구름다리 길을 만난다. 몸이 가뿐한 느낌이었다. 가방 무거운 걸 더니 한결 나아졌다.
폭포 조우 5분 전 만난 불일암이라는 암자. 나는 이곳이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기 전 말년을 보낸 곳으로 오인했다. 순천 송광사 불일암과는 동명이찰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러야지 하고 발을 옮겼다.
마침내 마주한 불일폭포는 장관이었다. 60m에 달하는 낙하가 몇 천 년을 이어온 끝에 나를 맞아주었다. 한동안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연거푸 사진을 찍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모습을 잘 찍지 않게 됐지만, 불일폭포와는 안 찍을 수가 없었다.
하얗게 백탁되며 내 얼굴을 지켜주었던 선크림이 번지고 힘든 기색이 묻어 몰골이 영 말 아니었다. 가져간 페트병에 전화기를 기대놓고 타이머를 맞춘 뒤 달려가 전신을 찍었다. 들여다보니, 나이가 느껴졌다. 떨어지는 폭포처럼 몇 년을 살아도 싱싱할 수는 없으려나. 무망한 기대였다.
지난 8월 4일, 쌍계사를 가기로 했다. 화개터미널에서 시간마다 가는 버스가 있었고 나는 잡아타야 했다. 쌍계사는 소설 <토지> 속 윤씨 부인과 서희가 백중날 공양을 바칠 때 방문했던 곳이었고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길상이 악양 평사리로 돌아와 몸 조섭을 한 뒤 관음탱화를 조성한 곳이었다. 나는 그곳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쌍계사 위치에 헤맸다. 10분 차이로 하동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내린 곳에서 내막을 말씀드렸고 기사님은 서둘러 5분 뒤에 쌍계사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며 서두르라고 하셨다. 버스에 올라타니, 먼저 보이는 분은 안내일을 하는 분이 계셨는데, 연세 있는 분들이 버스에 함께 타셨다. 주 임무는 버스 요금 조율과 어르신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타고 내릴 때 부축과 보조를 하는 것이었다.
다시 쌍계사로 가는 버스를 탄다. 벚꽃과 단풍이 흐드러질 때에는 이 10여 km되는 거리가 지역의 명소가 된다. <토지>를 읽고 윤씨 부인의 공양을 생각하고 왔다. 길 곁에 늘어선 벚나무의 행렬이 근사했다.
▲ 하동 쌍계사 일주문. 배롱나무에게 곁을 내준 모습이 정겹다 ⓒ 이환희
졸다 깨다 도착한 쌍계사. 천년 고찰답게 산문에 들어서는 일들도 무거웠다. 지독한 혹서과 염천 때문이기도 했다. 더워도 몹시 더운 날이었다. 마침 경남 하동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내렸던 날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쌍계사는 봐야 했다. 하동 땅에서 볼 하나를 꼽는다면 '쌍계사'였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행(은 아니더라. 그냥 떠도는 것)을 떠날 때, 사찰이나 암자, 중축된 성당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쌍계사 일주문을 들어선다. 문을 건널수록 '사천왕'과 저승의 온갖 관리들이 나를 맞이한다. 탱화의 색감은 누구에게나 친숙하지 않아서, 내가 아는 분들은 절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튼 쌍계사에 들어선다. 쨍하다 못해 입은 옷이 바삭바삭해지는 날씨인데도 많은 분들이 오셨다. 주로 경남 방언을 쓰던 사람들에게서 유대와 연대를 느낀다.
대웅전을 비롯한 사찰 내부를 둘러 본다. 마침 해가 쨍한 날. 대웅전 맞배지붕에 걸린 근사한 구름이 이야기를 거는 듯하다. 일껏 보지 못했던 하늘과 자연, 그리고 천년을 이어온 사찰을 마주한다.
대웅전은 웅장했고 다른 건물들은 얌전했다. 사장님의 말처럼 실망하고 섭섭한 산문은 아니었다. 하나하나 문화재였고 나라와 하동군에서 지정한 보물이었다. 나는 그저 저 품에서 종횡으로 걷는 와중이었다.
대웅전을 비롯해 불상을 모신 곳을 마주하면 공수를 한 뒤 인사를 드렸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냉담도 오래됐고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도 전혀 없다. 그러던 중, 마주한 명부전(冥府殿). 인사를 드리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가운데 앉은 분이 자비로운 미소를 보내셨다. 그는 내 모든 저간 사정을 알고 계실까.
'명부'라는 의미는 죽어서 심판을 받는 곳, 다시 말해 염라대왕이 있는 곳이다. 쌍계사 내 명부전엔 염라대왕이 아니라 지장보살이 앉아 계셨다. 죄가 많은 중생이라 적이 안심됐다. 지장보살을 호위하는 시왕(十王)이 지장보살 곁에 시립해 있고, 저 구석엔 험악한 차사(장군?)가 세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동 쌍계사 명부전은 조선 후기 승려 성안대사가 창건한 곳으로 천년 사찰에 말석쯤에 앉은 건물. 그곳에 앉아 한 곁에 놓인 경전을 들춰보니 살아온 생애가 찰나처럼 스쳐간다.
잠깐 눈을 감았다. 순간, 이곳을 배경으로 단편 정도 쓸 수 있을 듯한 내용이 떠올랐다. 쓰기 전에 개요만 늘어놓기보다는 다 써서 어느 곳에 게재해야겠다.
명부전 옆에 마련된 약수샘에 물이 솟는다. 한 잔 마시니 시원하진 않고 미지근하다. 폭염주의보 이 날씨에 산턱에 자리한 사찰을 온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 쌍계사 삼존석불. 마른 이끼가 세월을 느끼게 한다. 당대 양각 솜씨의 일면 ⓒ 이환희
대웅전 뒤에 있는 삼존석불이라고 암벽에 부처님과 보살님 두 분을 새긴 곳이 있는데 지켜보며 감탄했다. 마땅한 도구도 없었을 당시, 온전히 끌과 정, 시간과 공력만을 들여 조성한 이의 수고를 생각하게 됐다. 쌍계사에는 삼존석불 말고도 마애석불이라고 바위에 새긴 귀여운 부처님 한 분이 더 계시다. 벽에 맺힌 세월이 더위 너머로 끼쳐오는 것 같았다.
삼존석불을 보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공덕비 하나가 세워져 있다. 마애불과 삼존석불 옆 계단을 조성하는데 큰 액수를 시주한 농심 신춘호 회장 일가의 이름이 나열돼 있는 비석이었다. 그 가운데 신 회장이 특히 아꼈다는 막내딸 신윤경씨와 그의 남편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 신 씨일가가 조성해 큰 시주를 했다는 걸 기념하는 '금강계단조성시주대공덕비' 재계의 익숙한 이름들이 보인다 ⓒ 이환희
그렇게 쌍계사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하려는데, 발견하게 된 '불일폭포'로 가는 길이란 팻말(나는 여기서 발을 돌려야 했다). 하동 10경의 하나라는 불일폭포의 절경을 볼까 하고 고민했다. 지도앱을 돌려보니 걸어서 35분쯤 걸린다고 한다(앱 담당자를 찾고 있다. 아시면 제보 좀). 가진 건 튼튼한 두 다리뿐이라 올라가 보자 했다.
그렇게 가는 데만 90여 분에 달하는 산행이 시작됐다. 오르막, 계단, 비탈길의 연속이었다. 초반엔 데크로 만든 계단이 있어 발이 편했는데 갈수록 흙과 바윗길이었다. 덥다 못해 녹아버릴 듯한 날씨에 돌아갈까 생각을 20210804번쯤 했고 불일폭포의 포말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건, 산이 깊은 곳이라 시원한 기운이 골을 거치며 건너왔기 때문이었다.
구례 연기암도 그렇고 하동 쌍계사 불일폭포도 그렇고 왜 내 여정은 고행의 연속일까 싶었다. 마침 일 때문에 들고 온 랩탑과 책 두 권, 그밖에 물건들을 담은 무게가 10Kg는 족히 되었다. 마스크 스트랩에 맺히는 땀방울조차 무게처럼 느껴졌다.
쌍계사가 자리한 지리산 자락은 신라가 자랑하는 천재 고운 최치원과 연이 닿아 있다. 그가 속세를 지긋지긋해 하며 떠난 곳 가운데 하나가 이곳이고 폭포로 가는 길 가운데 자리한 환학대(喚鶴臺)는 최치원이 이상 세계처럼 여긴 청학동으로 건너갈 때 학을 불러 타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다.
쌍계사 경내에 최치원이 쇠막대기로 새겼다는 글자(진감선사 대공탑비)도 전해지고 있다. 당대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진 당나라로 건너가 외국인 대상 과거시험 격인 빈공과에 합격하기도 했고 격문으로 반란을 잠재우는 문장가이기도 했던 천재를 생각하게 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힘들었다. 힘들고, 지치고, 땀 나고, 덥고, 무겁고, 들러붙는 산모기가 성가셨다. 나는 왜 이런 길을 오늘 같은 날씨에 골랐을까라고 20210805쯤 생각할 무렵 불일폭포를 10여 분 거리에 둔 휴게소를 만났다. 구원 같은 곳이었다.
알고 보니 휴게소는 몇 년 전 없어졌고 쌍계사에서 조성한 외국인 승려를 위한 수행터와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의 분소가 마련돼 있었다. 해사하게 웃으시며 나를 맞아주는 그분들을 보니 무간지옥에 빠져 악귀들이 들러붙을 때 마주한 지장보살님이 꼭 이렇게 생겼으리라 생각했다.
물을 마시고, 빈 물통을 채웠다. 조갈이 멎지 않았다. 지친 기색으로 앉아 있다 보니 그곳 관리부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나아가 몽골에서 오셨다는 수행 스님이 타주시는 대자대비한 믹스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정오가 지난 이 무렵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커피의 단맛이 몸 안에 돌기 시작했고 피톨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다시 걸을 힘이 생겼다.
짐을 맡기고 내려오는 길에 찾아가겠다고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응낙해주셨다. 물병 하나와 전화기만 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휴대전화는 골 깊은 그곳에 가서도 끊을 수 없는 족쇄였다.
다시 불일평전이라 불릴 정도로 평평한 곳이 이어지더니 데크와 쇠 프레임으로 잘 마감한 계단과 구름다리 길을 만난다. 몸이 가뿐한 느낌이었다. 가방 무거운 걸 더니 한결 나아졌다.
▲ 하동 쌍계사의 한 암자 불일암. 순천 송광사 불일암과는 동명이찰이다. ⓒ 이환희
폭포 조우 5분 전 만난 불일암이라는 암자. 나는 이곳이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기 전 말년을 보낸 곳으로 오인했다. 순천 송광사 불일암과는 동명이찰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러야지 하고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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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쏟아지던 불일폭포 ⓒ 이환희
마침내 마주한 불일폭포는 장관이었다. 60m에 달하는 낙하가 몇 천 년을 이어온 끝에 나를 맞아주었다. 한동안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연거푸 사진을 찍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모습을 잘 찍지 않게 됐지만, 불일폭포와는 안 찍을 수가 없었다.
▲ 불일폭포 ⓒ 이환희
하얗게 백탁되며 내 얼굴을 지켜주었던 선크림이 번지고 힘든 기색이 묻어 몰골이 영 말 아니었다. 가져간 페트병에 전화기를 기대놓고 타이머를 맞춘 뒤 달려가 전신을 찍었다. 들여다보니, 나이가 느껴졌다. 떨어지는 폭포처럼 몇 년을 살아도 싱싱할 수는 없으려나. 무망한 기대였다.
덧붙이는 글
제 블로그(https://blog.naver.com/leehhwanhee/222459273671)에 앞서 게재한(8월 6일)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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