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여행을 시작하고 싶다면, 일단 여기부터 가세요
[경기 별곡] 화성의 역사가 담긴 여행지,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
▲ 공룡알 화석산지의 풍경예전 바닷가였던 화성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는 바닷물이 빠지면서 땅이 고스란히 들어나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 운민
경기도는 물론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가장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도시는 어딜까? 고양, 성남, 수원, 용인 등 서울과 인접한 도시들이 우선 떠오를지 모르지만 의외로 화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2021년 7월 기준 인구 87만으로 어느새 100만을 목전에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면적도 간척지까지 고려하면 서울의 1.4배 정도로 규모가 크기에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도 꽤 높다.
사실 화성이 이렇게까지 급속도로 성장한 이면에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겠지만 동탄신도시를 위시해 여러 신도시들이 들어선 이유가 가장 크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외되었던 화성의 서부지역들, 향남, 봉담, 남양, 송산 지역들도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얼마 전까지 논, 밭이었던 지역이 아파트 밭으로 변하고 있다.
▲ 제암리의 3.1운동 기념비석화성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장이자 3.1운동 당시 가장 극심한 저항운동이 펼쳐진 고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암리에선 수많은 주민들이 일본헌병들에 의해 비극적인 학살이 발생했다. ⓒ 운민
하지만 빠른 발전에 비해 우리가 화성에 대해 아는 정보는 극히 드물다. 굳이 꺼내자면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배경이 화성이었던 만큼 그리 썩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나마 하루에 두 번 바닷길이 열려서 건너갈 수 있는 제부도 정도가 화성의 명소로 유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매향리에 산재하는 수많은 미국의 미사일들화성의 매향리는 오랬동안 미국의 기지가 있던 곳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각종 고통에 시달렸다. 이젠 기지는 이전하고, 그 기억들을 남기기 위해 많은 시도가 펼쳐지고 있다. ⓒ 운민
그 아픔은 현대에 들어서도 지속되었다. 아름다운 갯벌을 가진 매향리 마을은 2005년 미국 공군기지가 폐쇄되기 전까지 반세기에 걸쳐 주택이 파괴되고 소음과 난청, 포탄 연기로 주민들의 생활이 피폐해졌다. 이제 그런 아픈 기억들을 역사 너머로 보내고 국제도시로서 도약만 남겨두고 있는 화성이다.
수원과 한 몸이었던 화성
화성이란 명칭은 어디서 나오게 되었을까? 조금만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수원화성에서 유래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과 이곳 화성시는 비교적 가까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연관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원래 수원과 화성은 같은 고장에 속해 있었다. 1413년, 태종 13년에 수원도호부로 개편되어 지금 수원, 화성, 오산 땅 전체를 수원이라 불렀다. 원래 수원의 중심지는 지금의 화산동 일대, 용주사와 융건릉이 들어선 구역으로 400년 가까이 수원의 행정을 담당했다.
지금의 수원은 사실상 변두리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조대왕이 즉위하고,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을 지금의 화산동 일대로 이전해서 현륭원이라 개칭하면서 많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수원의 중심지를 수원화성을 쌓게 되면서 원래 있던 수원부 관아와 시가지는 물론 주민들도 전부 이주시킨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수원의 이미지를 지우려고 한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흔적을 살피기 어려울 정도로 읍성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수원대학교 후문 쪽에 일부 토성터가 남아있다고는 하나 정확한 크기와 성문의 위치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도 수원 화성(華城)의 명칭 자체가 화산동의 동산 화산(華山)에서 나온 것인 만큼 옛 수원의 역사는 충분히 계승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처지가 바뀐 수원과 화성은 한 몸으로 세월을 한동안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수원읍(지금의 수원)이 시로 떨어져 나갔다. 남은 읍과 면 지역을 화성군이라 통칭하게 되면서 두 도시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현재는 도회지 일대의 동구역만 시로 지정하고, 나머지 면과 읍으로 이뤄진 지역은 군으로 분리를 시켰다.
대신 원래 한 몸이었던 도시의 옛 이름이나 고장을 연상시키는 명칭으로 분리된 시와 군이 이질감이 들지 않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경주시와 감포, 외동을 포괄하는 월성군이 있었으며 청주와 그 주변의 청원군, 전주와 옛 완산주의 명칭에서 따온 완주군이 있다.
세월이 흐르며 광역지자체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면서 시와 군 지역은 대부분 도로 합쳐지게 되었지만, 이 둘은 아예 다른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화성은 심지어 1989년 오산읍이 오산시로 분리돼 떨어져 갔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성장을 거듭한 끝에 2001년 화성시로 승격되었다. 이제 화성은 수원의 영향권을 넘어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는 중이다.
자연 풍경과 역사 명소가 풍부한 서쪽
이제부터 화성의 매력을 눈을 크게 뜨고 함께 찾아가 보기로 하자. 화성은 그 넓이만큼이나 지역 간의 편차가 큰 편이다. 우선 수원과 근접한 화성의 동쪽 지역은 병점역 일대의 개발을 시작으로 동탄신도시가 들어서게 되었고, 그 일대가 연담화된 큰 도회지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서쪽은 다르다. 물론 향남, 봉담, 남양읍의 개발이 우후죽순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넓은 땅만큼이나 다양한 자연 풍경과 역사적인 명소들이 모여있다. 예전에는 남양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던 기존 화성군과는 다른 행정구역이었지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합쳐지게 된 동네다.
우선 자연이 살아 숨 쉬는 화성의 서부지역으로 첫 장을 열어보도록 하자. 평택시흥고속도로를 타고 안산에서 시화호를 건너게 되면 바로 화성의 송산면 지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일대는 포도로 특히 유명한 동네라 할 수 있다.
근처 대부도와 안성의 서운면, 천안 입정면까지 거대한 포도 벨트를 이루고 있는데 가는 길목마다 포도를 파는 매대가 널려 있으니 당도가 높은 포도를 한번 드셔 보는 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한다.
▲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공룡알 화석산지의 풍경공룡알 화석산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중간 중간 작은 동산처럼 생긴 곳은 예전 섬이었고, 염분이 덜 빠진 토양이 그대로 남아있다. ⓒ 운민
각설하고, 이 송산면 지역에는 세계적인 규모의 공룡알 화석산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천연기념물 414호로 지정된 화성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라 불리는 곳인데 원래는 바닷속에 잠겨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시화호의 물막이 공사로 인해 물이 빠져 원래 바다였던 고정리 주변의 섬들은 육지가 되었고 섬들의 퇴적층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공룡알 화석이 대거 발견된 것이다.
공룡알 화석산지는 현재 트레킹 코스가 훌륭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방문자 센터에서 출발해 왕복 3km의 거리를 데크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충분히 감상이 가능하다. 공룡알 화석 자체도 쉽게 접하기 힘든 진귀한 볼거리지만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본래 갯벌이었다가 육지로 변화는 그 과정 자체를 적나라하게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금기가 보이는 구간에는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이고, 염도에 따라 붉은색 기운을 띈 나문재, 칠면초 등 좀처럼 보기 힘든 염생식물들을 관찰해 볼 수 있다. 오래 지속되는 더위에 별다른 그늘이 없어 편한 여정은 아니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될 화성 답사의 에피타이저로서 이만한 장소는 없다고 생각한다.
▲ 공룡알 화석이 남아있는 퇴적지층의 풍경공룡알 화석산지에는 수많은 섬들이 육지가 되었고, 퇴적지층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이 퇴적지층에서는 공룡알 화석들이 대거 남아있었다. ⓒ 운민
덧붙이는 글
9월초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권>이 출판됩니다. 많은 사랑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번주부터 팟케스트 탁피디의 여행수다에서 경기별곡 라디오가 방영될 예정이니 많은 청취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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