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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별곡] 삼국 통일, 그 바탕엔 화성 당성이 있었다

등록|2021.08.27 10:42 수정|2021.08.27 10:42

산등성이를 타고 뻗은 화성당성의 모습화성 당성은 주요 교통요충지로 큰 역할을 수행했다. ⓒ 운민


2005년~2006년에 방영된 KBS-NHK-CCTV 한중일이 공동 제작한 다큐멘터리 <신실크로드> 10부작을 흥미롭게 시청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광활하게 펼쳐진 사막, 화려한 벽화와 불상이 개미굴처럼 사방에 가득한 석굴사원들, 그 이국적인 볼거리들로 인해 한시도 눈에서 떼기 힘들었다. 하지만 서역의 흥미로운 풍경들보다 아직 뇌리에 남은 한 장면이 있다.

바로 실크로드에 서려 있는 예전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들이다. 투루판과 둔황 일대의 석굴 벽화 속에 남겨져 있는 조우관을 쓴 인물들은 삼국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다.

뿐만 아니라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도 둔황석굴이었으며, 고선지 장군의 무대도 바로 실크로드였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우리 땅의 사람들이 이 길을 거쳐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갔거나 혹은 더 멀리 이스탄불과 로마까지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크로드의 출발점, 장안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고구려인을 확대한 모습.우즈베키스탄의 아프라시압유적 벽화에는 고구려 사신의 벽화가 남아있다. 우리 조상들은 실크로드를 건너 저 멀리 오아시스 도시까지 흔적을 남겼다. ⓒ 불교신문

 
과연 그들은 어디서부터 그 먼 여정을 떠났을까? 흔히 실크로드의 출발점은 장안(지금의 중국 시안)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 시기의 장안은 중화 문명뿐만 아니라 멀리 서역의 문물이 집결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일찍이 불교가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왔으며, 그리스도교 계열의 네스토리우스교(경교)도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들어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들도 이때 대거 이주했다. 그들의 후예는 여전히 시안에서 가장 번화한 회족 거리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우리의 조상들도 장안에 모여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그들이 존재감을 과시했었다. 당나라 시기에는 빈공과(賓貢科)라 불리는 외국인 전용 과거 시험이 있었다. 합격자의 80%가 신라인이었으니 실로 대단하다는 말밖엔 표현할 말이 없다.

그중 우리가 알고 있는 최치원 선생을 비롯하여 후백제의 책사로 알려진 최승우, 고려 건국의 기틀을 세운 최언위 등이 '신라3최'로 명성을 흩날렸다. 그 밖에도 수많은 고승이 불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중 일부는 실크로드를 거쳐 서역까지 닿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 조상들이 서역으로 가기 위해 어디를 거쳐왔을까? 그 해답은 바로 경기도 화성에 남아있다. 그러기 위해선 천 년 전 삼국시대의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동남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형세라 불교, 율령 등을 가장 늦게 받아들이고, 발전 속도도 가장 뒤처진 국가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 강대한 고구려, 백제를 꺾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을까?

삼국 통일, 그 밑바탕에는 당성이 있었다
  

당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본 전망당성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화성 일대의 전망이 훤히 보인다. ⓒ 운민


분명 '당나라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언급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끝내 당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는 데 성공했다. 그 밑바탕에는 화성에 위치한 당성(唐城)이 있었다.

신라가 진흥왕 시절에 처음으로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이후, 중국과 바로 통하는 항구로서 당성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당성을 통해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수많은 사신이 오고 다녔고, 특히 김춘추는 당성을 통해 당나라 황제를 만나 구원병을 요청했다.

통일신라 시대에 당성은 바다를 건너 중국과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신라의 고승들, 학자들이 당나라로 유학 갈 때 이 당성을 거쳐서 지나갔다고 전해지니 지금의 부산항, 인천항 같은 위상을 지녔을 거라 추측한다.

세월이 흘러 당성은 점차 잊히고, 무너진 석벽만 남은 상태였는데 1998년 발굴 조사로 당성의 진면모가 밝혀졌다. 문헌으로만 전해져 내려 오던 당성이었는데 여기서 발굴된 당(唐) 자명 기와로 인해 위치가 확증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수많은 중국 도기들이 출토되었으며 화성 당성이 1차 성과 2차 성의 복합 산성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1차성은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고, 2차성은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계곡부까지 포함하는 포곡식 산성이다.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전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때임을 감안하면 군사적 성격이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고, 통일신라 시대에는 무역, 교류를 위한 기지였기에 무역항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 주된 업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현재 당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송산면의 중심지인 사강리를 거쳐서 지나가야만 한다. 마침 장날이라서 그런지 시장을 찾기 위한 차들의 행렬이 줄지어 들어온다. 그곳을 빠져나오느라 시간을 조금 허비하긴 했지만, 예전 신라시대 당시 당성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상상하며, 시간여행을 떠나는 초입으론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릉지가 연이어 펼쳐진 지형을 지나 제법 높은 산이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당성 터널을 지나게 되면 이정표와 함께 화성 당성의 방문자센터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당성을 한 바퀴 도는 트레킹 코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송나라 시대 도자기 파편, 국제 무역기지 짐작케하다
 

당성 입구에 세워진 당성사적비의 전경한동안 잊혀졌던 화성당성. 여러 차례 이뤄진 발굴을 통해 그 진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수많은 실크로드 답사객들이 그 출발지로서 화성 당성을 찾고 있다. ⓒ 운민


당성으로 오르는 계곡 입구에는 근래에 세운 듯한 당성 사적비가 우람한 자태로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근처에는 경상북도 실크로드 답사회에서 왔다 간 흔적들이 눈에 띈다.

실크로드라는 네 글자만 봤을 뿐인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일단 계곡을 따라 쭉 걸어서 올라가 보기로 한다. 10여 분 동안 제법 경사가 있는 길을 올라가다 보면 눈앞에 수영장 2개가 들어갈 만한 거대한 웅덩이를 발견하게 된다.

집수지 또는 연못지라고 불리는 터로 성안에서 쓰는 물을 보관하던 곳이다. 사각형의 구조이며 돌을 쌓아 그 형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특히 이 구덩이 안에서 도기류, 자기류, 기와류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눈여겨 살펴봐야 할 점은 송나라 시대의 도자기 파편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로 미뤄볼 때 고려시대에도 화성 당성이 국제 무역기지로 큰 번영을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당성의 집수지터의 모습당성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갔던 요지 였던 만큼 그들의 생활을 위한 수원시설을 갖추는 것이 중요했다. 물을 보관했던 웅덩이를 집수지라 불리고 이터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 운민


이제 성벽을 따라 화성 당성의 참모습을 볼 차례다. 동문지에서 산길을 힘겹게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난다. 이 일대를 감시해야 하는 성의 입지로서 정말 탁월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여기를 점령하기 위해서 삼국은 국가의 명운을 걸고 치열한 전투를 펼쳤을 거라 예상한다. 예전의 영화는 온데간데없고, 무성히 자란 풀밭에는 메뚜기들과 여치들만 뛰놀고 있었다.

이제 화성 당성의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했다. 저 멀리 서해는 물론이요. 앞서 방문했던 화성 공룡알 화석지도 훤히 보인다. 예전엔 수많은 상인과 유학생들로 번성했을 당성 일대였지만, 지금은 다소 황량한 풍경에 쓸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서역으로 가는 출발지로 번성했던 과거를 지닌 화성시에서 그 길을 따라 화성 실크로드 길을 트래킹 코스로 개발했다. 이제 그 루트를 따라 예전 화성의 모습을 유추해 가도록 하자.
덧붙이는 글 9월초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권>이 출판됩니다. 많은 사랑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번주부터 팟케스트 탁피디의 여행수다에서 경기별곡 라디오가 방영될 예정이니 많은 청취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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