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자기 일당으로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 사주던 그처럼

[노동공제 ②] 폭넓은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노동운동

등록|2021.09.01 09:56 수정|2021.09.01 09:56
☞이전기사 : [노동공제①] 한국 노동운동은 실패했다, 그 이유 http://omn.kr/1v0nq
 

▲ 2019년 12월 진행한 ‘노동공제회의 실험과 노동자 조직화 전망’ 토론회에 함께한 참가자들 ⓒ 서울노동권익센터


공제(共濟)는 '함께 건너다'라는 뜻이다. 누가 누구와 함께 건너는가? 노동자가 노동자와, 노동자와 시민이, 노동과 생활이 함께 이 어려운 시간, 환경을 건너보자는 뜻이다. 지금은 전 지구가 기후생태 비상으로 인류의 생존, 지속가능성이 염려되고 있는 엄중한 시기이다. 산업과 노동의 대전환이 진행되면서 노동집약적 산업, 화석 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이 퇴출당하고 있으며, 자동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더불어 플랫폼 산업의 성장에 따라 산업·노동·생활 형태 또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정 노동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직은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것을 매일매일 지켜보고 있다. 노동력을 제공해서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조건과 환경이 변한다는 것은 노동자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의 가족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조건과 환경이 변할 수밖에 없는 중대한 문제이다.

노동은 생산수단이기도 하고 상품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창조의 원천이자 견인차로써 존엄한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통해 지켜내고 지향했던 가치는 더 좋은 생산수단, 더 비싼 상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존엄을 위해서였다고 믿고 있다.

개별 노동자의 이익, 개별 기업, 개별 산업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개혁(인권, 복지, 민주주의 등)을 위해 투쟁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대안을 제시해온 노동운동의 전통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한국의 노동운동은 사회개혁과 노동자의 지위 향상에 공헌한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노동 내부의 분절과 양극화, 사회개혁 세력으로서의 신뢰 상실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개혁을 위한 폭넓은 사회적 연대에 만족할 만한 모습과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대기업과 상위 20% 노동자들이 중심인 조직, 그들의 관심이 우선되는 노동운동의 경향성이 강화되면서 노동 내부에서도 포용성과 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상부상조에 기반을 둔 노동공제회

노동공제연합 풀빵을 시작한 이유는 노동운동의 전통을 성찰하면서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의 와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문의 노동자들 스스로가 먼저 대응해보자는 것이 가장 큰 것이었다. 사회보장 제도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제자리를 찾기 힘든 노동자들이 스스로 찾아낸 자구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정하고 취약한 조건을 가진 노동자들의 힘만으로는 변화와 불안의 강을 건너기 힘들 것이다. 다양화, 다원화된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취약한 조건에 놓인 노동자들이 노동과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한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의 존엄을 가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공제회는 기본적으로 상부상조의 원리로 운영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구성원들의 자주, 자강이 가장 중요하지만, 제도와 정책의 도움이 필요하고, 각계 전문가들, 시민사회 협력이 필요하다. 불안정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중심이기 때문에 초기엔 재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기존 노동운동과는 다른 차원의 전문성을 채워줄 수 있는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의 협력과 연대도 중요하지만, 협력과 연대가 필요한 근본적인 성찰의 지점이 있다.

첫 번째, 소외되고 배제되면서 부속품으로 여겨지는 노동의 존엄성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사회 제도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들 스스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위는 물론이고 물질적으로도 불안정하고 취약한 노동자 혼자 힘만으로는 달성 불가능한 목표이다. 한 줄 한 줄은 약하지만 엮이고 꼬여지면 강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엄성, 노동 존엄성은 관계 안에서 드러나고 구현될 수 있다. 따라서 소외되고 배제된 노동자들이 존재 자체로서 존중받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선한 목적을 가진 관계 안에 존재할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단순한 물질적 이익을 가지느냐 아니냐를 뛰어넘는 보다 깊고 높은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두 번째, 노동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지금의 노동운동은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가장 취약한 환경에 놓인 80%에 달하는 노동자들을 품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한다면 노동운동 내부에서부터 조직적 동력도 약화할 것이고 사회적인 신뢰와 영향력도 급격하게 감소해갈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풀빵에서는 준비단계에서부터 '노조와 함께 가는 공제회, 공제회를 품는 노동운동'이라는 노동공제회의 정체성과 지향을 분명히 했다. 노동공제연합 풀빵이 노동 내부의 연대와 협력의 도구로 쓰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 번째, 대전환이 정의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전환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존중받아야 하고 새로운 기회를 우선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이론이든 이념이든 불평등,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를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라고 하지 않는다. 불평등과 양극화는 일부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함께하지 않고는 정의로운 전환은 불가능할 것이며 평화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가장 심각한 우리 사회에서 자조, 자립, 자주, 자강의 정신으로 시작한 노동공제연합 풀빵 운동에 온 사회가 협력하고 연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지평을 넓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는 노동 조건 개선과 더불어 노동자가 온전한 한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염원하였다. 평범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노동자도 인간이며 생활인이다. 공장에서, 작업장에서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가족의 구성원이고, 이웃이며, 주민이고, 시민이다. 모든 인간은 다중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다.

이제는 노동운동도 시민운동도 인간이 가진 다중 정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품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난 시절 억압적인 정치적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 제 일의 임무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절에 형성된 관행을 바꾸어야 한다. 환경도 시대도 변했고 세대도 바뀌고 있다. 자본의 상대적 존재로서, 노동하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되 동시에 넓은 생활의 영역을 보듬을 줄 아는 노동운동으로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공부하고 조직하고 투쟁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일당을 쪼개고 나누어서 배고픔에 시달리던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나누어 주고 자신은 그 먼길을 걸어 다니던, 부당한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면서 노동자들의 자주적 기업인 '태일피복'을 꿈꾸던 전태일 열사의 '나눔과 꿈'이 노동운동, 노동공제회 운동의 협력과 연대의 근거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상호 협력과 연대를 통해 노동운동은 노동공제회의 기반이 되어주고, 노동공제회는 노동운동의 지평이 어떻게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는지 보여줄 수 있기를, 어렵고 힘든 대전환의 시기를 어깨 걸고 함께 건너갈 수 있기를 또한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송경용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입니다.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9,10월호 '특집' 꼭지에도 실렸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