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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 한번 없이 세상 조용한 국가원수묘역, 그 주인공은...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대전현충원 ⑫] 최규하, 역사의 피해자인가, 죄인인가?

등록|2021.09.06 07:27 수정|2021.09.06 07:27

▲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홀로 안장되어 있는 최규하 전 대통령 묘 ⓒ 김영호


국립대전현충원 둘레길 제2코스를 걷다보면 약간은 경사가 있어 한번쯤은 숨을 고르게 되는 지점에서 내려다 보이는 최규하 전 대통령 묘소. 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을 홀로 쓸쓸하게 지키고 있는 최 전 대통령의 묘소를 지나칠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생긴다. 생전에도 대통령 대접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더니 사후에는 서울현충원에 누워 있는 전직 대통령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한 모양새라는 느낌이 들어서다.

허수아비

우리나라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19대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12명의 전·현직 대통령이 있고, 7명은 돌아가셨다. 5명이 생존해 있는데, 그 중 1명은 현직 대통령이다. 별세한 대통령들 중에서 초대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고, 윤보선, 노무현 대통령은 선영이나 가족 묘원에 잠들어 있다. 2006년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만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마저 없었더라면 대전현충원은 국가원수 묘소 없는 국립묘지이었을 터이다.

최규하는 우리나라처럼 이념 대립이 심한 나라에서 보수, 진보 진영 양측 모두로부터 특별한 안티나 추종 세력이 없는 유일한 전직 대통령이기도 하다. 바꾸어 생각하면 그만큼 존재 가치가 희미하다는 뜻인데, 그러기에 최규하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허수아비다.

<오마이뉴스>에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를 연재했던 박도 시민기자는 그를 '그저 주운 벙거지를 쓴 허수아비'라고 평가했는데 벙거지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벙거지는 조선시대 궁중 또는 반가의 군노나 하배가 쓰던 모자를 뜻한다. 가을철 논 한가운데 허름한 벙거지를 쓰고 양 팔을 벌린 채 홀로 서있는 껑청한 키의 허수아비와 덩치가 크면서도 겁이 많은 듯 보이던 큰 눈망울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10대 대통령으로서 국가 원수이자 국군 통수권자였던 고인을 너무 희화화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미 형성된 이미지를 바꾸기란 쉽지 않으니 최규하 인생사에 있어서는 영욕(榮辱) 중 욕(辱)에 해당되는 부분일 터이다. 그렇다면 영(榮)의 부분은 언제였을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런 피습으로 최규하 국무총리는 다음 날 새벽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고, 그로부터 40여일 만인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누구누구는 대통령 자리를 더 하기 위해 무리하게 헌법을 몇 차례 바꾸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재수, 삼수를 거쳐 사수 끝에 그 자리에 어렵게 앉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그 자리가 코앞에 보였는데 마지막 순간에 오르지 못했던 자리다. 어부지리처럼 얻은 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순간 최규하가 느꼈을 감정은 가슴 벅찬 영광이었을까, 아니면 가슴 짓누르는 부담이었을까?

영광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로부터 약 8개월 후인 1980년 8월 16일의 퇴임이 아쉬웠을 테고, 부담으로 받아들였다면 후련하였을 텐데, 도대체 입을 꾹 다물고 그 흔한 자서전 하나 출간한 적 없으니 사람들 모두 제 나름대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최규하는 1919년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진학해서 당시 수재들만 다닌다는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했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 졸업 후에는 잠시 교사 생활을 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관리 양성 학교였던 대동학원을 마치고 일본이 괴뢰 정권으로 세운 만주국에서 관리로 일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 조교수로 잠시 근무하다가 1946년 미 군정청의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무원 생활의 첫 발을 디뎠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변영태 외무부장관의 천거로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되었다. 그의 나이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고위 공직에 발탁된 것을 보면 출중했다고 알려진 영어 실력뿐만이 아니라 공무원으로서의 능력이나 자질도 뛰어났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주로 외교관으로서 활동하다가 1967년에 외무부장관 그리고 드디어 1975년에는 직업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의 자리라 할 수 있는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무덤까지 가져간 12.12의 비밀
 

▲ 최규하 전 대통령이 한국 현대사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된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입관식이 진행되고 있다. ⓒ 임윤수


여기까지가 최규하에게 있어서는 영(榮)의 시간들이었을 터다. 봉건시대였다면 만인지상 일인지하(萬人之上 一人之下)라고 하는 자리가 국무총리인데, 여기서 공직생활을 마감하였더라면 성실하고 청렴한 이미지의 공직자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26과 12.12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 최대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된 역할도 하지 못하고 무능한 허수아비라는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그의 개인사로나 우리나라의 역사로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최규하는 역사의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본인이 원했든 아니든 간에 공직을 맡은 사람에게는 그 자리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는 대통령이었다. 어떻게든 유혈의 비극은 막아야 할 지도자였다. 힘이 부쳐 막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시도는 보여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적극적인 노력이나 지도력을 발휘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 강준식, <대한민국 대통령들>, 233쪽

신군부의 위협을 막아내지 못해 현대사의 시계를 10년쯤은 뒤로 돌리게 한 책임을 그 혼자에게만 짊어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낸 신군부 세력의 집권 하에서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내내 남아 있었던 것을 보면, 옳고 그름이나 소신에 의한 능동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보신주의가 몸에 밴 전형적 직업 관료에 불과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신군부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라거나 "국정이 혼란할 경우 안보가 흔들릴 수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는 변명조차도 못하고, 5공 청문회와 재판정에서도 입을 굳게 다무는 것으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면 역사의 죄인이다.
 

▲ 2006년 10월 26일 고 최규하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이 경복궁 앞뜰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는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돼,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에 숨졌다. 향년 88세. 병원 측은 그의 사인이 급성 심부전증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10월 26일엔 국민장 형식으로 서울 경복궁 흥례문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많은 사람들이 재임 당시 신군부에 관련된 일을 기록으로라도 남겨놓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끝내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갔다.

몇 년째 현충원 산책을 다녀도 참배객은 거의 볼 수 없고 묘지를 지키는 초소 하나만 덜렁 있을 뿐이다. 초소에는 대전현충원 소속 의전단 단원들이 돌아가며 근무를 하고 있다. 의전단의 주 업무는 안장식의 진행 등을 돕는 일인데, 국가원수 묘역 초소 근무도 부수적으로 맡고 있다는 것이다. 참배객은 가끔 단체로 참배하는 학생들 외에는 하루 평균 10명 내외였으며 그마저도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없다고 한다.

살아서 조용한 삶을 영위했듯 죽어서도 그의 묘역에서는 해프닝이나 특별히 돌출적인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다. 초소를 지키는 한 단원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관계없이 국가 원수를 지낸 분에 대한 예우를 위해 참배객 안내와 묘역 관리에 정성을 다할 뿐"이라고 말한다.
 

▲ 최규하 묘에 있는 추모비에는 40년 공직생활 중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은 근면성과 책임감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 김영호


초소와 함께 묘역을 지키고 있는 추모비에는 모든 추모비가 그렇듯 고인의 생전의 업적을 미사여구로 장식해놓아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들도 있다. 하지만, 40년 공직생활 중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은 근면성과 책임감 그리고 청렴결백의 미덕이라는 구절은 대통령부터 말단 공직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복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최규하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평가와 구분하여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국립현충원 모든 무덤은 '묘'로 통일
조선시대 왕의 무덤은 능이라 했지만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칭한다. 조선시대 같았으면 최규하 전 대통령의 묘도 '능'이라 칭했을 것이다. 왕의 무덤을 지키는 관리가 있었는데, 9품 말직의 관직인 '능참봉'(陵參奉)이다. "나이 칠십에 능참봉"이라는 말이 있다. "나이 칠십에 능참봉을 하니 하루에 거동이 열아홉 번씩이라"는 속담을 줄인 말이다. 70세의 나이까지 선비로 있다가 마침내 능참봉이라는 관직을 얻었는데, 녹봉도 적고 별 권한도 없는 실속 없는 자리인데다 하루에도 열아홉 번씩이라 할 만큼 왕의 행차가 잦아 힘들다는 뜻이다. 실속 없이 바쁜 상황을 빗댈 때 쓴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사실 능참봉들이 왕릉 관리에 힘쓴 덕분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조선왕릉관리소에서 문화재청 직원들이 능참봉의 역할을 계승하고 있고 국립현충원에서는 국가보훈처 직원들과 현충원 직원들이 그 역할을 맡아 하고 있다.

'능'의 한 단계 아래 격인 무덤을 '원'(園)이라 한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세손과 왕세손비나 왕의 생모인 빈(嬪)과 왕의 친아버지 무덤을 칭하는 말이다. '묘'(墓)는 기타 왕족과 일반인들의 무덤을 말한다. 하지만 봉건 왕조 이후에는 지위나 신분을 망라해 모든 무덤을 '묘'(墓)로 칭한다. 마찬가지로 국립현충원에서의 모든 무덤은 '묘'로 통일된다.

이 외에도 '총'(塚)과 '분'(憤)이 있다. '총'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벽화 등 특징적인 것이 무덤에 있을 경우에 붙는다. 장군총·무용총·쌍용총 등이 있다. '분' 역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때 쓰는데, 특징점조차 없을 경우에 붙인다. 능산리고분 등이 예이다.
 

▲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영릉)의 모습 ⓒ 우희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 사회적협동조합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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