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인터뷰 요청에 돌아온 반응, 트라우마가 됐다
[차별금지법과 나] 장애 있어도 장애 느끼지 못 하는 사회를 빨리 만들어야
살면서 차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차별금지법은 우리 모두를 위한 법입니다. 기획 '차별금지법과 나'에서는 시민기자들이 주변에서 보고 직접 경험한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며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촉구합니다. 많은 시민기자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도서출판 사우. 책 표지 ⓒ 문세경
"귀가 잘 안 들리는데 어떻게 인터뷰를 하고 책을 냈어요? 대단하네요."
지난해 6월부터 활동가 인터뷰 기사를 써서 1년 동안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정확히는 1년 2개월 동안 열여덟 명의 활동가를 만나고 기록했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진행하는 공모전에 활동가 인터뷰 원고를 보냈다. 기대하지 않았던 내 원고가 선정되었고, 책 만드는 비용을 지원받았다.
1년 동안 무던히 애쓰던 결과물이 나와서 뿌듯하고 기뻤다. 무엇보다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 책을 내고 '작가'가 됐다는 것보다 좋았다.
장애인의 인터뷰
'청력이 안 좋은 사람이 어떻게 인터뷰를 해서 책을 냈지?'라는 의문은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청각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고 '복지카드'를 가지고 있다. 청력이 많이 안 좋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보지 않고 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의학적인 기준(비장애인은 25~35db, 나는 35~40db)으로 보면 청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는 아니다. 그럼에도 상대방의 입모양을 봐야만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고, 전화 통화는 불가능하다. 보청기를 써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나와는 맞지 않아서 쓰지 않고 있다.
난 초등학교 5학년 때 갑자기 청력이 안 좋아졌다. 여러 경로로 검사를 받았지만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원인은 스트레스성 청신경 손상이다. 좋지 않은 청력으로 40년째 살고 있지만 가끔 대견하다는 생각도 한다. 왜냐하면 귀가 잘 안 들린다고 기가 죽거나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며 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사회가 내 의지와는 다르게 작동할 때가 있다. 의욕은 넘치고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시작하기도 전에 태클을 걸어올 때가 그렇다.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태클'은 이렇다.
▲ 청각장애 ⓒ 언스플래쉬
십여 년 전, 글쓰기 모임에서 '기록되지 않은 노동'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로 했을 때다. 나는 요양보호사를 만나 그들이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듣고 싶었다. 마침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지인이 떠올라서 약속을 잡고 그를 찾아갔다. 그는 대뜸 내게 물었다.
"나는 문세경씨가 청력이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인터뷰를 할 수 있나? 얼마나 들리고 얼마나 안 들리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당신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가 곤란하다."
처음 만나서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위와 같은 말을 하는 그를 보고 나는 몹시 당황했다. 매우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의 장애를 이해할 거라고 믿었다. 식사도 같이한 적이 있고,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상식을 갖고 있을 거라 믿었던 사람에게서 듣은 말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얼굴은 달아올랐고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인터뷰는 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당신의 반응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인 것을 아느냐'는 내용으로 메일을 보냈다.
그는 '내가 출마한 적도 있고, 성소수자 운동도 하는 사람인데 당신이 청각장애가 있다고 인터뷰를 거절했을 리가 없다. 나는 단지 당신의 장애 상태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서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전형적인 자기 합리화라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그의 행동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차별에 해당하는 언행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몇 번의 메일이 오갔고, 인터뷰를 거절한 것은 명백한 장애인 차별이므로 나는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사과하기를 꺼렸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도 없이 인터뷰를 거절하는 행동을 했겠지.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인의 생각도 나와 같았다. 삼자 대동을 하고 사과하기를 요청해 겨우 사과를 받았다.
그 일을 겪은 지 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때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청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만나서 밥 먹고 수다를 떨었던 적도 있었던 사람이 본인을 인터뷰하겠다고 하니까 '감히 청력도 안 좋은 네가 나를 인터뷰 해?'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것에 여전히 모멸감을 느낀다. 그 일을 겪고 며칠 동안 잠을 못 자며 분노했고,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장애를 모른다
아찔했던 또 하나의 사례는 3년 전에 있었다.
나이는 들어가고 청력도 좋지 않아 사회복지사라는 자격증이 있음에도 일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선배의 중재로 어렵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서울역 인근의 노숙인 지원센터에서 노숙인의 안전을 살피는 아웃리치(거리상담)를 하는 일이었다. 밤 7시 반부터 밤 10시 반까지 서울역 주변을 돌면서 인근에 있는 노숙인의 안전을 살피고 간단한 상담을 하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니까 2인 1조를 원칙으로 하고 움직인다.
매일 순찰을 도는 지역이 바뀐다. 아웃리치 상담원이 오늘 순찰 돌 지역은 노숙인지원센터 직원이 정해준다. 그날은 용산역 인근의 노숙인 텐트촌으로 정해졌다. 텐트촌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안부를 확인하고 간단한 상담을 하려면 사람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깜깜한 밤이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나는 웬만하면 텐트촌으로 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직원은 나를 그곳으로 배치했다. 캄캄해서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상담하기가 곤란하니 나를 다른 곳으로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은 나의 요청을 거부했다.
캄캄한 텐트촌에 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럼에도 내가 갈 지역을 바꿔주지 않는 직원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진 장애를 배려받지 못한 것 같아서 화가 났고, 엄연한 차별이라고 느꼈다. 어떤 말로도 설득이 되지 않았고 직원은 상담 지역을 바꿔줄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허탈했다. 며칠 후, 결국 3시간짜리 그 일을 그만두었다.
다음은 흔히 겪는 일이다.
복지카드를 제시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복지카드가 있으면 고속도로 통행료가 50% 감면된다. 얼마 전에 내 복지카드 유효기간이 만료되어서 더 이상 고속도로 통행료 감면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새로 발급받으려면 주민센터에 방문해 새 복지카드를 만들어야 한다. 주민센터에 방문해서 사정을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 아닌가. 어느 한 사람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마스크는 나에게 소통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덫이다. 복지카드를 재발급받는 사소한 민원을 처리하러 간 주민센터에서는 내 사정을 알 리가 없다. 사정을 얘기해도 마스크를 잠깐 내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마스크 벗고 말하다 코로나에 걸리면 책임을 나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바로 필담이다. 필담은 종이에 글로 써서 소통하는 방법이다. 담당 직원에게 종이에 써서 말해 달라고 했다. 그럼에도 글로 쓰지 않고 마스크도 내리지 않고 말하는 직원을 보며 나는 절망했다. 이 사람은 장애감수성이 정말 없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주민센터의 모든 직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민원인을 상대하는 주민센터의 직원이라면 최소한의 장애 감수성을 갖는 것은 당연한 거니까. 그날 나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외국도 아닌 국내에서 보디랭귀지를 하며 의사소통을 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벌였다.
27년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장애인인권운동단체에서 일했다. 그때만 해도 장애인단체는 열악했다. 정부지원은커녕 후원금 모으기도 벅찼다. 상근 활동가들은 활동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일했다. 활동가 대부분은 지체장애인 당사자였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의 이동권 싸움은 가장 비중이 컸다.
많은 활동가 중에 청각장애인 활동가는 나 혼자뿐이었다. 청각장애인은 장애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청각장애가 있다고 말하기 전에는 장애인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 동료 활동가가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청각장애인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장애인처럼 보인다. 그래서 거리감이 생긴다."
장애인 운동판에서도 '패'가 나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힘을 모아서 장애인 이동권 문제와 장애인 인권 보장 문제를 가지고 싸워도 모자랄 때에 '너는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장애와 달라서 괴리감이 든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나를 혐오하는 것처럼 들렸다.
얼마 전에는 한 지인이 내게 "당신은 남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했다. 보통 사람보다 취약한 청력을 갖고 있기에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듣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적인 자리마저 나의 장애를 온전히 배려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잘 듣지 않는다'는 말에는 나의 예의 없음을 탓하는 것과 동시에 '너와 대화하기 싫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말은 나의 취약한 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판단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취약한 청력으로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들으려고 했는데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이처럼 차별과 혐오가 내재되어 있는 상황을 마주할 때 나는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지 막막하다. 나 역시 언제 어디서 이런 실수를 할지 모르니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렇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판을 만드는 사회
▲ 휠체어 ⓒ 언스플래쉬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발전하고 있다.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며 사는 일은 비장애인도 힘들어 한다.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변하는 사회는 각종 위험을 내재하고 있기에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잠재적 장애인이라는 이야기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당하고 배제당하는 일이 빈번한 사회는 성숙한 사회가 아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장애를 느끼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은 하루속히 제정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인식개선의 첫걸음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활동가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돕는 문자통역사가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들린다.
"장애인을 시혜나 동정의 대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장애를 느끼지 못할 환경을 먼저 만들어 놓아야 해요. 그리고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펼쳐갈 삶을 기대하는 게 맞지요. '우리가 도와줄게'가 아니라 '당신이 활동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해봐'라고요. 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는 사회, 그런 사회를 빨리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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