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한 송이가 자라 밤 한 톨로... 귀한 광경을 봤습니다
가을의 열매, 밤의 성장 과정을 직접 목격하다
시골에서 자랐다. 가을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한두 되는 금방 주울 수 있을 정도로 앞산에도 뒷산에도 밤나무가 많았다. 우리 집에도 밤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앞집의 아름드리 밤나무가 마루에서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자랐다. 밤꽃은 유독 오래 핀다. 특유의 향도 진한 편이다. 이런 밤나무가 이처럼 가까이에 자라 그야말로 질리도록 보며 자랐다.
밤 한 톨이 영글어가는 과정
▲ 늘 보고 자란 밤나무인데 올해 처음으로 밤나무 암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흰색의 긴 꽃은 수꽃, 그 위 작게 핀 것이 암꽃입니다. ⓒ 김현자
▲ 수꽃에선 이제 꽃이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암꽃에는 아직 노란색의 꽃술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잘려 나간 줄기 끝에 새잎을 틔워 제법 크게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다시 가보니 새잎이 사라졌습니다. 텃밭을 일구며 알게된 것 중 하나는 제대로 버릴 수 있어야(가지치기) 탐스러운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아마도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잘라냈을 것 같습니다. ⓒ 김현자
비로소 기억난 것인데, 사실 예전에도 식물 관련 여러 책에서 읽으며 신기해 '꽃이 필 때 꼭 확인해보자' 싶었다. 하지만 막상 잊곤 했고 그래서 여전히 간과하고 있었던 것. 그래서 <내 마음의 들꽃 산책>을 밤꽃 필 즈음에 읽게 된 것이 정말 다행이다 싶다. 책을 읽다 밤나무로 달려가 확인하며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따금 찾아가 새끼손톱보다 작았던 밤꽃 한 송이가 자라 밤 한 톨로 영글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얻었으니 말이다.
밤나무 암꽃은 꽤 여러 날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 가까운 곳에 훨씬 큰 밤나무들이 무리 지어 자라 벌들이 그곳으로 몰려갔을까. 아니면 야생의 최고 천적이랄 수 있는 사람인 내가 가까이 있어서일까? 꿀벌은 거의 날아오지 않았다. 어쩌다 온 꿀벌도 수꽃만 잠깐 뒤적이다 갈 뿐, 암꽃에 앉는 것을 단 한 번도 못 봤다. 꽤 여러 날 암꽃을 만났는데도.
그런데도 어느 날 며칠 만에 만난 암꽃은 엄지손톱만 한 밤송이로 변해 있었다. 밤나무는 아까시나무와 함께 대표적인 밀원식물(진한 향기로 꿀벌을 많이 모아 양봉에 도움되는 식물)이다. 상대적으로 꿀벌이 많이 찾는다. 하지만 그처럼 날아든 곤충보다 바람에 의지해 수정하는 풍매화다. 그러니 밤나무 암꽃도 벌과 상관없이 열매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 밤송이의 가시는 장차 새싹을 틔울 씨앗인 '밤'을 보호하고자입니다, 때문일까요? 암꽃일 때 이미 가시를 갖추기 시작한 밤송이는 한동안 가시를 키우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 같습니다. 가시를 갖춘 후 몸집을 키우는 것 같고요. 처음에 가시로 촘촘했던 밤송이는 몸집이 커갈수록 가시 사이가 벌어진답니다.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수꽃이 마른 채로 꽤 오랫동안 밤나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 김현자
어느 날 우연히 눈에 들어온 꽃 한 송이가 의외의 즐거움을 주는 경험을 자주 하곤 한다. 지난 몇 달, 암꽃에 대한 호기심으로 밤나무를 만나며 알게 된 것들이 많다. 그중 하나는 '밤이 어떻게 제사상에 꼭 올려야 하는 과일이 되었는가?'이다.
몇 년째 텃밭을 일구고 있다. 씨앗을 뿌리면 싹만 올라오기도 하지만 껍질을 모자처럼 쓰고 나와 자라는 것들도 있다. 시금치나 무, 쑥갓처럼 작은 씨앗들이 대개 그런다. 한편 밤이나 도토리처럼 큰 알맹이에서 싹을 틔우는 것들은 싹이 돋아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심지어는 어린나무로 자랄 때까지 껍질이나 (바짝 쪼그라든) 알맹이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까지 알맹이의 양분을 흡수하며 성장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껍질이 오래 남아 있는 것은 비교적 무겁고 두꺼운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밤나무가 그처럼 자라는 것을 보고 '자신을 있게 한 앞선 세대, 즉 조상을 잊지 않는 나무'로 간주해 제사상에 꼭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왕이면 그와 같은 밤나무로 조상의 위패까지 만들어 쓰기도 하고 말이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식물 중에 그 식물을 세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를 그런 이름을 가진 것들이 많다. 밤이 제사상에 꼭 올려야 하는 과일이 된 연유도 밤나무가 싹 터 자라는 것을 자세히 살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작은 풀 한 포기도 허투루 보지 않고 자세히 살펴 이름을 지어주거나 생활 한 부분과 연결한 조상들의 삶이 느껴져 밤나무와의 만남도 남다르게 느껴진다.
제사상에 올리고, 목재로도 쓰고... 기특한 밤나무
▲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바쁜 사정이 있어서 미처 찾지 못했는데, 명절 인사를 하러 간 남편이 밤 한봉지를 얻어왔습니다. 그래서 찾은 해질녘의 밤나무는 어느새 밤송이를 벌려 품어 키운 밤알을 내보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 김현자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밤을 먹었을까? '2000여 년 전, 우리나라를 왕래하던 중국 승려에 의해 전해졌다'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밤은 중국 밤을 개량한 것과 1950년대 일본에서 도입해 품종 개량한 것들이 대부분. 당시 외부에서 들어온 밤나무 혹벌로 대부분의 밤나무가 고사할 정도로 피해가 크자 일본에서 해충에 강한 품종을 도입해 품종 개량, 10종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 자생밤나무는 오래전에 형성된 마을 인근에나 소수 자랄 것으로 추정한다. 1950년대 이후 품종 개량한 것들이 주로 심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자생밤나무는 200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평창 방림면 운교리 밤나무(기저 둘레 640㎝, 높이 14m), 지정 당시 370년 추정이다. 다음으로 오래된 나무로 추정하는 것은 광릉수목원 밤나무(기저 둘레 456㎝, 기저 직경 145㎝, 높이 14m)로 350년 추정이다.
한편 목재로써 밤나무는, 단단한데다 습기에도 강해 가구나 배를 만드는 데 널리 쓰였다고 한다. 특히 지난날 기찻길 침목으로 반드시 쓰인 목재였다고 한다.
그동안 밤나무는 '밤'이라는 포실포실 달콤한 과일을 주는 과실수로 거의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상대적으로 많은 이산화탄소를 저장함으로써 공기를 깨끗하게 걸러주는 허파 역할이 탁월한 나무로 알려져 그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2015년 국립산림과학원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밤나무의 ha당 연간 이산화탄소 흡수량은 8.3톤. 이는 승용차 3.5대분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을 상쇄하는 양으로 다른 식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양이라고 한다.
▲ 어제(11일) 해질녘 왼쪽의 밤송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을 본 터라 좀 더 활짝 벌어진 모습을 보고 싶어 다음날 갔더니 이미 누가 따버려 아쉬웠습니다. 이웃하며 자란 두 송이가 품어 키운 알맹이를 내보내고 빈껍데기로 남아 있기까지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남은 송이도 그 며칠 후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 김현자
▲ 죽은 밤나무 그루터기에 자라는 어린 밤나무입니다. 아직 어린 나무라서일까요? 3년 전부터 밤이 열리는데, 몇송이 열리지 않는답니다. 게다가 밤한송이에 딱 한알씩(회오리밤)을 맺고요. 이 밤나무는 언제쯤 쌍동밤 혹은 두개 이상의 밤을 품은 밤송이를 피울 수 있을까요? ⓒ 김현자
우리 집 밤나무는 기와를 올린 담을 따라 자랐다. 밤이 한창 익을 무렵이면 한동안 밤낮으로 떨어지곤 했는데, 특히 가을밤 공기를 가르며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에 선잠을 깨기 일쑤였다. 그런 즈음 어둠도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마다 동생들과 밤나무 아래로 달려가 눈을 비비며 이슬을 잔뜩 뒤집어쓴 밤을 한 바가지씩 줍곤 했다.
가을 내내 새벽마다 주운 밤을 불 속에 묻어 구워 먹곤 했는데, 엄마는 매일 주워온 밤에서 크고 야무진 것 몇 개를 골라내 모았다가 정지(부엌) 한쪽에 묻어두곤 했다. 이듬해 설날에 쓸 밤을 땅에 묻어 저장한 것이다. 그런데 크고 굵은 밤을 유독 많이 주웠던 날에도 엄마는 겨우 몇 개만 골라 지난 며칠 모아오던 바가지에 담곤 했다.
어렸을 때 그러려니, 별 의미 없이 받아들였다. 얼마 전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거의 잊어버렸다. 그런데 올해 밤나무 주변을 자주 맴돌게 되면서 엄마가 그랬던 것이 비로소 생각났고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몇 년 전 80대 중반을 넘긴 엄마는 이젠 많은 것들을 잊어버린 눈치다. 그런 엄마라 물어볼까? 말까? 며칠 망설이다 물어보니 선뜻, 명쾌하게 대답하신다.
"군입거리가 제대로 있었나. (제사보다) 자식들 입이 더 중허니(소중하니) 그랬지!"
어린 시절, 밤은 가장 달콤한 군입거리였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우리의 입을 행복하게 했다. 그렇다 보니 가을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하루에도 몇 번을 올려다보며 밤송이가 벌어지길 기다리곤 했다. 봄이면 밤나무 주변을 돌며 예쁜 밤 깍지들을 모아 소꿉놀이를 하곤 했다. 군입거리만이 아닌 많은 것들을 주는 밤나무였다. 그런 밤나무와 함께해온 것들이 오죽 많으랴.
고향을 떠나 살면서 한동안 밤과 관련된 수많은 일들이 떠오르며 그립곤 했었다. 가을이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암꽃과의 만남 덕분에 오랜만에 떠올리게 된 것이다. 뭣보다 기억 속에만 어렴풋이 있던 것을 엄마께 물어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며칠 전, 고이 품어 키운 알맹이를 떨어뜨린 밤송이는 이틀 후 빈껍데기로 떨어졌다. 새로운 생명을 바라며 품어 키운 알맹이들을 내보내는 밤나무를 보며 고향의 밤나무가 떠올랐다. 새로운 호기심도 생겼다. 올해 암꽃이 피었던 그 줄기나 그 자리에 암꽃이 다시 필까? 내년엔 아마도 암꽃 필 자리가 부풀어 오르는 것부터 보고 싶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기사, 개인 블로그에서 밤과 관련한 정보를 일부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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