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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차 맏며느리가 묻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시어머니가 늙어가는 일을 지켜보며

등록|2021.10.05 07:12 수정|2021.10.05 07:12
'낀40대'는 40대가 된 X세대 시민기자 그룹입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애쓰며 사는 지금 40대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또 한 번의 추석이 지나갔다. 추석 차례 3일 전 시아버지 제사가 있는 집안 하나 뿐인 맏며느리, 다름 아닌 나의 이야기다. 벌써 9년이다.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기름내 맡아가며 제사 음식 준비한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닥쳐오는 차례 준비로 같은 노동을 반복하고 몸살기에 끙끙거리다 보면 어느새 연휴가 끝나 있다. 차례를 간소화하거나 생략한다는 지인의 이야기나 뉴스를 들을 때마다 부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몸만 피곤하면 괜찮았을까? 마음 속에서는 초대형 태풍이 일었다. 시가의 가족 행사임에도 준비 과정에서 남편은 늘 소극적인 역할만을 담당했다. 제사 준비는 늘 여자들의 몫이었다. 시어머니 세대의 많은 분들이 그렇듯 어머님도 아들이 부엌을 들락거리는 걸 탐탁지 않으셨고 나로서는 그 상황이 편치 않았다. 매번 명절이 끝난 뒤면 거센 태풍의 흔적이 일상 곳곳에 남았고 후유증은 길었다.

난이도 높은 문제

어린 시절부터 자녀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부모님 밑에서 독립적인 성향으로 자라난 내게 시어머니는 늘 어려운 분이었다. 평생 자식과 떨어지지 않은 어머님은 적당한 거리를 두는 법을 잘 모르셨다. 사소한 걱정부터 커다란 의사결정까지 어머님이 깊게 관여하는 가족관계를 경험하면서 결혼하며 꿈꿨던 가정의 모습과 다른 현실에 내면의 갈등을 겪었다.

더군다나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으로 차별받고 구분지어지는 일에 불합리를 느끼고 있었던 내게 시어머니가 규정한 내 역할은 극복해야 할 문제를 도리어 심화시켰다. 그 연세 대부분의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님은 여성임에도 남성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전통적 사고관의 소유자셨다.

그 차이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이 바로 제사와 명절이었다. 제사 준비에서 대부분 남성은 빠지고 힘겨운 과정에서 여자들의 갈등만 고조되었다. 사회적으로 제사 문화가 서서히 없어지고 있는 추세지만 내게는 아직 요원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맏며느리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는 일을 평생의 삶의 동력이자 의미로 여겨온 어머님이 제사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결혼은 내게 엄청난 행복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행복 속에는 줄곧 평행선을 달리게 될 시어머니 같은 난이도 높은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친정 가족과도 늘 화목했던 것은 아니지만, 전혀 다른 가족문화에 노출되면서 가족이 주는 기쁨의 크기만큼 차이로 인한 힘겨움의 무게를 동시에 배워갔다.

다름으로 인한 갈등이 고조되던 한 시기 결혼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닫게 되었다. 현실 속의 가족이란 모든 일이 훈훈하고 화기애애하게 끝나는 주말 저녁 8시 드라마 속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많은 문제와 한계를 끌어안고 있지만 쉽사리 끊어낼 수 없고 함께 살아가려 노력하는 용기를 내야 하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라는 것을.

해를 거듭하며 태풍 피해를 예방하듯 내게도 명절을 준비하는 요령이 늘어갔다. 이왕 해야 할 일 가벼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남편이 참여할 기회를 조금씩 만들었다. 제사나 차례 준비 형식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헛된 기대를 버리자, 마음은 한결 가벼웠지만 답답함은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다.

믿기지 않았던 시어머니의 차례 지침
 

▲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며느리들. 드라마 <며느라기>의 한 장면. ⓒ 카카오TV


추석을 앞둔 시아버지 제사 때는 태풍 '찬투'가 엄청난 비바람을 몰고 왔지만 마음만은 평온했다. 내 생각대로 되길 바라던 욕심을 가까스로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태풍을 뚫고 시가로 가 음식을 시작했다. 이제 끝이 보인다 싶을 때면 연이어 재료가 나왔다. '아버님 제사라 힘 제대로 주시는구나.' 중얼거리며 일을 끝내고 보니 평소보다 시계 바늘이 한참 뒤에 가 있었다. 자리에 앉는데 "아고고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녁을 먹기 전 숨을 돌리느라 거실에 앉았을 때에야 이번 제사 음식 양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이유를 알았다. 아쉬움인지 후련함인지 모를 감정을 실은 한숨을 쉬며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이번 차례에는 오늘 준비한 튀김과 전, 산적을 상에 올리려고 한다."
"네? 어머님, 뭐라고요?"


방금 들은 말이 믿기지 않아 나도 모르게 커다란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시어머니가 비록 차례를 없앤 건 아니지만 정성을 강조하던 음식 마련의 일부 과정을 줄이신다니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말씀만 그럴 뿐 늘 원래대로 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연휴 첫날 시댁으로 갔다.

그런데 정말 튀김과 전, 산적은 새로 하지 않았다. 나물, 국, 생선 찌는 일들이 있었지만 한결 여유로웠다. 어머님과 함께 TV를 보는데 하루 종일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쥐나는 다리를 두드리며 일하다 튀는 기름에 데곤 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런데 편안하게 여겨지기보다 어딘가 어색했다.

어머님께 이유를 여쭤봤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어머님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얼떨떨하고 놀라웠기 때문이다. 최근 죽음에 대한 강의를 접하시며 이제 하나씩 주변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셨다. 뵐 때마다 나이 들어가는 일의 서러움을 토로하며 관심 받길 원하던 평소의 어머님과 다른 면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옆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스틸샷 ⓒ 티캐스트


고레이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불완전하고 미묘하게 어긋나는 다양한 가족의 모습들이 담긴 작품들을 통해 나의 원 가족과 시가와 맺은 가족의 현재와 의미를 돌아보고는 했다. 이번 추석에 정말 태풍이 불었기 때문이었을까? 유난히 몸이 힘들었던 연휴가 끝날 무렵 그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가 불현듯 떠올랐다.

한때 유명한 문학상을 탔던 주인공 료타는 과거의 영광에 매인 채, 한심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이혼한 전처 쿄코가 키우는 아들 신고와 만나는 어느 여름 밤, 큰 태풍이 다가오는 바람에 료타의 어머니 도시코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이들 가족은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의 재결합을 원하는 도시코의 마음과 달리 태풍이 지나가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지만 료타는 태풍이 닥치기 전과 조금은 달라질 것도 같다. 가족, 꿈꾸었던 삶과 거리가 먼 지금에 대해 여운이 긴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다음 명절 분위기도 바뀌지 않을 확률 99.9%이지만

나의 결혼생활은 어딘가 료타의 삶과 닮았다. 꿈꿨던 것과 동떨어지고 내 의지와 상당 부분 어긋난다. 행복하고 싶지만 나와 생각이 많이 다른 가족의 차이를 확인하며 원하는 대로 삶을 만들어갈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방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머님의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헤아리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또 실패해 왔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역할을 내려놓으면 지금 내가 마주한 문제들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체념하며 살아온 한 여인의 삶이 보인다. 우리의 생각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에 차이는 크지만 맞닥뜨린 삶의 고민 자체는 다르지 않았다.

이번 추석을 보내며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어머님도 세월을 따라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원하던 방식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간 지점에서 우리는 더 가깝게 만날 수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명절이면, 명절을 명절답게 보내지 않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가끔은 푸념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어머님이 평생 해 오신 일을 내 기준으로만 판단하며 그 마음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으려고 한다.

중요한 건 <태풍이 지나가고>의 료타가 그랬듯이 이뤄지지 않을 꿈을 습관처럼 되뇌는 대신 새롭게 의지를 품는 것이다. 비록 내가 그렸던 가족의 꿈이 현실과 많이 다르다고 해도 예전같이 답답해 하지만은 않으려 한다.

다음 명절에도 기름내 맡아가며 허리 한번 못 펴고 일하게 될 확률은 99.9%이겠지만 그땐 어머님에 대한 내 마음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져 있지 않을까? 그렇게 또 한 번의 추석은 지나가고 우리는 점점 가족이 되어갈지도.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https://m.blog.naver.com/uj0102
https://brunch.co.kr/@mynameis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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