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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은 가능한가, 소설가 정유정이 던진 질문

[서평]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을 읽고

등록|2021.10.05 13:55 수정|2021.10.05 13:57

▲ 정유정 <완전한 행복> ⓒ 은행나무


네 명의 남자, 두 명의 아이, 그리고 한 명의 여자. 그들 사이에 의문 가득한 일들이 벌어진다.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유나, 그는 누구인가.

<진이, 지니> 이후 2년만에 돌아온 정유정 작가의 신작, <완전한 행복>은 평범해 보이는 가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과 그 중심에 서 있는 신유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7년의 밤>, <종의기원> 등으로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등 악을 행하는 인간 심리의 근본에 대한 의문을 던졌던 작가가 이번에는 '나르시시스트'라는 주제로 돌아왔다.

작가는 언젠가부터 인식한 사회의 이상한 징후 '행복에 대한 강박'에서부터 <완전한 행복>이 출발한다고 말한다. 작품 서사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 유나는 행복에 대한 강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완전한 행복은 필요 없는 것들에 대한 '뺄셈'으로부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뺄셈은 우리의 삶 가운데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아니, 애초에 완전한 행복이란 것이 가능한 것일까? 완전한 행복은 무엇인가? 작가는 삶 가운데 많은 것을 제거하면서까지 추구했지만 결국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한 유나의 모습을 통해 완전한 행복이란 가능하지 않으며, 행복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 마주하는 불행과 불운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 속 유나는 '나르시시즘'에 갇힌 사람이다. 단순히 자기 자신과 그 삶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정도가 아니다. 병리적인 자기애성 성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를 가진 사람이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못하며 '남'은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존재하는 또다른 '나'가 된다. 병리적인 나르시시스트는 '나'가 되어버린 '남'을 쓸모가 있을 땐 충실히 사용하다가도,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린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나'를 탐색한다.

유나의 병적인 자기애 또한 과거의 상처와 결핍에서 비롯된다. 부모의 부재에서 기인한 결핍과 할머니의 구박으로 인해 입은 상처가 유나의 성격을 형성하고, 삶을 지배한다. 선험적 경험이 개인의 삶을 결정한다고 말한 프로이트 이론의 대표적 사례다.

유나가 삶은 대하는 태도에서 개인이 가진 상처와 결핍의 경험은 무조건 병리적 나르시시즘과 같은 형태로 발현되는가? 그렇다면 유나와 같이 극단적이고 과격한 형태로 드러나는 삶에 대한 태도는 용인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도출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렇지 않다'라는 답을 내리고 싶다. 비슷한 상처와 결핍을 경험하면서도 유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서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다르게 나타나는 삶의 태도는 과거의 상처와 결핍의 경험을 '지금의 나'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가능해진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생각하는 데서 가능하다. 상처와 결핍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만 묶여 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결과론이 아닌 목적론에 따라 사는 인간의 모습을 주장한 아들러의 이론이다.

"우리는 타인의 행복에도 책임이 있다"

새로운 질문이 끊임없이 도출된다. 상처와 결핍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이 설정한 새로운 목적이 유나와 같은 '완전한 행복'이라면 그것은 합리적이며, 그 가운데 제거되는 삶의 요소들은 인정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정유정 작가가 <완전한 행복>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는 동시에 타인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늘 함께한다는 것이다.

유나의 병리적 나르시시즘은 나와 남을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시작됐다. 유나와 같이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남을 고려하지 않은 안하무인적 태도를 유발한다. 작가는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닌 일부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일부에 불과한 개인에게는 각자만이 해결해야 할 인생의 과제가 존재한다. 우리에겐 서로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살아가야 할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의무가 있다. 서로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의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완전한 행복>은 행복 강박증이 만연한 사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행복 강박증은 과거에 대한 상처와 연민, 그리고 결핍으로부터 비롯된다.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가'가 모든 삶의 과정을 평가하는 유일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작가는 삶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가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어떠한 성취를 이뤄가는가?'에 초첨을 맞출 때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행복 강박증이 만연한 사회를 살아간다. SNS에는 '나는 행복하다'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듯한 게시물로 넘쳐난다. 그 가운데 절망과 실패는 없고, 오직 행복뿐이다. 행복만을 향해 치닫는 사회의 흐름에 사람들은 현혹되고, 똑같은 행복을 추구한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추 없이 순간적인 쾌락과 만족만을 추구한다. 바야흐로 행복에 중독된 삶이다. 그 가운데서 망가지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완전한 행복>은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진지하면서도 견고한, 그리고 건강한 삶에 목적을 두고, 그것을 향해 도전하며 그 가운데서 얻어지는 작은 성취들로 점철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완전하진 못하지만 꽤 견고하고 단단한 행복을 마주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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