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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만이 만고의 진리인가

[좋은데, 싫었습니다] 동물권이 좋은 건 압니다만, 채식은 싫습니다

등록|2021.10.07 06:40 수정|2022.01.05 16:12
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장군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장군은 수컷 요크셔테리어다. 2005년 겨울에 태어나 이듬해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으니 태어나서 죽기까지 꼬박 15년 평생을 함께 지냈다. 우리 가족은 장군에게 그렇게 훌륭한 동거인이 아니었다. 비싸고 좋은 사료를 사주지 못했고, 산책도 잘 시켜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바쁜 생활을 하는 동안 장군은 늘 혼자 집을 지켰다.

추측컨대 외로웠을 것이다. 장군이 죽은 후 내가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그가 평생을 솔로로 살다 갔다는 것이다. 장군은 중성화 수술을 받지 않았으니 짝짓기의 시절엔 여러모로 대단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장군이 중성화 수술을 받지 못한 것은 나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인간이 자기의 편의를 위해 중성화 수술이니 성대 제거 수술이니 하는 것들로 동물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동물의 권리 같은 말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대통령은 개고기 식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1500만에 달한다는 애견-애묘인들의 지지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꼬아볼 수 있지만, 개식용 금지 논의는 오랫동안 이어진 것이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다. 다만 생각해 볼 것들도 있다. 국내 반려동물 시장은 최근 3년간 평균 14%씩 성장하고 있고 시장규모는 6조원 대까지 확대됐다.

개식용을 금지하는 것이 동물권, 동물해방이라고 하기엔 반려동물 시장이 너무 비대하다. 인간의 친구인 개를 먹지 않는 것으로 동물권이나 동물해방을 말하기는 다소 남우새스럽다. 개와 고양이에게 먹이는 사료는 많은 경우 다른 동물들의 살과 내장으로 만들어진다. 반려동물을 사랑하며 동물의 해방을 주장하기 위해 다른 동물들을 더 많이 죽이게 되는 셈이다.

자기의 반려 늑대에게 채소를 먹였다는 어느 철학자의 동물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신념을 위해 엄격하게 노력하는 자세에 경탄한 것과는 별개로 지독히 오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늑대가 왜 채소를 먹나. 어떤 동물을 위해서 어떤 동물을 더 많이 죽이는 구조, 혹은 신념이란 이름으로 생명의 순리마저 조절하려는 태도에 대한 충분한 사유 없이 권리나 해방 같은 말을 쓸 수 있을까.
 

▲ 동물해방물결과 국제동물권단체 활동가들이 10월 5일 오전 서울 마포구 동교동 삼거리에서 개식용 도살 반대 대형 현수막 시위를 하고 있다. ⓒ 이희훈


# 인간이 부여한 권리

동물권. 이제는 익숙하게 말하는 것이지만 여전히 동물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동물은 말이 없고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하여 동물권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이 있다. 일테면 동물권 역시 인권처럼 천부의 권리라면, 인권과 동물권은 동등한 위상을 갖는 것이냐는 질문. 동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권리는 권리냐는 질문. 인간이 범주화해 동물에게 시혜한 권리라면 마찬가지로 인간이 범주화해 박탈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

내가 장군의 중성화 수술을 반대하여 장군이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간 것은 동물권을 옹호한 일일까. 인간이 자의적 판단으로 생식의 기능을 박탈하는 것과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중성화 수술을 시행하는 일. 같은 일을 두고도 인식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장군은 영리한 개였지만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지도 못했지.

수술을 비롯해 내가 장군에게 해주거나 해주지 못한 일은 전적으로 인간의 판단이다. 동물에게 해주는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해준다'는 표현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말이다). 이성적으로 우월한 존재인 인간이 애정의 대상인 동물에게 베푸는 시혜, 온정, 배려 같은 것. (적어도) 지금의 동물권은 권리의 주체가 없는 권리, 대상화와 시혜의 권리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권리라고 부를 수 있나.

개식용 금지 법안에서 보이듯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는 동물권 운동은 '비거니즘' 운동이다. 비건(Vegan)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영국 비건협회에 따르면 비거니즘이란 "음식, 의류 또는 다른 목적을 위해 동물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착취나 학대를 가능한 한 배제하려는 삶의 방식 또는 철학"을 뜻한다. 동물을 먹지 않음으로서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 그러나 사실 동물권 운동으로서의 채식은 동물을 대상화하는 것에 그치는 일이다.

# 먹는 일, 먹히는 일

섭생이란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의 죽음을 딛고 있다. 그래서 인간 아닌 생명, 혹은 뭇 존재들을 동등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먹는 이와 먹히는 이 모두가 먹이 그물의 일부임을 인식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개나 소, 말, 닭의 생명을 인간이 취사하여 먹거나 어떤 것들은 먹지 않음으로 개별 개체의 생명을 존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그저 생태계 먹이 그물의 일부임을 인지하고 그 안에서 감사함과 겸손함을 발현하는 것이 생태와 생명을 존중하는 일인 셈이다. 채식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고 다른 생명을 착취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결심은 선량하지만, 먹지 않는 것만이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연과 생태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해는 과도한 육식에서 시작했다. 지구는 소가 뿜어내는 방귀에 병들었다. 제 어미의 살을 먹고 자란 소는 미쳤다. 물보다 항생제를 더 많이 먹는 돼지, 먹히기 위해 간을 살찌우는 거위, 부리와 발톱을 뽑힌 닭. 뭇 생명들을 괴롭히는 것은 오직 육식을 위한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다. 이 욕심을 지탱하기 위해 축산은 산업이 됐고, 축산업은 자본에 의해 비대해졌다. 폴 매카트니는 도축장 벽이 유리라면 사람들은 모두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비대해진 공장식 축산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지를 드러내는 말이다. 공장식 축산업은 동물을 생명보다는 인간에게 제공되는 영양소 덩어리로만 취급한다.
 

▲ 지구의 날인 4월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앞에서 한국채식연합, 비건세상을위한 시민모임 회원들이 지구파괴 주범인 육식 중단 및 채식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생명을 제품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며 동물의 권리를 말하는 과정에서 다른 오해가 발생해 중첩했다. "음식이 아니라 사체일 뿐이며 다른 생명에 대한 폭력"이라고 말하며 채식만이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동물을 생태계 구조 속의 동등한 개체가 아니라 보호하고 지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시혜와 온정에 기반을 두는 권리란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과한 육식문화에 기반을 둔 공장식 축산이든, 채식을 실천하는 동물권 운동이든, 인간 아닌 생명을 대상화하는 인간 중심의 사고라는 점에선 다를 것이 없다. 채식과 동물권, 공장식 축산, 육식문화 같은 단어들이 오가는 '인간들의 논쟁'은 오직 인간들의 논쟁일 뿐 정작 동물들은 대상화되고 타자가 되어 논의의 바깥에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나 아닌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다른 생명을 착취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아직 논의가 정립되지 않은 동물권의 개념에서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란 그저 동물을 먹지 않는 것으로 자기 만족하는 일보다는 동물을 타자화 (영양소 덩어리로든 시혜의 대상으로든) 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 어떻게 먹는지 확인하면 된다

살아가는 것이란 결국 먹는 일이다. 우리는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고 먹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생명의 죽음을 기반으로 하는 일이다. 언제나 죽음을 딛고 생을 유지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이 생명의 순환에서 '고작'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그래서 오히려 동물을 먹느니 채식을 하느니 하는 이야기보다는, 내가 먹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뭇 생명들을 존중하는 일이고, 내 삶과 생명을 무엇으로 지탱하는지 인식하는 일이다.

이 먹을거리에 누구의 노동이 들어갔고, 또 이 먹을 것은 원래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앞에 오게 됐는지, 본래 생명이었던 이것은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죽었는지를 아는 것. '음식'을 먹는 일이란 곧 생명의 순환과 생멸 그 전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어야 한다.

내가 먹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먹는 일이 단지 영양을 섭취하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인간도 먹고 먹히는 자연 순환의 일부임을 배우는 일이고, 한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선 온 우주가 필요함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 지구의 날인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앞에서 한국채식연합, 비건세상을위한 시민모임 회원들이 지구파괴 주범인 육식 중단 및 채식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산업', '자본', '공장'은 나와 내가 먹는 것의 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농부의 여든여덟 번의 손, 생각보다 많이 먹지 않는 돼지, 오래 사는 닭, 들판에 널린 푸성귀. 생명이 자라고 또 죽어 먹히고 다시 생명이 되는 과정은 멀어진 거리만큼 도시의 '소비자'들로부터 은폐됐다. 먹는 일을 단지 영양을 섭취하는 행위로 전락시키자 우리는 다른 생명을 타자화 할 수 있게 됐다. 불쌍하니까 동물을 먹지 않는 행위는 다른 생명을 단지 영양소 덩어리로 보며 불쌍히 여기지 않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섭생이란 순환하는 이치다. 연민이나 시혜, 봐주거나 봐주지 않아서 먹거나 먹지 않는 '대상'일 수 없는 일이다.

하여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 보다는 어떻게 먹느냐에 있다.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자며 채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간디의 경구를 빈번하게 인용한다. "한 나라의 수준을 알려면 그 나라에서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 확인하면 된다"는. 이 경구는 엄격한 채식주의자였던 간디가 채식을 권장하며 했던 말이다. 그러나 동물과 뭇 생명들을 아끼는 마음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이 문장을 더 정확하게 수정할 필요가 있다. "한 나라의 수준을 알려면 그 나라에서 동물을 어떻게 먹는지 확인하면 된다"라고.

먹을 것과 생명, 동물을 다루는 이야기 중에 가장 좋았던 건 만화 <은수저>다.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주인공 유고 하치켄은 새끼돼지를 키운다. 유고는 새끼돼지가 결국 누군가의 먹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돼지를 지극정성으로 키운다. 돼지가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 또 돼지가 누군가에게 행복한 먹이가 될 수 있길 바란다. 유고는 돼지에게 '돼지덮밥'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유고는 돼지덮밥이 결국 도축됐을 때 그 죽음을 슬퍼했지만, 돼지를 먹는 일을 죄악시 하지 않았다. 직접 돼지를 키우고 또 돼지를 키우는 노동을 겪으며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가슴 아프거나 아쉬운 감정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깨달아간다. 유고는 돼지덮밥으로 맛있는 베이컨과 피자를 만들었고, 돼지덮밥을 팔아 번 돈으로 그 다음 돼지를 키웠다. 이름이 돈가스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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