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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세, 호남선 열차에서 눈을 감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63] 한국현대사는 흑역사의 개막으로 드라마가 바뀌고 말았다

등록|2021.10.09 11:29 수정|2021.10.09 11:29

▲ 신익희 후보를 애도하는 인파(1956년5월) ⓒ 한국사진기자회

한강 백사장의 30만 인파는 대통령 선거전의 히트작이었다.

신익희도 놀라고 이승만도 놀라고 국민도 놀랐다. 민중의 용트림이다. 자유당 정권의 공작이 강화되었는데, 전셋집에는 각종 불온 문서가 투입되고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다시 지방유세에 들어갔다. 그동안 거듭되는 유세와 야당후보 단일화를 위한 조봉암 진보당 후보와의 성과 없는 회담 등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지만, 지방의 당원과 국민들의 강연 요청을 건강을 이유삼아 멈출 수 없었다.

5월 5일 호남지방 유세 일정이 잡혀 있었다.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딸의 기억이다.

다음날, 바로 5월 5일엔 호남지방 강연 계획이었다. 이 계획만은 무슨 예감에선지, 아니면 대세도 이미 돌아온 데다가 아버지의 심신이 너무 피로하셨음을 느낀 때문인지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집안 식구들은 하나같이 만류했었다.

그러나 당의 일부에선 "호남지방이 아직 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강행하실 것을 주장했다. 이때 아버지는 모든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이미 당에 맡긴 것이니 당명에 순응하겠다"고는 의연히 나서시며 식구들에겐 "당론으로 이미 결정해 놓은 일이니 이번만 갔다오고 다시는 안갈 테니 너무 염려를 말라"고 위로의 말과 함께 떠나셨다. 평생을 험한 곳에서 생사의 위협을 이겨내 오신 아버지인 데다가 한 번 결정을 내리면 따르도록 돼있는 식구들인지라 아무도 더 이상 입을 여는 사람도 없었다. (주석 1)

▲ 제3대 정부통령 민주당 신익희와 장면 후보 벽보(1956. 5.). ⓒ 국가기록원


5월 4일 밤 10시 발 호남선 제33열차에는 신익희를 비롯 장면 부통령후보, 이들을 수행하는 몇 명의 당 간부가 탑승하였다. 그는 곧 5호차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새벽, 열차가 강경(江景)을 지날 무렵이었다. 하단 침대에서 해공이 잠을 깼다. "창현아! 뒤지 어디 있느냐?" 그는 신 비서를 불렀다. 곧 잠옷 바람으로 경호순경 장연수ㆍ선대영의 부축을 받으며 열차 내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 사이에 해공의 바로 윗층에서 잠자고 있던 운석이 내려와 조재천 대변인과 함께 해공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해공 옆 자리에 걸터 앉았다.

해공이 침대에 앉아 잠옷을 벗고, 와이샤츠로 갈아입은 뒤 나비 넥타이를 매려했다. 운석이 화장실 물이 안 나오자 "선생님, 세수를 하셔야죠. 그런데 물이 잘 안 나옵니다." 넌지시 말했다.

"뭐 급한 일도 아닌데 세수는…… 이따 전주 가서 합시다."라고 대답하며, 해공은 하던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해공의 표정은 약간 피로한 빛만 감돌았을 뿐 별달리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해공이 나비 넥타이를 매려고 고개를 뒤고 제치는 찰나였다. 옷깃을 바로 잡으려는 듯 올린 손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힘없이 머리를 떨구고, 보스턴 백에 엎으러져 그의 목을 잡고 있었다. 상체를 앞으로 꺽은 채 그대로 쓰러졌다. 이렇게 저절로 숨졌다.

"아니, 선생님! 선생님!……"

운석이 놀라 소리쳐 불렀지만 한 번 넘어진 해공은 끝내 아무런 말도 없었다. (주석 2)

거목은 이렇게 쓰러졌다. 유언 한 마디 남길 틈이 없었다. 유언은 이틀 전 한강 백사장에서 30만 시민들에게 토한 사자후로 대신해도 될 것이었다. 그러나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꼭 열흘 남긴 채 주역이 사라짐으로써 한국현대사는 흑역사의 개막으로 드라마가 바뀌고 말았다.

개인의 운명이 역사의 운명으로 엮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신익희의 돌연한 서거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오래 지체된 것은 비극이고 불행이었다.

63세, 한 일도 많았지만 앞으로 할 일이 많았던 그는 호남선 열차에서 눈을 감았다.


주석
1> 신정완, 앞의 책, 118쪽.
2> 유치송, 앞의 책, 760~761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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