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도 못한 일... 작품만 700개 넘는 한국 작곡가
'그리운 금강산' 주인공 최영섭 선생, 92세에도 매일 곡 만드는 예술인의 소원
▲ 최영섭은 지금도 매일 피아노 앞에 앉아 곡을 만든다. 92세의 작곡가 최영섭이 연주를 하고 있다.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피아노 멜로디는 음표가 되어 나풀나풀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디선가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8분, 4분, 16분... 음표들이 일제히 푸른 바람에 몸을 실었다. 바람은 금강산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운 금강산'으로.
시나브로 날이 어두워질 때, 최영섭(92)의 손끝을 타고 나온 음표들은 금강산 밤하늘을 흐를 것이었다. 오선지 같은 은하수에서 별처럼 반짝반짝 빛날 것이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연주를 멈춘 그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가곡 중 유일하게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음악. 국민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의 눈에 물결이 일렁였다.
"그리운 금강산이 태어난 이래 6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지도를 펴 놓고 금강산, 묘향산... 북녘 산하의 산봉우리에 점을 찍어 연결하니 그대로 그리운 금강산 멜로디가 되더군요."
"압록강, 백두산 다 있는데... 왜 금강산은 없는 거요?"
1961년 8월 26일 새벽.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논밭 한가운데 있던 집에서 장엄하고 도도한 피아노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전날 초저녁부터 울리던 피아노 소리는 이날 새벽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여름에서 겨울로 천천히 넘어가는 계절. 피아노 건반 위로 뜨거운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졌다. 저녁 식사도 거른 채 10시간 가까이 신들린 것처럼 피아노를 두드리던 최영섭의 얼굴, 아니 영혼에서 떨어지는 물기였다. 마지막 음표를 그린 최영섭의 얼굴에서 비로소 환희의 웃음이 피어났다. '그리운 금강산'의 탄생이었다.
▲ '그리운 금강산' 수기 악보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기 전날, 제가 '동해의 노래'를 작곡해 남산 KBS 방송국에 갖다주고 인천으로 오려는데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의 작곡가 한용희 선생이 남산 '산실다방'으로 저를 부르더니 '최 선생이 요즘 뜨는데 압록강, 백두산 노래 다 있는데 왜 금강산은 없는 거요?'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아차 싶어 그길로 중앙동 신흥초등학교 옆 영무 별장이란 곳에 살던 시인 한상억 선생을 찾아갔지요."
당시 KBS엔 <이주일의 노래>란 코너가 있었는데 저명 시인의 가사에 곡을 붙여 방송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작곡가 역시 이름난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최영섭은 가장 나이가 적으면서도 가장 많은 곡을 만드는 작곡자였다.
헐레벌떡 찾아온 최영섭을 본 한상억(1915~1992)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늘 느긋한 최 선생이 독사라도 밟은 것처럼 난리인 거요? 그러잖아도 내가 금강산에 대한 시를 써두었소."
가사를 보고 단숨에 외워버린 최영섭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렇게 멜로디와 반주, 코러스 오케스트라 편곡까지 일사천리로 완성한다. 그의 가슴에 금강산을 향한 그리움이 펄펄 끓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운 금강산'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개 가곡은 하루 한 번 나가기도 어려운데 제 곡은 하루 여섯 번씩 방송을 탔어요. 가곡에 대한 팬레터가 쏟아진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인천이 낳은 '음악천재'
▲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이 전 생애에 걸쳐 작곡한 수기 악보 등을 고향 인천에 기증하기로 했다. 최영섭 작곡가가 지난 9월 송도국제도시 광원아트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 강화도가 고향인 최영섭은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인천의 정서가 훗날 음악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최영섭은 1929년 11월 28일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77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창혁과 어머니 신순예는 강화도 토박이로 누나와 누이동생 사이에 영섭을 낳았다. 마니산과 참성단, 갯벌 등 그의 가슴속에 지금도 강화도의 풍광이 살아 숨 쉬는 까닭이다. 전등사는 특히 그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던 놀이터 같은 절이었다.
"초등학교 때 전등사에 올라가면 스님이 우리 영섭이 왔구나 하며 반겨주곤 하셨어요. 어린 마음에도 전등사 마당에서 듣는 불경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최영섭은 "기독교 감리교가 모태 신앙이 아니었다면 불교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며 웃음 지었다.
강화도 길상초등학교를 다니던 영섭이 인천 창영초등학교로 전학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어머니께서 공부를 하려면 도시로 가야 한다며 이사를 한 것이지요."
영섭이 본격적으로 음악에 다가선 시기가 이때이다. 초등학생 때 오르간을 처음 접한 영섭은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바이올린, 플루트, 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를 접하며 음악의 기초를 다진다.
그는 "어렸을 때 하던 음악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됐다"며 "어렸을 때 공부는 가짜가 없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꼴찌를 면치 못하던 그는 중학교 입학을 앞둔 6학년 때 공부를 시작해 1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943년 인천중학교에 입학한 영섭은 광복하던 해인 1945년 경복중학교로 편입을 한다. 그렇게 3, 4학년 때는 악기를 다루고 5, 6학년 때는 밴드부를 지휘하던 그는 서울대 음대 진학을 결심한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께서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거든요."
원하던 음대 입학의 기쁨도 잠시, 이듬해 6.25전쟁이 터지며 그는 학업을 중단한다. 전쟁이 멈춘 1953년 최영섭은 3학년에 편입하지 않고 인천여중고 전임강사의 길을 택한다.
"전쟁 전, 이미 전 세계의 작곡 이론을 충분히 섭렵했던 데다, 전후 어수선한 시기에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들었습니다." 대학 시절, 교수들로부터 '음악 천재'로 인정받은 그는 사실 더 이상 학교에서 배울 게 없었다.
운산, 그의 소원
▲ 최영섭은 자신의 악보는 물론이고 지휘봉, 옷장 등 자신의 모든 물품을 고향 인천에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그렇게 인천여중고 음악 교사로 한동안 근무하던 최영섭은 1960년 조경래 교장과 함께 인천여상으로 전근을 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작곡에만 전념한다. 그렇게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넘게 작곡한 그의 작품은 700여 곡에 이른다. 미발표곡만 해도 2300여 개다. 600여 곡을 작곡한 슈베르트조차 실제 악보로 남은 건 150여 개로 알려졌다.
그룹 '들국화' 멤버이자 '제주도의 푸른 밤'을 만든 최성원을 비롯해 세 아들을 인천에서 낳아 기르던 그가 서울로 간 것은 1964년. 동아방송 개국과 함께 합창단 총편곡자로 임명되면서다. 근무하던 방송국 두 곳이 모두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인천에서의 출퇴근이 쉽지 않았던 거였다.
한때는 서울의 부촌인 평창동에 저택을 갖고 있었지만 첫 부인과의 사별, 두 번째 부인과의 이혼 이후 전셋집으로 옮긴 뒤 그는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다. 그렇지만 요즘도 밥을 직접 끓여 먹고, 하루 소주나 맥주 한두 잔씩은 꼭 할 정도로 건강하다. 그런 그가 '그리운 금강산' 악보를 포함, 지휘할 때 신은 신발 등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회장께서 장미헌정이란 이름으로 물심양면 도와주신 것을 비롯해 고향 분들의 도움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제가 고향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제 것을 내놓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기꺼이 받아주신다고 하니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금강산처럼 크고 아름다운 산으로 솟은 최영섭. 정작 그는 산보다는 구름이 되길 원한다고 했다.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는 음악의 비로 내려 한반도에 통일의 싹을 틔우고 싶다고 소망했다. 운산(雲山)이란 그의 호처럼 말이다.
▶취재영상 보기(https://youtu.be/Y_YvsFItgT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1년 10월호에도 실립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