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속에서 피어나는 '참 좋을 때'라는 말
양향숙 시인의 디카시 '그리움'
▲ ⓒ 양향숙
운전면허를 따고 아직 잉크도 안 말랐을 무렵, 나의 시야는 앞차의 뒤꽁무니 언저리쯤에 있었다. 초보운전 시절에는 앞만 보고 직진하는 게 가장 마음 편한 법이다. 눈가리개를 씌운 경주마와 같이 나는 그렇게도 직진을 주구장창 했었다.
시야 확보가 넓어야 안전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안다 해도, 경험치가 부족한 몸이 그 이론을 따라잡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평행주차 중에 차량 전후방을 골고루 벽에다가 긁고, 멀쩡히 주차된 차량과 두어 번 접촉하는 대가를 치른 후에야 좀 더 넓은 시야를 근육에 장착하기 시작했다.
지나고 보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어제보다는 좀 더 넓고 깊어진 오늘의 시각으로 추억을 재생하면, 우리의 기억은 대부분 좀 더 아름다운 쪽으로 편집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날뛰던 감정들도 무색해지고, 별것이었던 일이 별것도 아니게 담담해진다. 심지어 힘든 일도 웃으면서 이야기하게 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눈물 나게 절망적이었던 시절도 언젠가는 그리움의 한 꼭지를 차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 속 달리아에는 화사한 붉은 꽃잎마다 빛바랜 노랑이 스며들어 있다. 펼쳐진 꽃잎들은 마치 우리가 지나쳐온 삶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한 번 피기 시작하면 피기 전으로 되돌릴 수 없고, 한 번 태어나면 태어나기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기에, 활짝 펼쳐진 비온 날의 꽃잎들이 애틋하다. 노랗게 때가 탄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일 때,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도 사진 속 달리아 꽃잎처럼 붉고 촉촉할 것 같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사무치게 그리운 우리의 지난날들은 아름다운 추억이다. 초보 운전자 시절, 초보 엄마 아빠 시절, 초보 회사원 시절, 그리고 연애 초보인 시절들도 훗날 돌아보면 그리운 삶의 한 부분이니 말이다. 미래의 시점에서 보면, 서툰 서사로 범벅된 나의 오늘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꽃잎도 없다.
달리아의 중앙에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꽃잎들이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다. 아직 마주하지 못한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만개하지 않은 달리아를 통해 지금도 진행 중인 '피어남', 지금도 진행 중인 '그리움'이 희망적으로 보인다. 나이 드신 어른들의 십팔번 "참 좋을 때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만 같다.
그리움이란 디카시를 읽는데 이상하게도 과거가 아닌 미래가 연상된다. 분명 시인은 꺼내도 꺼내도 끝없이 나오는 지나간 그리운 시절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사진 속 달리아가 아직 완전하게 피기 전이라서 그럴까. 시인의 의도가 어찌 됐건, 내게 달리아의 자태는 미래지향적이다.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그리움의 정서는 자꾸만 먼 훗날의 내가 그리워할 나의 오늘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몹시 그리워질 오늘, 나는 완벽하게 실패해보고 싶어 진다. 지금의 내가 주저하고, 겁먹고, 하지 못했던 일들이 나중에 안타까워질 것 같아서다. 가벼운 접촉사고와 예상치 못한 스크래치처럼 어떤 시도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 모든 배움은 내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바로 그리움이 내게 준 가르침이었다.
시시각각 과거가 되는 시간들을 '실패'가 아닌 '경험'으로 읽자. 경험이란 기반을 차곡차곡 쌓으며, 앞차 꽁무니만 바라보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더 넓고 더 멀리 보며 살자. 운전대를 잡은 당신의 삶이 행복하고 안전한 운행이 되길 빈다. 붉고 애틋한 달리아처럼, 당신의 오늘이 매일 그립고 아름다운 꽃잎을 펼쳐가길 진심으로 바라며.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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