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밝히는 언어가 필요해서, 차별금지법 요구한다
[당신이 아는 이대녀는 없다]
▲ 차별금지법 피켓팅에 참여중인 진은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 진은선
장애여성이 독립을 말할 때 '경제적 능력이 있는가, 스스로 밥은 할 수 있는가,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받으며 '보호와 안전'이라는 이유로 독립의 가능성을 낮게 판단하는 것이다.
장애인활동지원제도는 장애인이 돌봄을 받는 위치에서 '미안하거나 감사한' 마음으로 보조를 요청하는 것이 아닌, 권리로서 당당히 요구하도록 권리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제도를 통해 독립하여 살고 있는 20대 여성인 나는 오늘도 남의 손을 지원받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20대이면서 독립하여 살아가는데, 누군가의 손으로 지원받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까?
동시에 장애여성이 주도권을 잡고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계속 갈등하고 협상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돌봄에 대한 논의가 협소하기 때문에 돌봄을 받는 이들의 경험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물론 장애인활동지원제도의 공백으로 내가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문제가 여전히 있지만 관계는 제도만으로 채울 수는 없다. 활동지원사와도 '엄마, 이모'가 아닌 호칭을 정하고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부터 평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 '친밀한 관계'에 대한 긴장을 놓지 않는 일상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보조를 요청할 때 보이는 내 몸과 나이, 위치성을 넘어 파트너, 활동지원사와 평등해질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은 일상의 관계를 바꿔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활동지원사 뿐만 아니라 장애여성의 주변에 있는 이들과 동료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보호자가 아닌 동료로 만나고 싶다
나처럼 전동휠체어와 같은 보장구를 이용하는 장애여성은 건물 내 외부의 편의시설이 갖춰져야 진료 공간에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병원을 선택하는 기준 자체가 의료인의 전문성이나 나에게 맞는 치료방법이 아니라 접근성이 가장 우선순위가 된다. 물론 모든 병원에도 적용되는 기준이지만 산부인과의 경우에는 건물에 접근이 가능하더라도 진료실 내부가 비좁아서 이동이 어렵다.
그래서 매번 휠체어에서 의자나 침대로 몸을 옮겨야 하는데 장애여성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몸에도 맞지 않는 진료 의자로 이동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내 몸을 드는 사람도 호흡을 맞춰야 하는 나도 힘이 들지만 보조를 받는 상황이 늘어날수록 장애가 더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 시간은 최소화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몸을 보이는 일이 창피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나의 등장이 당황스러운 일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아주 조금이나마 익숙해졌지만 '(보조를 받는 모습을) 직접 보니 너무 불편할 텐데 최소한으로 진료를 보겠다'라거나 '(이곳이 아닌) 큰 병원이 더 낫지 않느냐'라는 제안은 단지 '좋은' 의도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장애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보호자'가 꼭 있어야 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하며, 의자에 올라가서 진료를 볼 수 있는지 등을 판단하여 진료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갈 때 내 몸이 어디가 좋지 않고, 무엇이 필요한지 증상을 설명하기 위한 고민보다는 진료를 거절하진 않을지 그 긴장과, 거절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나는 왜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말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 피곤하지만 일상이 늘 투쟁이다.
욕망을 말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장애인의 성은 과잉되거나 무성적이거나, 양극단에 있다. 대부분은 장애남성을 중심으로 성적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장애여성의 경우 폭력, 피해로만 성에 대한 경험들이 드러나는데 미성숙한 상태에 있는 장애여성의 임신, 출산은 언제나 위험하다고 전제한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경험을 존중받을 수 있는가, 이지만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주변인들은 '당사자에게 말해줘도 모른다, 알아봐야 좋을 것 없다',라는 말들로 정보를 차단한다.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방식은 장애에 대한 편견에 기인하고 있다.
이미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삶을 드러내고 싶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에서 장애여성이 놓인 통제상태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개인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사회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다. 장애인에 대한 전문가들이 무엇이 좋고 필요한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지금 경험하는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내고 충분한 정보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의사결정의 과정에 주체적인 참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성적인 즐거움과 욕망의 표현,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 권리 안에서 평등하고 존중받는 경험들이 주어져야 한다. 상담과 훈련의 대상이 아닌 이웃으로, 일상에서 동료로 만나야 한다.
장애가 있는 여성이란 나의 정체성은 장애가 나의 본질이면서 모든 걸 다 설명하는 말은 아니다. 장애여성은 이렇고, 장애인은 이렇다라는 규정들이 얼마나 나를 억압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장애등급제에 갇히고 복지제도에 갇힌 나는 '이대녀'라는 프레임 안에도 부재하다.
20대 여성인 내가 차별을 말하기 위해서 차별을 드러내도록 허락하는 협소한 프레임에 맞추어야 하는 그 자체가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증명한다. 차별금지법은 차별금지와 평등의 원칙을 세우는 법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지만, 누구도 한가지의 정체성만으로는 구성될 수 없다. 복합적인 삶의 경험 안에서 차별을 말할 수 있고, 차별에 맞서 싸울 원칙과 기준을 만들기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꼭 제정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진은선은 장애여성공감 활동가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