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20년 만의 귀환, 다섯 청춘들이 보여준 기이한 힘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고양이를 부탁해>

등록|2021.10.18 10:49 수정|2021.10.18 10:49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포스터영화 포스터 이미지 ⓒ 엣나인필름


1_아주 특별한 귀환

<고양이를 부탁해>와 재회하는 경험이란 아주 특별한 성격의 것이다. 몇 년마다 한번씩 이 영화를 다시 볼 기회를 가졌었지만, 가장 최근에 봤던 게 근 십년은 족히 된 것 같다. 거기에다 실로 오랜만인 극장에서의 만남은 그전과는 퍽 달랐다. 절반은 같고 절반은 다른 영화를 봤다고 해야 하나.

물론 HD 리-마스터링, 깔끔하게 단장한 재개봉 판은 '감독 판'이나 '확장 판'이란 이름이 붙지는 않았다. 필름 형태의 상영 본을 DCP 상영 본으로 디지털 변환하면서 음질과 화질을 끌어올렸을 뿐, 영화의 내용과 분량에는 일체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20년 만의 귀환'이라는 점이다. 조금 더 일찍 돌아와 주길 꽤나 기다리긴 했던 영화다. 하지만 20년이란 세월의 무게가 제법 어울리는 타이밍에 돌아오긴 했다.

그 지난한 시간의 흐름을 사이에 두고 이 영화와 반가운 재회를 하게 된다면, 영화는 그대로인데 영화를 보는 자신이 변해 있음을 확인하게 될 테다. 그리고 20년의 시간성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 즉 영화를 제목으로만 알다 처음 실물을 접하게 된 이들의 경험이 보태질 것이다. 기존에 영화를 보고 다시 재회하게 된 이들의 경험과 처음 <고양이를 부탁해>를 만나게 될 이들의 감상이 서로 어떻게 다를까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20년 전에 너무 빨리 우리 곁에 찾아와 선보였던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간의 예측으로는 어쩔 수 없는 (폴더 폰 같은) 물질적 배경을 제외한다면, 그 감각적 연출과 눈부신 청춘의 이미지, 그 주변에 깔린 불길한 징후의 넘실대는 기운이 지독히 '현대적'이다. 21세기 초입의 감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이미지를 풍긴다. 다시 보니 이 영화가 이렇게 시대 초월적이었나? 싶을 정도다.

정확히 지금 나이의 딱 절반, 영화 속 갓 스물이 된 여자상업고등학교 동창생들의 나이이자 배우들 실제 나이와 겹치던 20살 전후의 실제 배우들, 그리고 감독 또한 갓 30대에 진입했던 시절 그 넘쳐나던 에너지가 영화에 고스란히 농축된 것처럼 전해져왔다. 그리고 보니 영화의 감독이나 주연배우들이나 참 나이를 느리게 먹는 듯 보였다. 영화 <써니>가 아역과 중년 배우들을 이중으로 배치했지만 <고양이를 부탁해>는 좀 오버하면 속편에 당시 배우들이 그대로 등장해 다시 20년 전 회상 장면을 찍어도 될 정도로 시간의 속도가 다르게 느껴진다(개봉 첫주 무대인사 사진을 보니 정말 그랬다).

2_다시 보니 더욱 또렷해진 주인공들의 궤적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영화의 내용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게 있어 다시 옮겨본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단짝친구 다섯은 (수도권에서 국내 3번째 대도시임에도 변방 취급받는 인천 바닷가 출신의) 이제 각자의 인생을 출발해야 한다. 다섯 중 특히 태희, 효주, 지영의 캐릭터들은 꽤나 대조적으로 유형화되어 있다.

요즘에는 중3에서 고1 시기에 대입 코스를 비롯해 사실상 계층 사다리가 정해진다고 하는데, 이 시절에는 아주 조금 더 유예기간이 있었던 기억이긴 하다. 그렇지만 이제 셋은 학창시절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각자의 조건과 미래의 출발선 차이를 깨닫게 될 시점이다. 영화를 첫 개봉 당시에 봤을 때는 감독이 보여주려 한 IMF 이후 가파르게 진행되던 한국사회 계층 간 이동의 어려움과 차별이 그렇게 진하게 다가오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니 그 지점이 유독 진하게 묻어난다.

어떻게 보면 가장 관객 일반과 공통점이 많은 존재는 이요원이 맡은 '효주'다. 효주는 증권회사에 들어간다. 친구들 중 가장 '출세'한 셈이다. 효주는 이참에 필사적으로 'in-서울'에 진입하려 애쓴다. 영악하고 이기적으로 보일 만큼 그녀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한다. 자기만 바라보는 남자친구를 마구 대하고, 제멋대로의 행동 때문에 단짝이던 지영과도 점점 멀어져 간다. 효주는 그렇게 신분상승을 도모하지만 대학을 나오지 않은 결정적 약점은 효주가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방탄유리 같은 벽이었다.

옥지영이 맡은 '지영'은 효주와 가장 친했었지만 점점 갈라서는 존재다. 사실 다섯 친구의 조합은 원래 효주와 지영, 둘 사이에서 출발한 관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둘의 우정이 식어가는 전개는 영화가 배후에 품은 시대상 묘사의 핵심인 셈이다. 지영은 절박한 상황이다. 부모는 부재한 가운데 병들고 쇠약한 조부모만이 유일한 가족인데 이들이 사는 집은 지붕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세입자로서 건물주에게 수리를 요구해도 외면당할 뿐이다. 지영은 또래들처럼 꿈이 있지만, 물려받은 빈곤의 굴레에 짓눌려 꿈꾸는 것을 거듭 거부당하며 일그러져간다. 효주는 그런 지영에게 잘난 척 충고하지만 이제 학창시절처럼 둘 사이에 동등한 우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친했던 둘은 이제 적개심을 품는 단계에 이른다. '관계의 종말'은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던 셈이다.

배두나가 담당한 '태희'는 모든 게 어중간하다. 태희는 효주처럼 필사적으로 신분상승을 꾀하지도, 그렇다고 지영처럼 생존에 몸부림치는 상황도 아니다. 그런 조건 때문에 태희는 친구들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한다. 모임 연락도 태희가 하고 서로 싸운 효주와 지영은 마치 편을 들어달라는 듯 태희에게 엇갈려 연락하곤 한다. 그런 태희는 속된 말로 '오지랖'이 넓다. 그녀는 뇌성마비 시인을 위한 타이핑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낸다. 그렇지만 부모세대의 눈에 (이제 신자유주의 정글로 본격 진입하던 당대 사회현실에서) 태희는 딱 실속 없고 자기 것 못 챙겨먹는 못나빠진 존재일 뿐이다.

여기에 화교 출신 쌍둥이 자매가 가세한다. 비류와 온조(백제의 시조로 고구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인천과 서울 쪽에 자리를 잡았던 바로 그!)다. 둘은 앞선 셋이 각자 처한 상황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다. 인천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이 둘은 한국사회 변방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알아서 해결하는 비주류 라이프에 해당한다. 형편이 여유롭다거나 믿는 구석이 따로 있어서가 아닌, 어차피 다른 친구들과 동일하게 출발할 조건을 부여받기 힘든 조건인 셈.

그래서 오히려 온전히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10여 년 후 불거질 한국사회 내 이민자와 소수자 문제를 내다본 것일까? 다섯 명의 동창생들을 통해 한국사회 내 각자의 생존 방법론과 정체성 고민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그 핵심 줄기인 청춘의 방황과 부유와 연계해 정교하게 설정해두고 있었다. 이 영화가 미래 예언적인 작품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한국사회가 그렇게 더 나빠진 것일까? 그 답은 영화를 만들어질 당시에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니 이 영화는 이후 한국사회가 크게 바뀌진 않은 상태로 흘러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3_그 고양이들의 또 다른 귀환을 기다리며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물론 <고양이를 부탁해>는 후대 독립영화들이 곧잘 선보이는 청춘 잔혹 이야기까지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각기 다른 개성과 상황을 확인하게 된 친구들의 스무 살 만만찮은 세상살이, 그리고 각자의 나름 인생도전을 영화는 따스한 시선과 염려로 대한다. 이 영화는 현실을 판타지로 억지로 되돌리려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근래 우후죽순 선보이는 치유 장르의 어떤 작품들보다도 그 온기와 밀도가 더 진득하게 다가온다. 마치 '냥줍'한 새끼 길고양이 조심조심 어루만지는 그런 태도가 전해져서일 테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1990년대 중후반의 '코스모폴리탄' 감성과 도시적 시‧공간성이 21세기 들어 더 가팔라진 냉혹한 사회변화 속에서 응결된 정수 같은 결과물이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이 잔인한 세상에 내던져진 채 좌절하고 고통 받고 신음하지만 무한한 에너지로 맞서거나 견디는 이야기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극장을 나서면서 주인공들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또는 영화를 보고 한참 뒤에라도 영화 속 등장인물들 마냥 또래 친구들과 만나 주인공들의 근황을 토론하게 만드는 기이한 힘을 가진 영화다.

무엇보다 궁금한 질문. 영화 속에서 마지막에 신자유주의로 재편되던 당대 한국을 함께 떠나는 태희와 지영은 과연 돌아올까? 성공해서 강변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겠다는 효주와 그 둘은 재회할 수 있을까? 감독과 배우들 역시 그들의 모험 끝 후일담이 퍽 궁금할 것 같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 줄리 델피의 사례처럼, 9년마다 다시 만나 선보이는 영화 밖과 속에서 일치되는 인생담,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비포 미드나잇> 시리즈처럼 말이다.

앞으로 5년쯤 지나면 <고양이를 부탁해> 속편이 나올 수 있을까? 너무나 궁금한 그녀들의 후일담이다. 다시 만난 <고양이를 부탁해>와 함께 청춘의 작은 불씨가 되살아나는 찰나는 여전히, 아련한 체험이다.

<작품정보>

"고양이를 부탁해 Take Care Of My Cat"
4K HD Remastering Version
2001년. 한국. 드라마. 110분
2021. 10. 13. 재개봉. 12세 관람가
감독 정재은
주연 배두나(태희) 이요원(혜주) 옥지영(지영) 비류(비류) 온조(온조)
배급 엣나인필름

2001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
2001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이요원)
2002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 감독상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