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감옥'서 탄생한 노래 11곡, 길동무에 바칩니다
[이 사람, 10만인] 김판수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공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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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판수 이사장이 50여년 전 감옥에 갇혔을 때 지은 '길동무' 악보 ⓒ 익천문화재단
"쑥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이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1969년 스물일곱 살, 창살에 갇힌 한 청춘의 속마음. 그가 음악 습작노트에 꾹꾹 눌러쓴 시대의 절망, 아픔, 희망의 선율을 밖으로 내보이는 게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독방 창살에 잠시 머무는 토막 햇살 아래에서의 소리 없는 탄식과 눈물겨운 희망의 외침을 단조와 장조의 음계로 절규하듯이 기록한 창작곡들이다.
▲ 김판수 익천문화재단 이사장이 낸 '길동무' 시디 표지 사진 ⓒ 익천문화재단
팔순을 앞두고 첫 창작곡집 '길동무' 음반을 내놓은 김판수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공동이사장(79. 호진플라텍 회장)을 최근 서울 서초구 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송경동 시인(재단 상임이사)이 시디(CD)와 유에스비(USB)로 만든 음반에 사인하는 김 이사장을 곁에서 돕고 있었다. 음반을 건네주면서 송 시인은 말했다.
"군부독재정권 시절, 청운의 꿈을 안고 먼 이국까지 유학을 갔던 한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은 공안조작사건 피해자의 사연이 담긴 음반입니다. 굴절된 근현대사에 온몸으로 맞서 싸우면서 평화와 평등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기억하는 노래입니다."
송 시인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라면서 피아노곡 '서울길'을 틀었다. 초가을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던 사무실의 찬 공기가 선율에 녹아 흘렀다. 젊은 시절, 그의 지인이었던 김지하의 시에 곡을 입혔다.
[감옥의 노래] '간첩' 딱지... 5년간 억울한 옥살이 때 만난 기타
▲ ‘유럽·일본유학생간첩단 조작사건’으로 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김판수 이사장이 1973년 대전교도소 악대에서 활동할 때 찍은 기념사진(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김판수 이사장) ⓒ 익천문화재단
그의 노래는 감옥에서 나왔다.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에 입학한 뒤 영국과 덴마크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청년 김판수에게 '간첩' 딱지가 붙었다. 1969년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동백림(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 수사 결과를 발표한 뒤 뒤숭숭한 시기였다. 김 이사장은 그해 5월 중정으로 끌려갔고, '유럽·일본유학생간첩단 조작사건'으로 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1970년 7월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뒤 2년 정도 교도소 공장에서 문선공(인쇄소에서 원고대로 활자를 골라 뽑는 사람)으로 일했어요. 그런데 73년 초에 류마티스 관절염이 심하게 걸려 일도 못하고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된 상태였죠. '여기서 이대로 죽는건가'하는 절망적인 생각도 들었어요. 몸을 추스릴 겸 교도소 음악 밴드에 들어갔어요."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5~6개월 뒤부터 멜로디가 떠올랐다"고 했다. 당시 미국 팝 음악계에서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프로테스트 송(protest song)이 유행했다. 월남전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가수 밥 딜런, 존 바이즈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어 책을 사서 화성과 화음 등의 작곡법을 독학으로 익혔다.
이 때 그에게 유럽 유학을 주선했던 박노수 교수와 대학 동창인 김규남 전 국회의원이 사형을 당했다. 그는 "누구를 해칠 생각도 없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던 분들을 독재정권이 죽였다"면서 "감옥 안에서 절망했다"고 했다. 그럴 때일수록 그는 미친 듯이 기타를 쳤고, 오선지 위에 시대와 자신의 아픔을 새기듯 치열하게 기록했다.
[창작곡] "희망의 전언이며, 승리의 가곡"
▲ 김판수 이사장이 5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출옥할 때 몰래 가지고 나온 2권의 악보집에는 11곡의 창작곡이 들어있다. ⓒ 익천문화재단
그는 두툼한 음악 습작노트를 보여줬다. '고향의 강' '세월이 약이겠지요' 등 대중가요의 악보들이 필사되어 있었다. 그 속에 '길동무', '동상이몽', '삶으로 오라', '도대체', '어둠 속의 첫걸음', '내일', '사랑의 빛' 등 11개의 창작곡 악보들이 숨겨져 있었다. 작곡자 이름은 '김민혁'. 민중혁명을 의미하는 가명이었다.
"그렇다고 음악을 혁명의 무기라고까지 생각한 건 아닙니다. 저처럼 갇힌 사람들의 막막함과 고통의 근원을 생각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동무'가 되어 함께 나아가자는 내용을 담았어요."
그는 "어설프고 단조로워서 음악적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사에 시적인 상상력을 담지도 못해서 부끄러웠다"면서 "송경동 시인 등이 이걸 묻어두기에는 아깝다고 해서 가수이기도 한 이지상 성공회대 외래교수가 6개월 만에 편곡하고 주변 가수들이 노래를 불러 음반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김 이사장은 겸연쩍어했지만, 이지상 가수의 설명은 달랐다. 그는 음반에 수록한 글에서 "국가는 청년에게서 내일을 빼앗았지만, 청년은 홀로 배운 기타를 뜯으며 희망을 새겨나갔다"면서 "삶의 엄중한 무게를 담은 청년 김판수의 노래 위에 조심스럽게 선율의 옷을 입히면서 나의 발바닥도 함께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적었다.
문학평론가이자 익천문화재단의 공동이사장이기도 한 염무웅 선생도 "고독과 고난을 견디면서 그가 흥얼거렸던 노래들이 반세기의 침묵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 도착했다"면서 "50년 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세계에 던지는 희망의 전언이며 시간과의 싸움에서 거둔 승리의 가곡"이라고 평가했다.
2015년 12월 29일, 그를 옥죈 유럽 간첩단 사건은 43년 만에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키다리 아저씨] "내가 번 돈, 다 쓰고 죽을 겁니다"
▲ 김판수 익천문화재단 공동 이사장이 첫 음반 '길동무'가 나온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 김병기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수십년 동안 노래를 잊고 살았다고 했다. '간첩 딱지'가 붙어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웠기에, 이름 없는 오파상을 전전하면서 돈을 벌었다고 했다. 1979년 '호진실업'을 창업했고 80년대 중반, 도금에 필요한 약품 제조사였던 독일 슐레터(Schletter)와 협력해 회사를 키웠다. 회사명을 '호진플라텍'으로 바꾼 뒤 국내 생산 시스템을 갖췄다.
태양광 등의 전자부품이나 회로기판에 필요한 첨단 도금 기술은 최근에도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 유일하게 태양전지 분야의 도금 기술을 갖추고 있고, 미국 굴지의 태양전지회사 '선파워'에도 도금 약품을 납품하고 있다.
"이렇게 번 돈을 다 쓰고 죽을 겁니다."
이날 그가 밝힌 익천문화재단 설립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 재단을 설립하면서 그간 저축해 모은 돈의 많은 부분을 문화예술활동 지원 기금으로 내놓았다. 그는 "평소에 돈을 벌면 예술가를 돕겠다고 생각해 왔다"면서 "염무웅 선생과 함께 후배 김남주 시인 문학상 제정 등을 고민하다가 범위를 넓혀서 문화예술인들을 작게나마 돕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가 수십년동안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는 악보집은 재단 창립을 준비하면서 과거 자료에서 우연히 튀어나왔다. 김 이사장은 지난 3월 문화재단 창립 인사말에서도 이같이 밝혔다.
"문화재단 길동무는 한없이 조촐하고 겸허한 자세로 이 삭막한 자본의 시대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의 옛 가르침을 감히 본받고자 합니다. 거대한 물질문명의 위력과 혼탁한 시대의 가난으로 날이 갈수록 왜소하고 남루해지는 이 땅의 모든 문화예술인들, 특히 시인, 작가와 시민사회 활동가들에게 문화재단 길동무의 소박한 공간이 작으나마 삶에의 온기와 위로, 용기를 줄 수 있는 쉼터이자 놀이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꿈꿔봅니다."
그는 재단 설립 이전인 80년대 후반부터 단체 등을 소리 없이 도왔고, '키다리 아저씨'로 불려왔다.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지금은 되레 키가 작아지고 있다"면서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사회단체를 비롯해 '한국작가회의'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임화문학연구회'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리영희재단' '녹색평론' 등을 오랜 기간 후원해 왔다.
4년여 전에는 <오마이뉴스>에 거액의 후원금을 보내와 10만인클럽 평생회원으로 가입했다는 것도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됐다. 그의 말을 듣고, 당시 편집국에서 나와서 10만인클럽을 담당했던 기자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겸한 만남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기자에게 "앞으로도 열심히 해달라"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길동무] "정의로운 세상 향해 걷는 이들에게 바친다"
▲ 1966년, 김판수 이사장의 유학시절 캠브리지에서 찍은 사진 ⓒ 익천문화재단
이번에 그가 음반을 낸 것도 개인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음악적 소양을 내보이고 싶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단다. 그는 "엄혹한 시절을 겪은 한 사람의 역사적인 기록으로서는 의미가 있을까 해서 남긴 음반이고 판매가 목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음반 표지 안쪽에 쓴 글에서도 이같이 밝혔다.
어설프고 단순한 선율의 습작곡이지만 50여년 전, 그 암울했던 시대의 기억이자 역사적 기록이라 생각하면 애틋한 미련이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그 어둠의 창살 안에서 온 마음을 불살라 지었던 노래들, 슬픔과 희망으로 눈물겹도록 간절했던 노래들을 이제 더 아름답고 정의로운 세상을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세상의 모든 '길동무'들에게 바칩니다.
하지만 송경동 시인은 인터뷰가 끝난 뒤 한마디 덧붙였다. 그는 "김판수, 염무웅 선생님들은 재단법인 길동무를 위해 많은 것을 내어주셨고, 이 노래도 저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이자 위로와 연대의 노래"라면서 "수익금은 두 어른의 뜻에 따라 민주주의와 평화, 평등을 위해 싸우는 길동무 문화예술인을 위해 쓰겠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이 음반의 저작권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에게 있다. 시디와 유에스비, 두 종으로 만든 음반의 온라인 판매처는 <향뮤직>http://omn.kr/1vpwr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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