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된 실패, 집 안에 갇힌 삶... 어디 그 혼자 뿐일까요
[김성호의 씨네만세 343]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 기프신작전 <희망의 요소>
▲ <희망의 요소> 스틸컷 ⓒ GIFF
남자는 소설을 준비한다. 신춘문예를 통과하기 위해 작품을 쓰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벌써 몇 년 째 허탕을 쳤을까. 언제쯤 작품이 공모를 통과해 어엿한 작가가 될 수 있을지. 이제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한때는 행복이었던 것이 불행의 족쇄가 되어 있다. 남자에겐 아내가 있다. 대학교 교직원인 아내는 몇 년 째 집에서 소설만 쓰는 남자를 못마땅해 한다.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엔 짜증스러움이 묻어난다. 남자는 아내에게 죄를 지은 것만 같다. 아침과 저녁을 해다 바치고 빨래부터 청소까지 집안일을 도맡고 있지만 아내 앞에선 늘 어딘가 민망하다.
아내는 그에게 참지 못하고 말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집에만 있을 거야." 남자가 답한다. "나 다음 주에는 면접 봐." 아내는 남편에게 면접자리를 소개한 친구의 이름을 듣고는 다짜고짜 화부터 낸다. 또 그 사람이냐고, 당신은 배알도 없느냐고, 이용만 당하겠지 하고 말이다.
집에는 하수구 냄새가 가득하다. 올라오는 썩은 내에 아내는 미간을 찌푸린다. 그런데 남자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종일 집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썩는 것 가까이 사는 이가 가장 썩은내를 맡지 못하는 비극이다.
▲ <희망의 요소> 스틸컷 ⓒ GIFF
절망 가득한 사내의 무력한 삶
<희망의 요소>는 온통 절망으로 가득한 드라마다. 종일 집 안에서만 살아가며 세상과 단절된 한 무력한 사내의 이야기다. 하나뿐인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고 있다. 그러고도 제 남편을 함부로 취급한다.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는 건 제 남편이 비운 집에서 다른 남자와 몸을 섞다 남편에게 그 모습을 들켰을 때 뿐이다.
아내 역시 번듯한 직업을 갖지 못한, 그리하여 가정을 지탱하는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실망하고 또 실망하였을 테다. 하지만 성별만 바꾼다면 그는 충실한 전업주부가 아니던가.
영화는 모든 갈등이 표면 위에 드러나며 비로소 변화를 꾀한다. 전반부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별다른 일 없이 지내던 그가 드디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부정한 아내를 더 볼 자신이 없어서일까 스스로가 실망스러워서였을까, 그는 제가 쓴 단편을 식탁 위에 놓아둔 채 집을 나간다. 그리고는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한다.
<희망의 요소>가 그린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연간 이혼이 10만 건이 넘은 지 오래다. 한 해 혼인 건수가 갈수록 줄어 불과 21만 건이니 결혼하는 부부 두 쌍 중 한 쌍이 파국을 맞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이혼과 혼인의 격차는 급격히 좁혀지고 있다. 그 와중에 비혼인구는 갈수록 는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유지될 수 있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무능력한 남편과 희망 없는 미취업자의 사례도 적지 않다. 매를 맞고 무시당하는 남편들과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는 남편이며 아내의 이야기도 매우 흔하다. 이 영화가 그린 위기가 결코 낯설지 않은 이유다.
▲ <희망의 요소> 스틸컷 ⓒ GIFF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
가장 안타까운 건 남편이 꿈을 걸고 있는 공모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좁은 문에 그는 제 운명을 건다. 모든 노력을 들여 이룰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목표를 향해 꿈을 던진다. 영화를 보는 누구도 그가 꿈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어디 신춘문예뿐일까. 사법시험과 행정고시, 각종 공무원 시험, 임용고시 등을 목표로 수년 씩 수험생활에 매달리는 이가 적지 않다. 그들이 퍼붓는 노력이 언제나 목표에 닿으리라고 대체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그 길고 지난한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이 자존감을 잃고 무너져 내리기 십상이다. 그들의 삶엔 희망이 있는가.
영화의 제목은 <희망의 요소>다. 그러나 영화는 남편이 남긴 소설을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아내는 그곳에서 '희망의 요소'를 보았다고 말하지만 영화는 끝내 그것이 무엇인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원영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는 오롯이 관객이 해석할 몫으로 남겨졌다. 낙담으로 가득한 우리네 삶에서 대체 어떻게 희망을 구할 수 있을지, 희망의 요소란 게 대체 무엇인지를 관객이 직접 찾아내야만 한다. 일부 공감이 가는 구석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는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영화인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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