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내 딸이 평양에 있다" 아픈 엄마의 11년째 외침

[인터뷰]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 꽃> 이승준 감독, 김련희씨

등록|2021.10.27 10:09 수정|2021.10.27 10:09

▲ 영화 <그림자 꽃> 출연자인 김련희씨(좌측)와 이승준 감독. ⓒ 엣나인필름


4년의 촬영 그리고 2년의 기다림. 가족을 두고 북한을 떠난 뒤 중국에서 브로커에 속아 한국에 머물게 된 김련희씨 사연이 영화화되고 극장에 걸리기까지의 시간이다. 김씨의 사연을 접한 뒤 무조건 이야기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승준 감독은 대체 무엇을 봤던 걸까.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 꽃> 개봉을 앞둔 지난 25일 감독과 주인공 김련희씨를 서울 아트나인에서 만났다.

시작은 한 일간지의 1면 기사였다. '나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제목의 기사를 본 이승준 감독은 아는 변호사를 통해 김련희씨를 접촉했고, 연락이 되자마자 그의 직장이 있는 경상북도 영천으로 카메라를 들고 내려갔다고 한다. 그때가 2015년이었다. 이미 김련희씨는 한국에 온 지 4년째였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형이 확정된 이후였다. 금방 고국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김련희씨가 한국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가장 높아져 있던 때였다.

"불행 만드는 시스템, 그걸 묻고 싶었다"

"만나자마자 바로 촬영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제가 언론인도 아니고 시간은 아마 걸리겠지만 꼭 만들고 싶다고 했지. 이미 기사에도 그의 절박한 상황이 드러나 있었고, 만나서 그 얘길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다행인 건 김련희씨가 자길 무슨 투사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으면 하더라.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본인은 아이와 가족이 있는 평양으로 가고픈 아줌마지 무슨 투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더라." (이승준 감독)

"2011년 남한에 온 뒤 스스로 간첩이라고 외쳐서 감옥에도 다녀왔다. 그때부터 절 믿어주신 변호사님이 있는데 '믿을 만한 분이 연락할 테니 꼭 받으시라'더라. 사실 직전에 MBC 최승호 피디가 제 사연을 알리고 싶다며 찾아왔는데 거부했었다. 근데 변호사님 소개라 감독님은 무조건 믿었지. 뭐한 분인지 찾아봤는데 <달팽이의 별> <신의 아이들> 등이 나오더라. 약자에 대해 편견 없이 다뤄온 분인 것 같았다. 이 사람이면 내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다." (김련희씨)

 

▲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 꽃> 관련 이미지. ⓒ 엣나인필름


제목 자체가 어찌 보면 모순이다. 색과 향기로 대변되는 꽃 앞에 그림자라는 단어가 따라온다. 이승준 감독은 "아무리 사랑하고 소중한 존재도 오래 떨어져 있다 보면 흐릿해지기 마련"이라며 "남북 관계가 그러하고 이산가족이 바로 그런 분들일 텐데 련희씨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이 흘러 불행을 느끼게 하는 시스템에 대해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치나 체제는 잘 모르겠고, 본인 의지와 상관 없이 시스템 문제로 개인이 처하게 된 불행은 우리가 풀어줘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북한과 남한은 그간 서로 다른 점만 찾으려 했다. 사는 모습도 생각도 다르다며 서로 배척했는데 이 영화로 비슷한 면을 좀 찾자는 의도가 있었다. 미사일, 핵 문제는 다른 테이블에서 논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는 우리가 좀 노력하자는 거지." (이승준 감독)
 

물론 몇 가지 의문점도 생각할 만하다. 이를테면 지병인 간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중국에 사는 친척네에 갔다가 브로커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어떻게 남한으로 단순히 넘어올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그 연결 고리가 약하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또한 스스로 간첩이라 주장하거나, 평창 올림픽에 참여한 북한 선수단을 무작정 찾아가 만나려는 시도들이 자칫 김씨의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주장도 그렇다.

"남한에선 북에 대해 잘 모르니까. 아주 어렵게 살던 고난의 행군 시절이 있었다. 그때 생활을 이어가게 할 유일한 방법이 중국 밀수였다. 국경 근처에서 중국 제품을 밀수하거나 탈북해서 중국 사람과 결혼한 경우가 꽤 있었다. 북한은 자유롭게 여행이 가능한 체제가 아니잖나. 중국만이 유일한 탈출구였지. 그래서 중국에 간 이후 남쪽으로 밀입국도 가능하다 생각한 거다. 두 달간 중국에 머물 때 조선족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밀항하는 걸 봤거든. 당연히 가는 게 두렵지. 근데 몰래 2개월만 돈 벌면 병원비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줌마다 보니 그런 정치나 체제를 잘 몰랐다. 관심도 없었고." (김련희씨)
 

그렇게 남한으로 갈 준비 중 뒤늦게 북한으로 돌아가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이미 브로커에게 여권을 뺏긴 뒤였다. 결국 김씨는 의사에 반해 남한에 들어오게 됐다. 그때가 2011년 9월이었다.

"저 또한 그런 의심이 들었다.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닌가 싶었다. 근데 한편으로 련희씨 입장에선 오히려 한민족이니 더 이해해줄 수 있겠다 싶은 거지. 남한과 북한 사람은 기질적으로 많이 다르더라. 우린 계산하고 따지는 데 익숙하지만 북한 사람은 재지 않는다. 련희씨가 말 그대로 간첩이라고 하자. 입국하자마자 북한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세상에 어떤 간첩이 그렇게 행동할까. 그리고 신문에 기사가 났다고는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질 않으니 더 격하게 알릴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는데 못 갔잖나. 조용히 지냈으면 아마 북에 가는 걸 포기하고 정착을 결심했다고 주변에선 짐작하겠지." (이승준 감독)

"어려운 현실에서 나아갈 힘 나누길 원해"
 

▲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 꽃> 관련 이미지. ⓒ 엣나인필름


영화의 백미는 바로 북한 평양에 사는 김련희씨의 가족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남편과 딸 그리고 노부모가 둘러 앉아 식사를 하거나 일터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담겼다. 이 감독의 지인인 핀란드 국적의 감독, 그리고 당시엔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만, 지난해 별세한 재미동포 노길남 박사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이승준 감독은 "북한의 허락을 받기까지 1년이 걸린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노길남 박사님이 김련희씨 가족 취재를 몇 번 했었다. 그 경험으로 우릴 도와주시겠다고 하신 것이지. 제가 그 이상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박사님에게 핀란드 감독 인적사항을 전하고 마냥 기다렸다. 몇 개월 후 그 감독 스팸 메일함에 북측의 메시지가 와있더라. 그때가 2016년 겨울이었다. 북경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묘하더라. 그리고 2017년 10월경 평양에서 추가 촬영을 했다." (이승준 감독)

영화에서 김련희씨 그리고 비전향장기수 동료가 달고 있던 노란 리본이 유독 눈에 띈다.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40년 넘게 북송을 주장해 온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참사에 어떤 마음으로 연대하고 있는 건지를 물었다. 이승준 감독이 전작 <부재의 기억>으로 세월호 참사를 다뤘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부모님이 투사나 운동가가 아니잖나. 그저 자식을 잃은 엄마 아빠잖나. 그게 제 심정인 거지. 얼마나 막막할까. 저였으면 못 견딜 것 같다. 지금도 세월호 하면 항상 마음이 그렇다. 누구도 대신 감당 못할 비극이다." (김련희씨)

독립 다큐인으로 묵묵히 작품을 발표해 온 이승준 감독은 다큐멘터리의 역할을 두고 문제 해결을 위한 게 아닌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도구라 정의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그리고 앞으로 할 작품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이 좀 더 행복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다만 누군가에게 힘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부재의 기억> 때 유가족, 생존자 학생들에게 받은 문자가 있는데 그게 되게 힘이 되더라. 우린 종종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일과 마주하게 된다. 그걸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누가 행복을 막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고 같이 얘기하고 싶다. 다큐가 그걸 위한 도구가 되었으면 한다." (이승준 감독)

최근 7월 김련희씨는 결국 간암 진단을 받았다. 북한에 지금 못 돌아간다는 두려움이, 영영 가족 곁에 묻힐 수 없다는 두려움이 됐다면서도 그는 "정말 제가 아프더라도 가족을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강하게 드러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