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동안 찬란했던 역사를 뒤로 하고, 이제는 절이란 명칭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터만 남은 그곳, 폐사지로 떠나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신라, 고려시대를 거쳐 불교가 융성했던 만큼 도시의 중심부, 풍수가 좋은 계곡, 마을마다 규모가 큰 사찰이 곳곳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산 깊숙이 자리 잡은 산사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병란과 방화,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많은 절이 폐허가 되었다. 현재 목조로 만든 건축물은 초석만 남은 채 모두 사라지고 쓸쓸한 그 자리에는 탑, 승탑, 당간지주 등 석조물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1000년 고도인 경주를 비롯해 부여, 익산 등 전국의 이름난 역사 도시마다 이름난 폐사지가 한 군데 이상 존재한다.

그럼 이곳 경기도에도 괜찮은 폐사지가 있을까? 우선 앞서 소개했던 양주의 회암사지를 먼저 들 수 있겠다. 조선 왕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당시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회암사는 폐허만 남았지만 그 당시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번엔 경기도 남부 여주에 자리 잡은 고달사지를 떠나보려고 한다.

여주의 북쪽, 혜목산 아래 자리 잡은 고달사지는 고려 초기까지 작은 암자였지만 원감 화상 현욱이 고달사에 주석하면서 점차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사의 예우를 받았던 원종대사 찬유가 입적 후 광종은 특별히 명을 내려 도봉원, 희양원과 함께 삼부 동선원으로 삼으며 고려 3대 선종 사찰이 되었다.

하지만 이 번창했던 사원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1799년에 쓰인 <법우고>에는 고달사가 폐사된 것으로 기록된 것으로 봐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한동안 절터 앞마당까지 민가가 들어차면서 예전의 영화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이젠 깔끔하게 절터를 정비하고, 위쪽엔 고달사를 계승하는 절도 새롭게 생겼다.

비록 터만 남았지만 고달사에 남은 석조 유물이 화려했던 예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로 지정된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원종대사 탑과 탑비, 석조대좌 등이 있고, 쌍사자 석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고달사는 초석만 남은 터가 대부분이지만 드문 드문 서 있는 석물의 위엄을 보아하니 같은 경기도의 회암사지 못지않았던 위상을 가졌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금당 건물은 오래전 불에 타 없어졌지만 남아 있는 불상 좌대의 연꽃무늬가 인상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위풍당당한 자태를 지닌 원종대사 탑비와 고달사지 석조도 이 절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유물이다.

하지만 이 절터가 보유한 가장 큰 보물은 서쪽 숲 속에 자리한 두 기의 승탑이다. 숲길을 따라 10분 동안 걷다 보면 산비탈에 자리 잡은 원종대사 승탑을 마주하게 된다. 장대한 스캐일은 물론 기단부의 용 조각이 무척 화려하게 느껴지는 걸작이다. 하지만 여기서 계단을 따라 조금 더 가던 길을 가다 보면 고달사 최고의 보물이자 국보 4호로 지정된 고달사지 승탑이 나온다.

좀 전에 봤던 원종대사 승탑도 대단했지만 예술에 대한 심미안이 부족한 사람의 눈으로 봐도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 디테일의 차이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고달사지 승탑은 현재 원감 대사 현욱의 승탑이라 추측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승탑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또한 원주, 충주의 남한강변의 다른 폐사지들과 함께 연관해 떠나보는 것 도 좋을 듯하다.
      
이제 고달사지를 떠나 불교 조각 전문 박물관으로 유명한 목아박물관으로 이동해 볼 차례다. 다시 여주 시내 방면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골프장을 심상치 않게 발견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으며, 물 좋은 경치에, 아늑한 경관을 자랑하는 여주에 골프장이 대거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볼 수 있다. 하나 이로 인해 여주의 옛 자취가 점점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지나가고 어느새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목아박물관의 정문에 도착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목아 박찬수 장인이 수집하고 제작한 불교 관련 조각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인데 야외에 전시된 조각품부터 어디서도 쉽게 보기 힘든 이색적인 것들이었다.

너그럽고 인자한 부처부터, 성모 마리아와 장승에서 착안해 현대적으로 해석한 부처상까지 야외 정원만 둘러봐도 입장료 값을 독특히 할 만한 장소라고 본다. 본관 역시 전통 한옥양식에 인도 석굴과 여러 문화권의 요소가 차용된 독특한 건축물이었다. 3층으로 올라가 밑으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관람을 하는 구조인데 3층에는 주로 박찬수 장인의 조각품을 만나게 된다.

국보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모작은 물론 부처의 화신, 12 지신 상 등 다양한 목조 조각 등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특히 목조에 색감이 입혀진 모습은 다른 사찰이나 박물관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것들이라 경외감마저 들었다. 3층이 조각이라면 2층은 불교회화의 진수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장소다.

대방광불 화엄경, 예념 미타 도량 참법, 묘법연화경 등 보물로 지정된 3개의 문화재는 물론 탱화와 함께 스토리별로 정리되어 있어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1층은 체험관은 물론 5백 나한을 전시해 놓은 나한전이 이 박물관의 또 다른 명물이라 할 만했다.     
박물관을 나와 황학산 수목원으로 여주 답사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려 한다. 습지와 잔디밭이 쭉 펼쳐진 아름다운 숲 속을 거닐며 그동안 쌓인 여독을 풀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곳에는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고분군 중 하나인 매향리 고분이 산림박물관 뒤편에 자리 잡고 있어 자연을 즐기는 답사 여행으로 떠나 보시길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