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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나를 버려요" 물건이 말을 걸어왔다

물건 비우기의 새로운 방법, 물건에 귀를 기울이세요

등록|2021.11.16 07:32 수정|2021.11.16 07:32
물건 비우기를 소재로 한 일본 드라마 <버려요, 아다치 씨>를 봤다. 배우 아다치 유미는 '필요 없지만 버리지 못하는 물건 버리기'를 연재 기사로 써달라는 잡지사의 제안을 받는다. 아다치는 '바이바이 리스트(Bye-Bye list)'라고 쓴 빈 종이를 벽에 붙이고, 무엇을 버릴지 고민한다.
 

▲ 물건 비우기를 소재로 한 일본 드라마 <버려요, 아다치 씨> ⓒ 도쿄테레비 화면 캡처


그날 밤부터 그녀의 꿈에 의인화된 물건이 찾아와 말한다. "날 버려요, 아다치 씨."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 DVD는 한 번도 보지 않아 슬프니 버려달라고, 서점 비닐봉지는 재질이 고급이라 오히려 1년 넘게 구석에 처박혀만 있어 괴로우니 제발 버려달라고 부탁한다. 매회 첫 핸드폰, 선물 받은 벽시계, 같은 책 2권 등 다양한 물건이 그녀에게 찾아온다.

오늘 밤 내 꿈에도 우리 집 물건이 찾아와 "제발 날 버려요, 윤정 씨"라고 한다면, 무엇일지 집안을 둘러보았다. 몇 달째 고장 난 채로 세탁기 위에 있는 가스 의류 건조기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갑자기 작동하지 않아 수리 기사를 불렀는데, 20년 가까이 된 제품이라 부품이 없다고 한다. 보통 새 전자제품을 설치하면서 헌 제품은 수거해주니 그때 버려야지 생각했다. 구매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의류 건조기는 어느새 비닐봉지 수납함이 되었다.

"내 배 속에 옷이 아닌 비닐봉지 때문에 토할 것 같아요. 날 버려요, 윤정 씨." 가스회사에 전화를 걸어 가스를 끊고, 대형 폐기물 신청을 했다. 안녕! 신생아 내복부터 공주 원피스를 지나 중고등학교 교복 와이셔츠까지 네가 세탁물을 잘 말려준 덕분에 수월하게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어. 그동안 수고했어!

욕실 수납장에 비누 하나가 나를 부른다. "저는 여기 온 지 2년이 넘었어요. 날 버려요, 윤정 씨." 겉 포장지에 '샴푸'라고 적혀 있다. 생일 선물로 받은 비누 형태의 고체 샴푸인데, 왠지 거품도 잘 나지 않고 머릿결도 뻣뻣해질 것 같아 쓰지 않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화학성분이 거의 없다. 요즘 두피가 가려웠는데, 일단 써보자.

기존 샴푸와 다르지 않게 거품도 잘 나고, 감은 뒤 머릿결도 부드러웠다. 두피도 진정된 느낌이다. 나는 플라스틱 용기를 줄이기 위해 바디워시를 비누로 쓰고 있었는데, 샴푸 비누 역시 일상생활에서 쓰레기 발생을 줄이자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에 동참할 수 있어 좋다. 샴푸 비누야, 말을 걸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 중고앱에 내놓은 책. ⓒ 전윤정


"여봐라~ 과인들을 이리 방치하다니 무엄하도다!" 어이쿠,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 조선왕조실록 20권이다. 아니 인물 사전까지 21권. 신간이 나올 때마다 한 권 한 권 모았던 추억 때문에 꺼내 읽지도 않으면서 계속 가지고 있었다. 검색해 보니 벌써 3번 넘게 개정판이 나왔다. 보통 영화관이나 스트리밍으로 영화를 보면 머리와 가슴에 남긴다. 그런데 왜 책은 실물을 소유해야 안심이 되는지 어리석다.

중고 책도 상태가 좋아야 사는 사람도 기분 좋겠지. 중고거래에 올렸다. 책을 산 이가 사무실에 놓고, 한 권씩 집에 가져가서 아껴 읽으려고 한단다. 전하, 새로운 처소에서 더 귀히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소인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귀를 기울이면... 물건도 마음도 정리하는 시간

'입을 옷이 없네' 옷장을 열어본 나의 한숨 사이로 블라우스 하나가 소리친다.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나요? 버려요, 윤정 씨!" 5년 전 즈음 열심히 입었던 블라우스이다. 외출할 때 오랜만에 입고 나갔다. 입고 찍은 사진을 보니 옷색이 낡고, 내 체중이 늘어 품도 어색하다. 이제 보내 줘야 할 시간이구나.

옷을 정리할 때 눈으로만 보고 결정하려면 망설이기 일쑤였는데, 사진으로 보니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옷의 기록도 된다. 이제 외출할 때마다 옷걸이에 걸어만 두었던 옷을 하나씩 입고 나가, 사진으로 찍어보고 결정해야겠다. 블라우스 안녕! 중저가 상품인데 페이즐리 무늬 때문에 종종 명품브랜드로 오해받기도 했었지. 그동안 고마웠어!

나는 4개월 넘게 <1일1폐> <30일 미니멀 게임>을 하면서 매일 "오늘은 뭘 버릴까?" 생각했다. 주체를 내가 아닌 물건으로 바꾸니 보이지 않던 물건이 눈에 띄었다. 물건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도 새로웠다.

일본 드라마 <버려요, 아다치 씨>의 주인공은 물건뿐 아니라 모두에게 호감 받고 싶은 마음, 열등감, 가족 관계 등 마음의 짐을 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나도 이제 나의 내면도 들여다보고 귀를 더 기울여야겠다. 아, 이런! 내 마음의 소리 없는 아우성. 한꺼번에 말하지 말고 한 가지씩 말해줘, 제발~.
덧붙이는 글 brunch.co.kr/@monchou31 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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