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첫눈에 반했다'는 그 말
나는 그에게 왜 반했나...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사랑'이다
▲ 무제섬마을의 소년 소녀들일까 ⓒ 픽사베이
어릴적 나는 육지에서 3시간 넘게 배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작은 섬마을에 살았다. 8살이던 4월의 어느 날, 육지에서 남자아이가 전학을 왔다. 시골 마을의 까무잡잡하고, 지저분하고, 욕설을 잘 쓰는 거친 남자아이들과 지내다가 유독 하얀 피부에 깨끗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심지어 목소리마저 사근사근한 그 아이를 본 순간 나는 금세 반해버렸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첫눈에 반한 최초의 이성이 아니었나 싶다.
표준말을 쓰던 곱상한 그 아이는 시골 남자아이들과 어느덧 친해지더니 금세 욕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친구들과 순식간에 동화되고 말았다. 그 아이가 좋았던 건 섬마을 남자아이들과 다르게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 같은 첫인상 때문이었는데 그런 기대감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짝사랑이 끝난 순간이었다.
그렇게 여러 책을 탐독하던 중 사랑이나 연애는 현상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본성이나 심리를 알아야 한다고 깨달았던 것 같다. 요즘은 유튜브에만 접속해도 연애를 상담해주는 채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젊은 친구들에게 유튜브와 블로그 연애전문가의 코칭을 받기 전에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이나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자끄 라깡의 <욕망이론>,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와 같은 심리, 철학과 문화인류학 분야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연인이라는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에서 보다 성숙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욕망인가 사랑인가
그중에서도 프랑스 철학자 자끄 라깡이 쓴 <욕망이론>은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내면과 본성을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도와준 고마운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첫눈에 반하다'만큼 세상에서 위험한 말은 없다고...
'첫눈에 반했다'를 자끄 라깡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욕망에 정확히 부합하는 이미지를 찾았어'.
▲ 사랑 평생을 배워도 숙제인 무엇 ⓒ 픽사베이
사람의 취향은 주위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과 자신의 다양한 욕구가 어우러져 형성되는 것이기에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 머리속에 새겨진 취향을 충족시키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내가 저 상대에게 첫눈에 반한 것은 오롯이 나의 문제이지 상대의 문제가 아닐수도 있다'라는 자각에 있다. 저 사람이 너무나 근사하고 멋있어서 내가 첫눈에 반한 것은 맞지만, 저 사람이 너무나 근사하고 멋있어 보이게 하는 느낌의 근원은 바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자신의 욕망의 특이함을 이름 짓지 못하여 그저 '근사해(adorable)'라는 말로 귀착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에 빠진 감정에만 매몰되어 스스로를 객관화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자신이 반한 상대의 매력을 그저 '근사해' 혹은 '멋있어' 라는 단어로 두루뭉술 넘어가지 말고 자신의 욕망의 특이함에 하나하나 이름표를 달아줄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나를 왜 사랑하는가에 대한 상대의 답변은 내가 저 사람의 사랑을 과연 받아들여도 되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만일 당신이 연인에게 '나를 왜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했을 때,
'사랑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사랑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사람과 '비 온 다음날 아스팔트 위에서 길을 잃은 지렁이를 징그러워하면서도 기어이 풀밭으로 보내주던 너의 착한 심성과 결단력에서 말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느꼈어'라고 답하는 사람 중에서 누구의 답변에 더 신뢰가 갈까.
누군가에게 반해 사랑에 빠졌으나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자신의 내면 상태를 깊게 들여다볼 줄도 모르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훗날 갑작스럽게 식은 자신의 감정- 왜 내가 연인에게 왜 실망하는지, 왜 사랑이 식어가는지- 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킬 가능성이 크다.
첫눈에 반해 급격하게 감정이 불타올랐다가 불과 몇 달 만에 식어버리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키고, 투영된 타자, 즉 타자의 몸을 빌려 내가 되고자 하는 완벽한 또 다른 나에게 빠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처럼 말이다. 진짜로 사랑해야 할 타인은 허수아비로 만든 채 내가 만든 허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만든 이미지에서 타인이 벗어나는 순간 사랑은 금세 식어버린다.
섬마을의 꾀죄죄한 시골뜨기였던 나는 8살 첫 짝사랑 아이에게서 육지의 환상을 덧입혀 보았던 것 같다. 나는 그 아이 자체를 좋아했다기 보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그리고 나와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청결함과 도회적인 이미지를 좋아했던 것 같다. 사람은 원래 내가 갖지 못하거나 내가 더욱 가지고 싶어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타자에게 끌리는 법이니까...
영화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에서 여주인공 브리짓은 두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받는다. 매력적인 바람둥이 다니엘 클래버는 브리짓에게 '당신과 잘되지 않으면 어느 누구와도 잘될 것 같지 않다'고 말하고, 다소 오만하지만 정직한 마크 다시는 '당신에게는 가끔 바보스러운 면도 있고, 당신 어머님도 특이하시고, 눈에 띄게 연설도 못하고, 상황과 상관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모습 그대로의 당신을 좋아해요'라고 말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브리짓은 두 사람의 고백에 주저 없이 마크를 선택한다.
'첫눈에 반하다'라는 말이 풍기는 로맨틱한 이면에는 타자에게서 내 취향과 욕망을 읽어 내리는 기호도 함께 숨겨져 있다. 첫눈에 반했던 상대가 시간이 흘러 비록 내 욕구에 정확하게 부합하지 아니하였던 사람으로 판명이 나게 될 지라도 내 욕망의 프레임을 상대방으로부터(정확히는 내 눈에서) 한 꺼풀 벗겨 내도록 노력해보자. 이미 눈에 씌인 콩깍지가 벗겨지고 있다면 그때야말로 비로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절호의 찬스이리라.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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