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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받으러 쫓아갔나..." 전두환 사망 다음날, 세상 떠난 노교수

[전두환 사망] 5·18 상징적 인물 노희관 명예교수 24일 사망... "저승에서라도 사과 받기를"

등록|2021.11.27 20:14 수정|2021.11.27 23:11

▲ 26일 노희관 교수가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됐다. ⓒ 노광훈씨 제공


"전두환의 사망 소식을 오전에 뉴스로 들었는데, 오후에는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아버지는 끝내 전두환에게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하고 떠나셨죠."

노광훈(59)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노희관 전 전남대 명예교수가 24일, 항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두환씨가 사망한 다음 날이었다.

아들 노광훈씨는 27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아버지가 저승에서 전두환을 심판하러 갔나보다라고 했다"라면서 "제발 그곳에서라도 사과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1980년 5월 당시 노 전교수는 전남대 교수로 재직하며 학원자율화를 위한 시위에 참여했다. 계엄령이 내려진 광주에서 그는 학생들과 함께 금남로를 누비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자신이 사용하던 심리검사실을 학생들에게 빌려주며, 전남대 학생들의 집회계획을 돕기도 했다.

과거 송선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노 전 교수는 교수직을 걸고 선뜻 심리검사실의 열쇠를 내어주었다. 그곳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노 전 교수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시위에 직접 참여하고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도운 대가는 참혹했다. 5.18 이후 노 전 교수의 수배령이 떨어졌고, 보안사는 집까지 찾아와 가족들을 감시했다. 노광훈씨는 "보안사가 집을 무단 점거하면서 학교도 못 가게 했다. 당시 고3인 나와 7, 8살인 동생들이 벌벌 떨며 집에 갇혀있었다"라면서 "국민을 지켜주는 게 국가라는 가치관이 한 번에 뒤집혔다. 다시 떠올리기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말했다.

보안사가 집까지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에 결국 노 전교수는 광주민중항쟁 진압작전의 실질적인 지휘본부이자, 잔인한 살상이 벌어진 505보안부대에 직접 찾아갔다.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 시민군 등과 함께 투옥된 그는 1980년 7월 전남대학교에서 강제 사직되기도 했다.

노광훈씨는 "아버지의 투옥과 사직으로 집안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1984년 4월 아버지가 복직되기까지 4년여 가족 모두 생활고를 겪으며 힘들게 살았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광주의 5.18, 모욕당하지 않기를..."
 

▲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노희관 전 전남대 명예교수가 24일, 항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 노광훈씨 제공


이후 노 전 교수는 광주의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에 참가했다. 5·18 진실규명은 평생 그가 해결하려했던 숙제였다.

노광훈씨는 "진실규명의 한 축은 전두환의 사과였다. 아버지는 전두환이 단죄받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쓰려졌다"라면서 "2년 전 뇌경색으로 건강이 많이 악화돼 돌아시기 전까지 인지능력이 거의 없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투병생활을 하던 노 전 교수는 24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후 그는 26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됐다. 유족들과 고인의 지인을 비롯한 5·18 단체 인사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노 씨는 "함께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들과 함께 묻혀 아버지가 외롭지 않을거 같아 다행"이라면서도 "전두환 장례식장에서 5·18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여전히 진실을 왜곡하는 자들의 말들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사람들이 더는 광주의 5월을 모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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